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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청송 전투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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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19T20:52:23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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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5일 (일) 13:02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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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5T13:02: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청송전투는 1950년 8월 첫째주 청송에서 [[대한민국 육군]] [[독립기갑연대]]와 그에 속한 [[강원도]] [[경찰]] 제5[[대대]]가 [[조선인민군 육군]] 1개[[사단(군사)|사단]]과 지연전을 벌인 전투다. 이 전투에서 독립기갑연대는 수많은 기갑 장비를 잃었으며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는 3대밖에 남지 않은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독립기갑연대 제2[[기병|기마]][[수색대|수색]][[대대]][[대대장|장]] 장철부 육군[[소령]]은 이 전투에서 대대지휘소가 습격당했을때 [[포로]]로 잡히는걸 치욕으로 여기고 자결하였다.&lt;br /&gt;
&lt;br /&gt;
== 부대 목록 ==&lt;br /&gt;
 * [[대한민국]] : 총 2,000명&lt;br /&gt;
  * 대한민국 육군&lt;br /&gt;
   * [[독립기갑연대]]&lt;br /&gt;
     * 제1장갑수색대대 (장, 박무열 소령)&lt;br /&gt;
      * 주무장 :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4대&lt;br /&gt;
    * 제2기마수색대대 (장, [[장철부]] 소령, 본 전투서 전사)&lt;br /&gt;
      * 주무장 : 군마 200필&lt;br /&gt;
    * 제3도보수색대대&lt;br /&gt;
      * 주무장 : [[군견]][[중대(군대)|중대]]&lt;br /&gt;
  * 대한민국 경찰&lt;br /&gt;
   * 강원도 경찰 제5대대(대대장 김인호 [[총경]])&lt;br /&gt;
&lt;br /&gt;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약 5,000명&lt;br /&gt;
  * 조선인민군 육군&lt;br /&gt;
    * 766부대&lt;br /&gt;
&lt;br /&gt;
== [[독립기갑연대]]의 [[청송군]] 이동 ==&lt;br /&gt;
7월 25일 [[육군본부]]의 명령에 의거하여 [[대한민국 육군]]은 전투 편성이 1개 [[군단]] 6개 [[사단(군사)|사단]] 2개 독립[[연대(군대)|연대]][*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수도]], [[제1보병사단|1]] ,[[제2보병사단|2사단]]과 육본 직할 [[제6보병사단|6]], [[제8보병사단|8사단]]과 독립기갑, 23연대, 호남 지방에서 활동하던 속칭 '민부대'로 불리던 [[제7보병사단|7사단]]]에서 2개 군단 6개 사단 1개 독립연대[* [[제1군단]] 예하 수도, 8사단과, [[제2군단]] 예하 1, 6사단 그리고 육본직할 3사단과 민부대 그리고 독립기갑연대. 2사단은 해체되어 예하부대는 1사단에 배속되었다.]]로 바뀌었다.&lt;br /&gt;
&lt;br /&gt;
이때 [[안동시|안동]]의 [[수도사단]]과 [[영덕군|영덕]]의 [[제3보병사단]] 사이에 80km에 달하는 빈 공간이 생겨 적의 침투로 인하여 아군이 포위될 가능성이 있었으니 이에 따라 육군본부는 투입할 수 있는 부대를 찾아 봤으나 가용부대는 모두 [[백두대간]]의 언덕들 속에서, 동해안의 개천가에서, 그리고 [[전라도|호남]]의 들판에서 적과 교전하고 있었으니 마침 독립기갑연대가 19일 대전에서 철수해서 [[대구광역시|대구]]에 집결했으니 본 연대는 작전 명령에 따라 교전지인 청송으로 전진했다.&lt;br /&gt;
&lt;br /&gt;
