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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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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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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7일 (화) 06:13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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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7T06:13: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 문서 : [[한국사 관련 정보]]&lt;br /&gt;
 * 상위 문서 : [[전투 목록/한국사]]&lt;br /&gt;
[[분류:삼국시대]][[분류:한국사/전투]]&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한국사]]에서 [[삼국시대]] [[6세기]] 중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 지역을 삼국과 [[가야]] 소국들, 거기에 [[일본]] 등이 모두 얽혀서 다투다가 최종적으로 신라가 장악하게 되는 과정이다. 짧게는 551~553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직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는 이 판도가 확정되는 사건이다.&lt;br /&gt;
&lt;br /&gt;
교과과정에서는 이 때부터 [[5세기]] [[광개토대왕]], [[장수왕]] 대에 형성된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나고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http://contents.history.go.kr/eh_kk/teach/notebook/data/img/054.jpg&lt;br /&gt;
&lt;br /&gt;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을 거쳐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시작했다. 여기에 큰 위협을 느낀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결성,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공동대응해서 강대국 고구려를 근근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475년 9월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살해하고 백제의 수도권이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함으로서 비로소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백제는 크게 약화되었고 혼란기를 거쳤지만 [[동성왕]]과 [[무령왕]]대를 거치며 자리를 잡았고, [[성왕]]대에는 슬슬 고구려에 반격이 가능한 국력을 갖추게 되었다.  북진 직전에 일어난 548년의 [[독산성 전투]] 때까지도 고구려가 쳐들어 내려오면 백제와 신라가 서로 도와주는 나제동맹은 유효했다. &lt;br /&gt;
&lt;br /&gt;
== 북진의 시작 ==&lt;br /&gt;
||&amp;lt;tablealign=right&amp;gt;&amp;lt;-3&amp;gt;&amp;lt;#030&amp;gt; {{{#ffffff 나제동맹군의 고구려 공동정벌 }}} ||||&lt;br /&gt;
||||||&amp;lt;#2e8b57&amp;gt; {{{#ffffff 날짜}}} ||&lt;br /&gt;
||||||&amp;lt;#8fbc8f&amp;gt; 551년 3월 ||&lt;br /&gt;
||||||&amp;lt;#2e8b57&amp;gt; {{{#ffffff 장소}}} ||&lt;br /&gt;
||||||&amp;lt;#8fbc8f&amp;gt; 한반도 중부 ||&lt;br /&gt;
||&amp;lt;#2e8b57&amp;gt;&amp;lt;:&amp;gt; ||&amp;lt;#ff0000&amp;gt; {{{#ffffff 교전국1}}} ||&amp;lt;#0000ff&amp;gt; {{{#ffffff 교전국2}}} ||&lt;br /&gt;
||&amp;lt;#2e8b57&amp;gt;&amp;lt;:&amp;gt; {{{#ffffff 교전국}}} ||&amp;lt;#f08080&amp;gt; 백제군, 신라군 ||&amp;lt;#6495ed&amp;gt; 고구려군 ||&lt;br /&gt;
||&amp;lt;#2e8b57&amp;gt;&amp;lt;:&amp;gt; {{{#ffffff 지휘관}}} ||&amp;lt;#f08080&amp;gt;[[성왕(백제)|{{{#black 성왕}}}]](聖王) [br] [[진흥왕|{{{#black 진흥왕}}}]](眞興王) [br] [[거칠부|{{{#black 거칠부}}}]](居柒夫) [br] [[구진|{{{#black 구진}}}]](仇珍) [br] [[비태|{{{#black 비태}}}]](比台) [br] [[탐지|{{{#black 탐지}}}]](耽知) [br] [[비서|{{{#black 비서}}}]](非西) [br] [[서력부|{{{#black 서력부}}}]](西力夫) [br] [[비차부|{{{#black 비차부}}}]](比次夫) [br] [[미진부|{{{#black 미진부}}}]](未珍夫) [br] [[세종|{{{#black 노부}}}]](奴夫) [br] 야이차(也尔次)† [br] 그외 미상 ||&amp;lt;#6495ed&amp;gt;[[양원왕|{{{#black 양원왕}}}]](陽原王) [br]  [[혜량|{{{#black ←혜량}}}]](惠亮) [br] 그외 미상 ||&lt;br /&gt;
||&amp;lt;#2e8b57&amp;gt;&amp;lt;:&amp;gt; {{{#ffffff 병력}}} ||&amp;lt;#f08080&amp;gt; 불명 ||&amp;lt;#6495ed&amp;gt; 불명 ||&lt;br /&gt;
||&amp;lt;#2e8b57&amp;gt;&amp;lt;:&amp;gt; {{{#ffffff 피해 규모}}} ||&amp;lt;#f08080&amp;gt;불명 ||&amp;lt;#6495ed&amp;gt; 남부 한강 유역 16개 이상의 군을 빼앗김 ||&lt;br /&gt;
||||||&amp;lt;#2e8b57&amp;gt;&amp;lt;:&amp;gt; {{{#ffffff 결과}}} ||&lt;br /&gt;
||||||&amp;lt;#8fbc8f&amp;gt; 고구려군 대패, 영토 축소 ||&lt;br /&gt;
&lt;br /&gt;
&amp;gt;12년(서기 551) 봄 3월, 백제 [[성왕(백제)|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신라‧임라를 말한다.】 고려를 정벌하여 [[서울|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 현재의 평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 일대를 일컫는 말인 남평양을 의미한다. [[아차산]]에서 발굴된 고구려 보루들이 이 남평양을 방어하던 시설로 보는 시각도 있다.]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lt;br /&gt;
&amp;gt;ㅡ 《[[일본서기]]》[[일본서기/긴메이 덴노|긴메이 덴노]] 조&lt;br /&gt;
&lt;br /&gt;
&amp;gt;12년(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lt;br /&gt;
