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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집시 롯데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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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6-22T00:40:51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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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6일 (월) 19:55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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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6T19:55: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 항목 :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치바 롯데 마린즈]]&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집시 롯데는 [[일본프로야구]]의 [[치바 롯데 마린즈]]가 [[롯데 오리온즈]][* 1949년 9월 21일 일본 유력 일간지인 [[마이니치 신문]]에 의해 '''마이니치 오리온즈(1950~57년)'''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이후 '''다이마이 오리온즈(1958~63년)''', '''도쿄 오리온즈(1964~68년)'''로 이어져 왔다. 그러다 1969년 한일 다국적 기업인 [[롯데그룹]]이 네이밍 스폰서를 맡고 1970년 시즌 종료 후 구단을 정식으로 인수하면서 '''롯데 오리온즈(1969~91년)'''로 팀명이 변경되었고 1992년부터 [[치바]]로 연고이전하면서 현재의 팀명인 '''치바 롯데 마린즈(1992~현재)'''를 사용하고 있다.] 시절인 1973년~1977년에 특정 본거지에 홈구장을 가지지 않고 여러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며 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안습의 시기를 비하하는 호칭이다. 이 5시즌 동안 롯데는 [[수도권(일본)|수도권]]과 [[미야기]]현 [[센다이]]시 등을 전전하며 홈게임을 가졌다. 특정 거점을 가지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모습을 팬들은 '''&amp;quot;집시 구단&amp;quot;'''이라고 야유했다.&lt;br /&gt;
&lt;br /&gt;
== 연고지 이전 ==&lt;br /&gt;
롯데는 다이마이 오리온즈 시대의 1962년부터 [[도쿄 스타디움]][* 해당 항목의 축구전용구장과는 별개의 구장. 영화사업을 하던 [[다이에이]] 社의 사장 겸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가 [[도쿄]] [[아라카와]] 구에 사재를 털어 야심차게 만든 구장이다.]을 홈구장으로 했지만, 다이마이 야구단을 인수한 [[롯데]]에서 도쿄 스타디움을 사용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다이마이에서 롯데가 구단을 인수할 때 홈구장의 인수도 제안했지만 롯데에서 거절하였다. 구장 크기가 작아 투수에 불리하다는 당시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의 의견도 있었다.] 1972년 시즌 종료 후 구장은 폐쇄되었다.[* 위치선정 미스와 비인기였던 [[파리그]] 소속 팀인 오리온즈의 홈구장이라 관객이 적어 적자가 많았던 사정도 있었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수도권을 연고로 하는 다른 구단들의 홈구장을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경기 일정을 결정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닛폰햄 파이터즈|닛타쿠홈 플라이어스]][* 1974년부터 [[닛폰햄]]이 구단을 운영하게 되면서 '''닛폰햄 파이터즈''' 로 구단명 변경]의 [[고라쿠엔 구장]],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 아톰즈]][* 1974년부터 '''야쿠르트 스왈로즈''' 로 구단명 변경]의 [[메이지진구 야구장]],  [[다이요 훼일즈]]의 [[카와사키 구장]] 등에 경기가 없는 날에 홈경기를 편성했지만,[* 그 외에도 [[교토]]의 [[니시쿄고쿠 구장]],  [[시즈오카]]의 [[쿠사나기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루기도 했다.] 그래도 절반 이상은 개최지가 미정 상태였다.[* 진구구장에서 20경기 가량의 홈경기를 치루려 했으나 [[대학야구]] 리그 등으로 인해 6경기로 대량 축소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와중에, [[미야기]] 현 [[센다이]] 시에 있는 [[미야기 구장]]을 사용하는 방안이 부상했다. &lt;br /&gt;
&lt;br /&gt;
