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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석윤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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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22T15:52:21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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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6일 (월) 19:44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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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6T19:44: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야구]], [[친일반민족행위자]], [[야구 관련 인물]], [[흑역사/목록/야구]]&lt;br /&gt;
[[분류:야구선수]] [[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lt;br /&gt;
[목차]&lt;br /&gt;
== 소개 ==&lt;br /&gt;
朴錫胤&lt;br /&gt;
1898년 10월 26일 ~ 1950년 10월 20일&lt;br /&gt;
&lt;br /&gt;
일제강점기 시기 전 야구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야구인으로써 ===&lt;br /&gt;
1898년 10월 26일,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특별시|경성부]] 종로.&lt;br /&gt;
&lt;br /&gt;
교토 3고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한 엘리트 인재로 동경제국대학 재학 당시 야구로써 출중한 재능을 보여 도쿄유학생 반도야구단 주장 자격으로 제 4차도쿄유학생모국방문경기(1917년), 제 5차 도쿄유학생모국방문경기(1920년), 제 6차 도쿄유학생모국방문경기(1921년)에 참여해 모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주 포지션은 [[투수]].&lt;br /&gt;
 &lt;br /&gt;
1922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그해 제 3회 [[전국체전|전조선야구대회]]에 중앙체육단 소속으로 뛰기도 했으며,  그해 12월 8일에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Pacific Coast League)[* 트리플 A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를 초청하기 위해 [[이원용]]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협상을 펼쳐 방한 경기를 이끌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23년 제4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도 중앙체육단 소속으로 활동하던 그는 [[휘문고등학교 야구부|휘문고보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직하게 되는데 이때 휘문고보를 이끌고 제3회 조선중등학교대회 겸 제9회 [[고시엔|전국중등우승대회]] 조선예선전에 참가, 경성중학교, [[인천고등학교 야구부|인천상업]],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업]], [[대전고등학교 야구부|대전중]], 용산중, [[개성고등학교 야구부|부산상업]], [[부산고등학교 야구부|부산중]]들과 함게 참여, 경성중학교와의 결승전에서 10:1로 대승을 거두며 고시엔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 고시엔 본선에서는 아쉽게 8강에서 머물렀지만 이해 휘문고는 '''순수 조선인 야구부 유일의 고시엔 8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뤄 냈다. &lt;br /&gt;
&lt;br /&gt;
그후 1924년에 하와이원정대의 일원으로 하와이 원정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도 꾸준히 야구 대항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0년 9월 30일 [[대한야구협회|조선야구심판협회]]가 창설 당시 위원으로도 참여했으며 해방이후인 1946년에 박석윤은 조선야구협회 창립 고문으로도 참가했다.&lt;br /&gt;
&lt;br /&gt;
이렇듯 야구계 전반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왜 [[흑역사]]로 평가 받냐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이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 [[친일반민족행위자]]로써 ===&lt;br /&gt;
유학생활을 마친후 [[조선총독부]]와 연을 맺고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직책을 맡았으며 재외연구원 재직시절 조선 총독부의 후원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귀국후인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부사장에 올랐으며 언론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lt;br /&gt;
&lt;br /&gt;
1932년,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서로의 독립을 위해 규합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를 와해시키기 위해 만주국에 민생단을 설립을 주도했고, 이 선택은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후 [[만주국]] 외교부로 발령되어 그곳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는데 이 시기 [[이승만]]을 비롯한 조선독립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의 움직임을 일제에 보고했으며 1939년 2월에 그간의 공로를 인정 받아 만주국의 주폴란드 총영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던 [[간도협조회]]의 와해를 위해 움직였다.&lt;br /&gt;
&lt;br /&gt;
이런 친일 행적으로 인해 [[만주국]]에서 훈4위 경운장(景雲章)을 수여받기도 하고, 만주국 국무원에서 승승 장구하며 만주국협화회 중앙본부 위원까지 올라선 인물.&lt;br /&gt;
=== 해방 이후 ===&lt;br /&gt;
광복을 맞이한 이후 [[여운형]]의 대리인으로 활약하며 [[조선총독부]]와 교섭하는 역할을 맡았고 [[여운형]]에게 행정권 인수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6년 3월, 북한으로가 [[평양]]에서 생활했는데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양덕온천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친일파의 죄목으로 체포 건강을 이유로 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1년후인 1947년 2월 24일에 평양에 위치한 [[정치범수용소/북한|평양 인민교화소]] 구류 되었고 4월 19일 북한 최고재판소에 친일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48년 1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박석윤은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했지만 기각당하며  1948년 6월 9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lt;br /&gt;
&lt;br /&gt;
== 트리비아 ==&lt;br /&gt;
 * 야구 가족이기도 한데 동생인 박석기[* 1900년 ~ 1953년. 대한민국의 [[거문고]] [[산조]]의 대가. 전무형문화재 제16호 기능보유자인 한갑득에게 사사하기도 했다. 그의 형과는 달리 일제강점기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유유자적 살아가다가 조선의 판소리계를 위해 헌신 하기도 했다. 그의 자식인 박윤초도 판소리를 배워 활동했다.]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 이런 친일 행세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데 1924년에 하와이원정단에 합류해 하와이를 방문했을때 그곳의 동포들이 박석윤을 모래사장에 무릎끓고 옆에 칼을 꽂아 자결하라고 일침을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 그의 동생이었던 박석기가 그 칼을 집어들어 그자리에서 자신의 가슴을 X자로 그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기며 그의 결백을 주장해 풀려났다고 한다. ~~이때 할복하고 죽었어야 했는데~~&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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