&amp;gt;ㅡ 《[[삼국사기]]》[[거칠부]] 열전&lt;br /&gt;
&lt;br /&gt;
550년에 [[나제동맹]]군은 힘을 합쳐 드디어 본격적으로 북진에 돌입, 한반도 중부 16여개 군을 탈환하게 된다. 한강 하류 지역인 중부지방 서부는 백제가, 한강 상류 지역인 중부지방 동부는 신라가 차지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는데, 특히 백제로서는 76년만에 옛 도읍과 고토를 수복한 것으로 더욱 의미가 깊었다. 그러나,&lt;br /&gt;
&lt;br /&gt;
== 나제동맹의 분열 ==&lt;br /&gt;
&amp;gt;13년(서기 552)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新羅)의 우두방(牛頭方)·니미방(尼彌方)[* 우두방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수 없으며 니미방은 현재의 [[동두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lt;br /&gt;
&amp;gt;ㅡ 《[[일본서기]]》[[일본서기/긴메이 덴노|긴메이 덴노]] 조&lt;br /&gt;
&lt;br /&gt;
&amp;gt;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lt;br /&gt;
&amp;gt;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lt;br /&gt;
&amp;gt;ㅡ 《[[삼국사기]]》[[성왕(백제)|성왕]] 조&lt;br /&gt;
&lt;br /&gt;
&amp;gt;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lt;br /&gt;
&amp;gt;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lt;br /&gt;
&amp;gt;ㅡ 《[[삼국사기]]》[[진흥왕]] 조&lt;br /&gt;
&lt;br /&gt;
백제 성왕은 [[위례성]]을 비롯한 고토를 회복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강유역을 확실하게 점유하려고 했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역으로 하류로 내려와 당초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유역까지 단독으로 모두 차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이에 대해서 그동안 진흥왕이 무력으로 한강 하류를 차지했다는 설이 주류였으나, 최근에는 한강 유역의 방어에 한계를 느낀 백제가 스스로 한강 하류에서 철군했고,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진흥왕의 신라군이 내려와 차지했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성왕(백제)#s-3|해당 항목 참조.]] 요약하자면 신라가 멀쩡히 백제군이 주둔한 땅을 빼앗은 게 아니고 백제가 관리능력의 부족을 느껴 스스로 포기한 것을 신라가 차지했다는 설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는 우선 위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먼저 버린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거론된다. 또 백제 성왕이 속으로는 씁씁하게 여기고 칼을 갈았겠지만 대외적으로 신라에 대해 항의나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점, 2년 후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 보내면서까지 신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한 것, 또 [[관산성 전투]] 출병 당시 백제 귀족층이 출병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점 등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또한 수세에 몰린 고구려가 추가적인 북진을 막기 위해 나제동맹의 한 축인 신라에게 이 쪽으로 오지 말고 저 백제 쪽을 대신 노려서 더 많은 땅을 얻으라는 제안을 했고 신라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설도 있다. 당장 고구려는 북쪽에서 [[돌궐]]과 투닥거리느라 남방 전선에 집중할 수 없었고, 수도 [[평양성]]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황초령 순수비]]에 인근 국가가 사절을 보내 강역확정을 축하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를 고구려의 사절로 본다는 것. 또한 이후 백제와 신라가 대대적으로 맞붙을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방어해야 할 군대까지 [[김무력]]이 데리고 내려가는데, 이러면 필히 원 주인이었던 고구려의 빈집털이 공격을 받을 우려가 큰데, 미리 고구려와 밀약을 맺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관산성 전투 직후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통과해 백제를 공격하기까지 하는데, 이것 또한 신라가 고구려군이 진격할 수 있도록 임시로 길을 내 주었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 백제와 신라의 격돌, [[관산성 전투]] ==&lt;br /&gt;
아무튼 이로 인해 백제의 한강유역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백제와 신라의 유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긴 게 억울하지도 않은지 성왕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 성왕과 진흥왕은 40살 이상의 나이차가 난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이 진흥왕보다 10살이 더 많다.] 유화의 제스쳐를 취한다. &lt;br /&gt;
&lt;br /&gt;
이 기록은 곧 일어날 흐름을 봤을 때 성왕이 신라를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센히메|딸]]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결혼동맹 1년 후인 554년, 성왕은 갑작스럽게 일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시집간 딸의 운명은...-- 이 신라 보복군에는 [[대가야]]와 [[일본]]의 원군까지 합세하였다.&lt;br /&gt;
&lt;br /&gt;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lt;br /&gt;
&lt;br /&gt;
== 결과 ==&lt;br /&gt;
신라는 이후에도 옛 [[옥저]] 땅이었던 [[함경남도]] 지역까지 진출하며, 백제의 견제가 약해진 틈을 타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가야]]를 정벌해 [[영남]]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등 꾸준히 영역을 넓혀가며 [[삼국통일]] 이전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일본서기/긴메이 덴노, version=34)]&lt;br /&gt;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관산성 전투, version=65)]&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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