프로 야구 실행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1973년부터 [[미야기 구장]]에서의 홈경기를 편성했으며 그 해 5월 22일 [[미야기 구장]]에서의 첫 홈경기가 対 [[긴테츠 버팔로즈]] 전으로 열리면서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다.[* 첫 경기날 최대수용량인 2만3천명을 넘는 3만명 이상의 관중이 미야기 구장을 찾을 정도였다.] 같은 해에는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취임하여 그의 엄청난 인기와 당시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세이부 라이온즈|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의 라이벌전 등과 전후기리그 우승을 위한 피터지는 싸움 등이 관객 증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러나 이 해 시즌은 결국 전후기리그 전부 2위로 끝나며 리그 우승에 실패했다.] 이 해 시즌의 관객수가 작년 시즌의 '''31만명''' 이란 처참한 성적에서 '''94만 6500명''' 으로 그해 관객수 1위를 차지하며 대량 증가하는 호조를 보이면서 [[퍼시픽리그]] 신기록을 달성하는 대성공을 거뒀다.&lt;br /&gt;
&lt;br /&gt;
그 해 11월, [[롯데]]는 이듬해인 1974년부터 [[미야기]] 현을 연고지로 할 것을 발표. 12월 실행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미야기]] 현으로 임시 [[연고이전]] 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와 동시에 특별 혜택으로[* 당시 [[야구협약]]엔 '''연고지의 야구장에서 50% 이상의 공식전을 치루지 않으면 안된다''' 란 규정이 있었다.] 수도권에서의 개최 경기수도 확보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듬해인 1974년 [[개막전]]을 포함, [[미야기 구장]]에서 총 27번의 [[공식전]]이 열렸다.&lt;br /&gt;
&lt;br /&gt;
여담으로 [[도쿄]]에서 나갈때 쳤던 [[개드립]]이 유명하다. '''&amp;quot;우리는 도쿄시민뿐만 아니라 일본국민 전체에게 사랑받는 구단이 될것이다.&amp;quot;''', '''&amp;quot;우리의 연고는 일본 그자체다.&amp;quot;''' 등등(.....) ~~[[교진군]] : [[김두한(야인시대)|개소리 집어쳐! 우릴 냅두고 무슨 전국구 구단이라는 거야!]]~~&lt;br /&gt;
&lt;br /&gt;
== 잔혹한 이동 ==&lt;br /&gt;
그러나 구단 사무실과 합숙소 등의 제반 시설은 계속 [[도쿄]]에 위치했었고, 선수들과 감독, 지도자들도 [[도쿄]] 근교에 거주하고 있었다. 수도권 경기 때는 가정이나 팀 합숙소에서 직접 구장으로 출/퇴근이 가능했지만, [[센다이]]의 [[미야기 구장]]에서 홈경기가 있을 때는 [[센다이]] 시내의 호텔에 숙박하면서 [[유니폼]] 차림으로 버스로 구장과 호텔을 왕복하는, 원정 경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참고로 '''2016년 현재''' [[한국프로농구]]와 [[V-리그]] 구단 대부분이 이와 비슷하다.] 센다이로 이사온 선수는 단 1명도 없었다. 당시 주전이었던 야마자키 히로유키[* 통산 2081안타 270홈런을 기록하며 [[베스트나인]] 5회, [[골든글러브|다이아몬드 글러브]] 3회 등을 수상한 명선수.]는 '''&amp;quot;[[센다이]]가 본거지라고 해도 대부분 원정 경기과 같은 호텔 거주였기 때문에 신경이 편안해지지 않았다&amp;quot;''' 고 회고했다.&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퍼시픽리그]] 6개 구단의 홈구장은 [[센다이]]([[롯데 오리온즈]])와 [[도쿄]]([[닛폰햄 파이터즈|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이외엔 [[칸사이]]([[난카이 호크스]], [[킨테츠 버팔로즈]], [[한큐 브레이브스]]), [[큐슈]]([[세이부 라이온즈|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등 일본 서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동 거리가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센다이는 고속 교통망의 정비가 막 시작되던 시기여서 [[도호쿠 신칸센]]도 미개통 상태였기 때문에 [[항공기]]로 이동하거나 [[도호쿠 본선]]의 [[특급 열차]] 등의 일반 노선을 이용해야만 했다. 특히 [[센다이]]에서 [[후쿠오카]] 원정 경기를 떠나야 할 때는, 당시 이 두 지역의 항공을 연결하는 직항편이 없어서 [[하네다 공항]]에 들렀다가 공항 로비에서 가족을 잠깐 보고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웃지못할 장면도 연출됐다. 이런 가혹한 이동 탓에, 1개월 가까이 수도권의 집이나 합숙소를 비우기도 했다. 그래서 [[한신 타이거스]]의 [[오사카 돔]] 설립 이전까지의 '''&amp;quot;죽음의 원정&amp;quot;'''보다 더 잔혹한 이동이었다고 평가받는다.&lt;br /&gt;
&lt;br /&gt;
이러한 고생을 자초한 롯데의 센다이 이전은 수도권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기까지의 잠정 조치에 불과했다.&lt;br /&gt;
&lt;br /&gt;
여담이지만, 이해 시즌오프 [[도쿄]]의 [[닛폰햄 파이터즈|닛타쿠홈 플라이어스]]와의 합병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이후 닛타쿠홈은 닛폰햄에 구단을 매각해 [[닛폰햄 파이터즈]]가 탄생하게 되었다.&lt;br /&gt;
