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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어제의빈묘지명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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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30T21:38:06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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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7일 (화) 11:41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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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7T11:41: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정조]]가 후궁 [[의빈 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직접 쓴 묘지명.&lt;br /&gt;
&lt;br /&gt;
의빈 성씨가 죽은 해인 [[1786년]](정조 10년)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두 번이나 차인 [[흑역사]]와 끝내 맺어진 러브스토리를 직접 기록했다.&lt;br /&gt;
&lt;br /&gt;
두 사람의 인연은 정조가 11살, 의빈이 10살 때인 [[1762년]](임오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빈은 본래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 댁 청지기 성윤우의 딸로 1762년에 [[혜경궁 홍씨]] 처소 궁녀로 입궁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공교롭게도 이 해 음력 2월 2일, 정조와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렸으며 윤5월 21일,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난다. 의빈이 정확히 몇 월에 입궁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임오화변 직후 혜경궁이 정조를 데리고 친정집에 가 있었을 때 데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lt;br /&gt;
&lt;br /&gt;
혜경궁 홍씨는 어린 의빈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 지 의빈을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 어머니가 친히 기르는 궁녀였으니 정조와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로부터 약 4년 뒤인 [[1766년]], 15살의 정조는 14살의 의빈에게 승은(왕이 궁녀와 합방하는 것)을 내리려 한다. 이 해 8월, 효의왕후(당시 세손빈)가 관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와 효의왕후의 초야도 이 해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빈은 아직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맹세하고 정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비슷한 예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당시 궁녀였던 숙빈 임씨에게 승은을 내려 [[은언군]]을 낳은 일로 [[영조]]에게 심한 질책을 당했다고 한다. 만약 정조가 의빈에게 승은을 내려 아이를 얻었다면, 정조 역시 영조에게 질책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조가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 한 것은 다소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행히 의빈의 거절로 이 일은 영조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적어도 어렸을 때는 아니었던 것 같다. 18살 때인 [[1769년]]에는 여동생 청선공주의 남편 홍은위 정재화, 별감들과 함께 술집, 기생집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이를 염려하여 아버지 홍봉한에게 도움을 청했고, 홍봉한이 별감들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역시 영조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됐다.&lt;br /&gt;
&lt;br /&gt;
한편 의빈 성씨는 정조를 차고 나서도 궁녀 생활을 잘 했던 것 같다. [[1773년]],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함께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한다. 정조는 의빈의 붓글씨가 범상하다고 기록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마침내 [[1776년]], 25살의 정조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서른이 가깝도록 아들은 커녕 딸도 얻지 못했다. 결국 계조모인 [[정순왕후]](당시 왕대비)의 간택령에 따라 후궁을 간택한다. 정순왕후는 간택령에서 &amp;quot;정조가 궁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amp;quot;라고 했는데, 이를 볼 때 정조가 의빈에게 거절당한 흑역사를 몰랐던 것 같다. &lt;br /&gt;
&lt;br /&gt;
아무튼 이 때 간택된 첫 후궁이 [[원빈 홍씨]]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입궁한 지 1년도 안되어 후사없이 죽고, 두 번째로 간택된 후궁 [[화빈 윤씨]] 역시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게다가 화빈 윤씨는 투기가 심해 따로 방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정조는 후궁을 둘이나 간택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무려 15년 만에 다시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또 거절당한다(...) 결국 의빈 성씨의 하인을 벌하고 나서야 명을 따랐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후 의빈 성씨는 아들 [[문효세자]]와 딸 옹주를 낳으나 모두 앞세워보낸다. 그리고 자신 역시 셋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둔다. 정조는 의빈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지명, 묘표, 치제제문, 비문 등을 썼는데 비문에는 심지어 &amp;quot;사랑한다&amp;quot;는 말까지 적혀있어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그 절절한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lt;br /&gt;
&lt;br /&gt;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은 약 200년 뒤인 [[2005년]] 로맨스소설 《[[비단속옷]]》,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2007년]] 드라마 《[[이산]]》, [[2016년]] 뮤지컬 《정조-만천명월주인옹》등에서 각색되어 그려졌다.&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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