== 전투 개황  ==&lt;br /&gt;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은 7월 17일부터 동해안의 요충지인 영덕-강구 선에서 공방의 고전을 겪고 있었다. &lt;br /&gt;
  이에, [[육군본부]] 및 [[미 8군]]은 제 22연대(연대장 중령 강태민)와 해병 1개 대대를 급파하여 그들의 예봉을 둔화하는데 주효하였으나 영덕-안동 간에 걸친 55km의 산악 및 계곡접근로는 개방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lt;br /&gt;
  육군본부는 이 간극을 중시하고, 이 무렵에 영동으로부터 대구로 이동 중인 [[독립기갑연대]](연대장 대령 유흥수)를 작명 제 57호(50. 7. 22부)로 제 3사단인 배속하는 동시에 진보로 급파하여 이 간격을 메우는 한편, 이곳에서 공비격멸전을 수행중인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대대장 총경 김인호)를 동 연대에 배속케 하였다. &lt;br /&gt;
  이 때, 독립기갑연대의 병력은 550명이며 1개 대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주요장비는 장갑차 4대, 반 장갑차 1대, 그리고 200여의 마필이 있었는데 말은 전투에 방해가 되었던 까닭에 청송(진보 남쪽 5km)에 옮긴 뒤, 대구로 후 송하여 뒷날 기마 헌병대대가 사용토록 하였다. &lt;br /&gt;
  또한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는 병력 400여명으로써 소화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lt;br /&gt;
  수도사단의 병력은 7885명이며, 주요장비는 105mm 야포 4문을 비롯하여 81mm 박격포 16문, 60mm 박격포 27문이었다. &lt;br /&gt;
  기간 중의 기상은 폭우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때때로 개이기도 하였으며, 산악지대인 까닭에 조석으로 농무가 심하여 수색활동에 지장이 많았다. 지형은 경북 동북부의 준험한 산악지이므로 피아문에 기습작전의 효용을 높일 수가 있었다. &lt;br /&gt;
&lt;br /&gt;
== 작전계획 ==&lt;br /&gt;
&lt;br /&gt;
  [[독립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7월 25일에 본대에 앞서 진보에 이르자, 연대 지휘소를 진보 초등학교에 설치하였다. &lt;br /&gt;
  이때, 동 연대는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과는 물론, 육군본부나 좌 인접한 제 1군단(군단장 소장 김홍일)과도 유무선이 단절되어 있었다. &lt;br /&gt;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이곳에서 공비를 격멸중인 강원경찰 제 5대대장 김인호 총경으로부터 당면한 상황을 청취 하였다. &lt;br /&gt;
  그의 보고에 따르면 『26일 아침부터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영양군]]으로부터 남침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대대는 407고지(진보 동북쪽 2km)에서 이를 맞아 일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2km 남쪽의 339고지를 점령하여 방어하고 있으며, 한편 완전동(진보 동남쪽 12km)에서 34번 도로(진보-영덕간)를 경계하고 있던 제 3중대는 이날, 1개 대대규모의 적에게 공격당하여 진보로 철수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것이며, 또한 『대대의 후방인 이전동(주왕산 남쪽 4km) 부근에 청송을 두 번이나 습격한 제 766 부대의 일부병력과 공비 등 도합 1400명이 준동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lt;br /&gt;
  연대장은 당면한 정황이 [[육군본부]]의 작명을 받을 때 『적은 장비가 취약한 공비』라고 제보 받은 것과는 달리 완전 편성된 정규군임을 알게 되었다. &lt;br /&gt;
  이에 따라 [[연대(군대)|연대]]는 26일 23:00에 각각 저지 진지를 점령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전투 경과 ==&lt;br /&gt;
&lt;br /&gt;
  7월 28일 &lt;br /&gt;