== 4번째 [[퍼시픽리그]] 우승,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과 무시당한 [[센다이]] ==&lt;br /&gt;
1974년 [[롯데 오리온즈]]는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인 [[한큐 브레이브스]]와 [[일본 시리즈]] 진출을 걸고 대결,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1, 2차전을 연속 우승하며 2승을 거뒀다. 그 후 [[미야기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도 4-0으로 승리하며 4년만에(1970년 이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롯데의 관객수는 87만 2천명으로 작년에 비해 6만명 정도 감소했지만 그래도 그 해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가 개최되기 전 프로야구 실행위원회에서 '''&amp;quot;만약 롯데가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할 경우, 일본시리즈 개최구장은 [[고라쿠엔 구장]]을 사용한다&amp;quot;'''고 통지하였다. 당시 [[야구협약]]에서는 '''[[일본 시리즈]]를 개최하는 야구장은 3만명 이상의 관중수용 능력을 갖는 곳이어야 한다''' 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당시 [[미야기 구장]]의 수용 인원은 28,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센다이]] 팬들은 실망했지만 시설의 미비로 어쩔수 없었다고 이해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같은 해, 롯데는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 격돌하여 4승 2패를 거두며 1950년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 후 24년만에 구단 사상 2번째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했다. 적지인 [[나고야]]에서 귀경하여 롯데는 [[도쿄]]에서 우승 퍼레이드를 실시했다. [[센다이]]에서도 &amp;quot;당연히 퍼레이드 같은 행사가 있겠지&amp;quot; 라고 하며 기대는 높아졌으나, '''롯데 구단은 시즌 오프 때까지 [[센다이]]에서 어떠한 우승 축하 행사도 개최하지 않았다.''' 배신감을 느낀 센다이 시민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고, 센다이 지역에서의 응원 열기는 단번에 떨어지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1975년과 1976년, 롯데는 [[미야기 구장]]에서 73~74년보다 늘어난 33경기 정도의 홈경기를 개최했지만, 74년 구단의 무개념 행각에 실망한 센다이 팬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관객 동원 수는 60만 3300명(75), 64만 3300명(76)으로 폭락했다. 그런데 76년엔 당초 수도권에서 개최하기로 한 경기가 우천취소되어 시즌 막판에 재편성 된 경기가 집중적으로 [[미야기 구장]]에서 개최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 [[수도권(일본)|수도권]]으로의 복귀 ==&lt;br /&gt;
1977년 시즌 말 롯데가 홈구장을 [[카나가와]] 현으로 이전하는 구상이 표면화했다. 이것은 [[다이요 훼일즈]]가 다음해인 1978년 홈구장을 [[카와사키 구장]]에서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것[* 신축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삼고자 했다. 근데 문제는 롯데도 이걸 노렸다(...)]에 따라, 롯데도 다시 수도권으로 복귀 할 가능성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위에 서술한 것과 같이 5년에 걸쳐 [[센다이]] 등에서 열린 경기 때마다 장거리 이동을 거듭해온 롯데나 원정 구단 모두에게 선수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 부담 증가가 뚜렷했고, 이동 경비의 부담도 매우 컸다. [[센다이]]에서는 이전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자 '''&amp;quot;센다이에 남아달라&amp;quot;'''고 수도권 이전 중지를 요구하는 정재계나 시민단체 등에 의한 서명 활동이 있기도 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amp;quot;롯데가 도쿄에 돌아가는 것은 기본 노선&amp;quot;''' 이라는 견해가 다수였다.&lt;br /&gt;
&lt;br /&gt;
