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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봉조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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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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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7일 (화) 09:23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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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7T09:23: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http://pds15.egloos.com/pds/200906/05/40/b0065940_4a28e00589d3e.jpg&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기본 정보 ==&lt;br /&gt;
이름 이봉조(李鳳祚)&lt;br /&gt;
출생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lt;br /&gt;
사망 [[1987년]] [[8월 31일]], [[서울특별시]]&lt;br /&gt;
가족 [[배우자]] [[노(성씨)|노전숙]], [[파트너|첩]] [[현미(가수)|현미]]&lt;br /&gt;
자녀 [[자식|슬하]] 3남 3녀[* 두명의 부인에게서 얻은 자녀들이다.]&lt;br /&gt;
학력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졸업]]&lt;br /&gt;
&lt;br /&gt;
== 소개 ==&lt;br /&gt;
[[1931년]] [[5월 1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진주시]]에서 자라왔는데, 일찌감치 [[미국]] [[재즈]] [[음악]]을 듣다가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학교|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4학년 재학중 친구의 권유로 부터 [[미8군]]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는 [[재즈]] [[색소폰]]을 연주 및 공연을 했는데 뛰어난 실력으로 전국 방방곡곡 연주를 했다. 그것을 계기로 [[시청|서울특별시청]] 토목과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당시 유명 색소포니스트인 엄토미[* [[엄앵란]]의 작은아버지.]의 제자로서 인정받아 실력을 쌓았다.&lt;br /&gt;
&lt;br /&gt;
이를 계기로 서울특별시청 [[건축가|토목과]]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재즈]]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윤복희]]를 먼저 발굴시켰고 나중에 [[부인]]이 될 [[현미]] 등의 가수를 발굴시켰다.&lt;br /&gt;
&lt;br /&gt;
1963년,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가정교사'. 그리고 이듬해엔 영화 음악연출가로도 데뷔하였으며, 1967년에는 영화음악 연주감독으로 데뷔했다. 훗날 여러 국제가요제에서도 작곡가로서 본인의 이름을 알렸으며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로 색스폰 연주곡 CCM 음반도 다수 출판했다.&lt;br /&gt;
&lt;br /&gt;
보통 [[작곡가]]들은 즉흥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신성일|맨발의 청춘]]’이 그랬다. 촬영 기간이 18일이었지만 작곡할 시간은 더욱 짧았다. 미8군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약했던 그는 촬영 화면을 보고 녹음실에서 색소폰으로 몇 번 ‘빠앙빠앙’ 불다가 주제곡을 완성했다. [[천재]]성이 있으며 다재다능했다. 6인조 밴드를 조직해 활동했고, 서예의 달인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신정]] 때 친필로 써 보낸 그의 카드는 하나의 작품이었다.&lt;br /&gt;
&lt;br /&gt;
== 결혼 생활 ==&lt;br /&gt;
[[부인]]인 노전숙[* 사실상 본부인.]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자식|슬하]] 2녀를 두게 된다.[* 총 1남 3녀를 두었다.] 하지만 그 사이 본부인 몰래 [[가수]] [[현미]]를 만나 동거하게된다. 이후 [[아들]]을 출산했으며, 현미 사이에 둘째 아들을 낳을 때까지 본부인인 노전숙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현미의 첫째 아들 과 노전숙의 셋째 아들과 [[동갑]]이라는 것이다.--네?--그러다가 본인의 [[간통|외도]]와 [[심제프|두집 살림]]을 서로 알게 되자 [[가정|가정 파탄]]에 이를 지경이 될 뻔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60년대 당시에는 비교적 종종 일어난 일이었다.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기도 했으며, 그 당시 이혼사유 1위(그것도 매우 압도적이었다)가 부정행위 또는 두집 살림인것을 보면... ]그렇게 잘 살다가 [[파트너]]인 현미와 동거? 한지 15년만에 헤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본부인인 노전숙과도 따로 살게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봉조는 홀로 살다가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lt;br /&gt;
&lt;br /&gt;
[[여담]]으로 본부인인 노전숙 사이에 4남매는 모두 잘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모두 출가시켰으며, 그 중 [[아들]]인 이영대는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분류: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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