  이날 339고지 전면의 적은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피난민의 제보로 화매동(완전동 북쪽 2km)에는 북괴군으로 보이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으며, 이전동(청송 동남쪽 12km)쪽에는 1000명 이상의 [[공비]]가 주왕산(이전동 북쪽 3km)에서 하산하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lt;br /&gt;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병력을 분산하는 한이 있어도 현선의 고수, 제 3사단과의 연계, 공비토벌 세 가지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제 2[[기병]]대대는 1개 소대로써 사단과의 연계를 이룩하고,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는 1개 중대로써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대의 증원 하에 이전동과의 공비를 소탕하라.』라고 명령하였다. &lt;br /&gt;
&lt;br /&gt;
  7월 29일 &lt;br /&gt;
  07:00에 2개 대대 규모의 적이 각종포화와 더불어 339고지와 31번 도로(영양-진보간)를 따라 일제히 침공하였다. &lt;br /&gt;
  연대장 유흥수 대령은 406고지(339고지 남쪽 2km)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경찰]] 제 1 및 제 2 양 중대는 200명에도 미달하는 모병으로 빗물이 홍건히 고인 개인호와 조잡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적에게 화력을 집주하였다. &lt;br /&gt;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적의 화력은 더욱 증강되고, 31번 도로로 침공하던 그 일부가 339고지의 서쪽으로 우회하여 대대의 후방로를 차단하려는 듯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세는 급작스럽게 불리하여졌다. &lt;br /&gt;
  그 까닭은 적을 요격할 예비대(제 3차 연계를 위하여 공치 하였던 제 3도보대대를 추출한 바가 있음)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화매천의 물이 급격히 불어나 잠시라도 지체할 경우에는 동 대대의 후방로가 절단되어 병력을 도섭시킬 기회마저 일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lt;br /&gt;
  마침내, 연대장은 동 [[대대]]의 철수를 명령하여, 이날 11:00에 273고지-월전 삼거리 간에 제3, 2, 1 중대 순으로 급편진지를 점령케 함으로써 연대의 우 제 1선으로 하였다. &lt;br /&gt;
&lt;br /&gt;
  7월 30일 &lt;br /&gt;
  적은 전날에 [[영덕]]을 재 점령하자, 이를 굳히려 함인지 이날 미명부터 포화를 집중하고 두 l이어 1개 연대 규모로써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lt;br /&gt;
  그런데, 연대 주 저항선의 앞을 동서로 흐르는 반변천(화매천의 본류)의 범람으로 도섭이 곤란하자 경찰 제 5대대의 정면으로 주 공격을 집중하였다. &lt;br /&gt;
  대대장 김인호 [[총경]]은 적세를 기만 유인키로 다짐하고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밀리는 척 하면서 대대의 정면을 축차 축소하는 한편, 좌 제 1선의 제 1및 제 2 양 중대를 물러나게 하자, 적은 호기를 잡았다는 듯이 떼를 지어 밀려들었다. &lt;br /&gt;
  이에, 대대장은 즉각 273고지에 주둔중인 제 3중대로 하여금 일제 사격을 퍼붓게 하는 한편 물러나던 양 중대로써 다시 이에 가세케 하니, 함정에 빠진 적의 대대의 화망 속에서 마침내 궤멸하고, 잔재 병력만이 406고지(273고지 동북 쪽 2.5km)로 둔주하고 말았다. &lt;br /&gt;
&lt;br /&gt;
  7월 31일 &lt;br /&gt;
  이날의 양 인접 상황을 개관하면, 동해안의 영덕을 적에게 다시 약점 당하고, 서쪽의 안동에는 북괴 제 12사단이 계속 파고들어, 동읍 북쪽 4km까지 이르고 있었다. &lt;br /&gt;
  이로 말미암아, 제 1군단(군단장 소장 [[김홍일]])지휘소는 단촌(의성 북쪽 8km)으로, 그리고 수도 사단(사단장 준장 김석원)의 지휘소는 무능리(단촌 북쪽 12km)로 각각 전진하여 [[낙동강]] 남안의 방어선이 마련되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8월 1일 &lt;br /&gt;