그 해 시즌,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을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내주고 뒤이어 후기리그 우승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후기리그 땐 실속을 거듭하면서 똑같이 후기리그 우승을 위해 쾌질주하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따라잡혀 결국 그 해 10월 4일 [[미야기 구장]]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패배하면서[* 이 날 9회 2사 때 경기장 [[스탠드]]로 이물질이 날아들면서 가네다 감독이 직접 구장 마이크로 '''&amp;quot;선수들도 저도 열심히 해왔습니다. (경기를) 플레이하게 해주십시오!&amp;quot;'''라고 관객들에게 말할 정도로 경기가 일시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력 후기리그 우승을 놓쳤지만, 그 다음 날 [[한큐 브레이브스]]가 [[긴테츠 버팔로즈]]에게 패배하면서 간신히 후기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 후 [[플레이오프]]에서 2승 1패로 선제했지만[* 이때도 롯데가 리그 우승을 달성할 시 [[고라쿠엔 구장]]에서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개최하도록 결정되었다. 근데 이 해 [[센트럴리그]] 우승팀이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여서, 만약 롯데가 우승했다면 1981년의 최초이자 마지막 [[덕아웃시리즈]]보다 4년 앞서서 최초의 [[덕아웃시리즈]]가 열릴 수도 있었다!] 그 후 2연패로 리그 우승을 놓쳤고,[* 사실 1차전에서 '''1-18'''로 대패하는 등 조짐이 보이긴 했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는 5전 전부 합쳐 '''9득점''' 밖에 못하는 물빠따를 선보이며 한큐에게 졌다(...) 참고로 5차전도 7-0으로 영봉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패배가 결정된 5차전이 [[미야기 구장]]에서 열리면서 이것이 집시 롯데 시대 최후의 [[미야기 구장]]에서의 경기가 되었다. 이 해 [[미야기 구장]]에서는 38경기가 개최되면서 집시 롯데 시대 최다수의 홈경기가 개최되었고, 롯데의 관객수는 75만 2000명으로 전년도보다 대량 증가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관중수와 설비 문제로 1번도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은 아쉬움을 겪었다. --3만 1천명 수용가능한 전용구장인 [[후지이데라 구장]]이 있는데도 주민들의 [[님비]] 때문에 조명탑을 설치하지 못해 올스타전도 개최 못하고 남의 홈구장에서 일본시리즈 홈경기 개최한 [[긴테쓰 버팔로즈]]만 하겠냐만--&lt;br /&gt;
&lt;br /&gt;
롯데와 다이요는 시즌을 마친 뒤, 사용 구장에 대한 절충을 실시한 결과, 타이요는 당초 계획대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전용 구장으로 하고. 롯데는 타이요가 기존에 쓰던 [[카와사키 구장]]을 사용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에 따라 롯데의 수도권 복귀가 확정되었고, 5년간에 걸친 [[집시 롯데]] 시대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 야마자키 히로유키는 '''&amp;quot;응원해준 센다이 팬들에게 미안했지만 선수의 대부분은 '아, 이제 겨우 도쿄에 돌아가는 구나'고 안심했다&amp;quot;'''고 회고했지만, [[미야기]] 현 출신의 사사키 노부유키[* 1971년 드래프트 '''10위'''란 엄청 낮은 순위로 데뷔한 선수로, 결국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하고 1979년 은퇴했다.]는 '''&amp;quot;롯데 입단 2년째에 센다이로 홈구장이 옮기면서 1군에 오르면 센다이로 돌아갈 수 있다&amp;quot;고 목표로 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굉장히 아쉬웠다&amp;quot;'''고 말했다.[* 그러나 사사키는 집시 롯데 시절인 1974년과 1976년, 1군 경기에서 단 1안타도 기록하지 못했다(..)]&lt;br /&gt;
이전 결정 후인 12월 24일, [[카와사키]] 시내에서는 롯데의 퍼레이드 및 격려회가 열렸다. 카와사키 시민들은 다이요의 [[요코하마]] 이전을 카와사키 팬들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하여, 새로운 팀인 롯데를 환영했다. 그러나 구장의 노후화 및 관중수 침체로[* [[롯데 오리온즈]] 최후의 해인 1991년을 제외하곤 단 한번도 100만 관중을 기록하지 못했다.]롯데는 또 다른 고난과 맞닥뜨렸다. 롯데는 카와사키 구장으로 이전 한 후에도 미야기 구장에서 연간 10경기 전후의 시합을 개최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 구장 시설의 노후화로 경기수는 점점 감소하였다. 이후 2005년부터 [[퍼시픽리그]]에 새로 합류한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미야기 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으며 롯데의 [[미야기 구장]]에서의 홈경기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라쿠텐이 롯데와 같은 [[퍼시픽리그]] 소속이어서 롯데의 미야기 경기 자체는 증가했다. 다만 전부 원정경기. ~~그리고 미야기 현의 올드 야구팬들은 집시 롯데 시절을 흑역사로 치부하려 해서 문제~~]&lt;br /&gt;
[[분류:일본프로야구]]&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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