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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관우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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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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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6일 (월) 04:01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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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파일:VN19912015-00_02030416.jpg]]&lt;br /&gt;
&lt;br /&gt;
千寬宇&lt;br /&gt;
1925∼1991.1.15&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한국의 [[언론인]]이자 [[사학자]]. [[서예|서예가]] 겸 [[수필|수필가]]이기도 하다. 호는 후석(後石).&lt;br /&gt;
&lt;br /&gt;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읍리에서 천영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서 [[천재]]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동아일보에서도 청풍보통학교 3학년 재학 당시 그를 취재하러 왔다고.[[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4021700209106007&amp;amp;editNo=2&amp;amp;printCount=1&amp;amp;publishDate=1934-02-17&amp;amp;officeId=00020&amp;amp;pageNo=6&amp;amp;printNo=4738&amp;amp;publishType=00010|동아일보 1934년 2월 17일자 기사 '글씨 잘 쓰는 천관우(9세), 5세부터 독서 가능해']]&lt;br /&gt;
&lt;br /&gt;
[[청주고등학교|청주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1949년에 '반계 [[유형원]](柳馨遠) 연구'라는 제목의 학부 졸업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최초로 [[실학]]의 개념과 발전과정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후대 실학 연구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도교수였던 [[이병도]]가 '군계일학'이라 평가하고, 역사학보에 2차례에 걸쳐 게재될 정도였으니 엄청난 학술적 가치를 지녔던 논문이었던 것. 다시 말하지만, '학부 졸업 논문'이다. 불과 20대 중반의 학부 졸업생이 한국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는 엄청난 학문적 성과를 이룩해낸 것이다.&lt;br /&gt;
&lt;br /&gt;
1951년대 대한통신사에 입사하면서 처음으로 언론인으로 출사했다. 1952년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연수하면서 쓴 '그랜드캐년'이라는 기행문이 1968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됐고, 2년 뒤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이 됐다가 다시 1965년 [[동아일보]] 주필이 되었는데, 1968년 신동아에서 낸 '차관' 관련 기사가 문제가 돼서 해임됐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창립하여 공동 대표로[* 나머지 두 명은 김재준과 이병린.] 추대되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 대표로 활동하였다. &lt;br /&gt;
&lt;br /&gt;
[[유신]] 시절에는 더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칩거하면서 역사 연구에 매달렸는데, &amp;lt;고조선사 삼한사연구&amp;gt;, &amp;lt;가야사연구&amp;gt;, &amp;lt;인물로 본 한국 고대사&amp;gt; 등을 저술하였다. 특히 &amp;lt;가야사연구&amp;gt;는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를, '''주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어 봄으로써''' 식민사학이 제공한 한국사의 구도를 깰 수 있는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가야 7국 및 마한 정벌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바꾸어 해석한다는 것인데, 원래는 이병도가 시사한 것을 천관우가 저서 &amp;lt;가야사 연구&amp;gt;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적으로 완성시킨 것. 다만 너무 나간 나머지 임나일본부를 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백제의 군사령부'''로 해석하는 바람에... [* 천관우는 임나일본부를 백제의 임나 주둔 군사령부로 보았지만 그럴 경우 임나일본부 주요 인사들이 왜인이라는 점이나 그 인사권을 왜가 쥐고 있었다는 점, 백제 군사령부라면서 임나와 짜고 끝끝내 본국 백제의 말을 듣지 않고 버티는 현상이 설명이 안 된다는 지적이 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 자체는 이후 [[김현구]]나 [[노중국]], [[이도학]], [[이희진(역사학자)|이희진]] 등의 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한다. 주로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으며, 같은 언론인 출신이자 절친이던 [[송건호]]가 근현대사 연구에 이름을 남긴 것과 대조된다.&lt;br /&gt;
&lt;br /&gt;
하지만 [[1981년]] 5월 14일 발족한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 회장을 시작으로 [[제5공화국]] 치하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국정 자문위원 등의 공직을 맡으면서 민주화 진영은 물론 언론인들로부터도 변절자로 몰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5공 정권을 도운 천관우를 &amp;quot;변절했다&amp;quot;고 혹독하게 비판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언론인 [[송건호]](한겨레신문 창립자)는 천관우의 권유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것도 꽤나 거물로, 유신시기까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5공시대에 변절한 대표적인 인물 '''[[윤보선|윤]]천[[지학순|지]][[강원용|강]]''' 중 '''천'''이 그의 차지였다. 천관우 본인은 훗날 5공에 협력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327943|정론직필을 찾아서 - 제천 출신 언론인 천관우(충북일보)]]&lt;br /&gt;
&lt;br /&gt;
1991년 1월 15일 사망. &lt;br /&gt;
&lt;br /&gt;
[[분류:언론인]]&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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