  이날 동쪽의 영덕에서는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이 해지를 재탈환키 위하여 [[북한군]] 제 5사단(사단장 소장 마상철)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서쪽의 안동은 마침내 약점 당하는 바 되어, 제 1군단의 수도 및 제 8 양 사단은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렀으나 독립기갑연대장(대령 류흥수)은 양쪽과의 통신이 단절되어 이 상황의 변동을 알 수가 없었다. &lt;br /&gt;
&lt;br /&gt;
  8월 2일 &lt;br /&gt;
  이날 동해안의 영덕은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준식)이 재 확보 하였으나 서쪽의 수도 사단(사단장 준장 김석원)은 안동을 내놓고도 전세가 불리하여 낙동강 남안으로부터 5km 물러나 413고지(청송 서북쪽 10km)-415고지선에 급편 방어를 하고 있었다. &lt;br /&gt;
  이로 인하여 연대(연대장 [[대령]] 류흥수)는 양익으로부터 불쑥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lt;br /&gt;
  연대장 류흥수 대령은 전날 밤에 적개조의 탐색대로서 당면한 적정이 시양동(월전 삼거리 동쪽 2km)에서 활발하다는 것임을 확인하고, 대책을 숙고하고 있었는데, 05:30에 우 제 1선의 강원 경찰 제 5대대장 김인호 총경으로부터 『2개 대대 규모의 적이 송이골에서 273고지의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라는 급보를 접하였다. &lt;br /&gt;
  07:00에 적의 포화가 어느 때 보다도 치열하게 집중되기 시작하여, 강원 경찰 제 5대대의 전사상자가 누증하자 부상자의 후송을 빙자한 이탈자가 눈에 띠게 불어났다. &lt;br /&gt;
  연대장 류흥수 대령은 적이 이 같은 충세로 계속 침공한다면, 이날 밤 안으로 후방로가 차단되어, 연대의 고립을 면치 못하리라 판단하고, 261고지에 돌출하여 있는 주력을 먼저 뽑아, 웃동골(진보 남쪽 2km)에서 남쪽으로 관통한 31번 도로(진보-청송간)에 2조지진지를 점령한 다음, 강원도 경찰 제 5대대를 이탈 시켜 [[연대(군대)|연대]]의 주력과 연계하여 비봉산 서쪽을 점령하기로 결심하였다. &lt;br /&gt;
&lt;br /&gt;
  8월 3일 &lt;br /&gt;
  이날 아침, 청송에 위치한 독립 기갑연대 지휘소로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이 G-3 박경원 소령을 대동하고 내방하였다. &lt;br /&gt;
  연대장 류흥수 대령은 당면한 피아의 상황을 보고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lt;br /&gt;
『① 본 연대는 [[제3사단]]과의 연계에 실패하였고, ② 당면한 적은 1개 연대 규모의 정규군과 1000여명의 공비이며, ③ 탄약만 해결 된다면 능히 현선을 막아낼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lt;br /&gt;
  한편, 각 대대장은 탐색대를 계속 착출하여 적정을 살폈는데, 제 2기병대대(대대장 소령 장철부) 정면에는 소수 병력이 빈번하게 출현할 뿐만 아니라, 해질 무렵에는 새밭골(진보 남쪽 1.5km)에 병력을 집결 시키고 있음이 목격되었다. &lt;br /&gt;
&lt;br /&gt;
  8월 4일 &lt;br /&gt;
  01:00에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야반을 이용하여 야간침투를 기도하였고, 그중 일부가 비봉산 남쪽 8부 능선을 타고 제 3대대와 [[강원도]] 경찰 제 5대대 사이를 끊고 동연대의 제 1장갑 및 제 2 기병 양 대대의 지휘소기 있는 목계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경찰로 위장해 보초병을 살해한 다음 제2기병대대지휘소인 어느 큰 [[초갓집]]을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했다. 대대장 장철부 소령은 적과 맞서 싸웠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포로됨을 치욕으로 여기고 자결하였다.박익균 중위가 대대장의 시신을 안치하고 대대장 대리가 되었다. 장갑대대본부는 무사히 후퇴 하였다. &lt;br /&gt;
  한편 제 1장갑 및 제 2기병 양 대대는 04:00부 터 침공하기 시작한 2개 대대규모의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격전을 벌였으나, 양 대대의 지휘소가 마비된 데다 목계를 기습한 일군의 적이 청송으로 내려오다가 목계로 되돌아가 양 대대의 배후를 찌름으로써 앞뒤로부터 적을 맞이하게 된 양 대대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lt;br /&gt;
  제 2 기병대대를 지휘하던 대대장 대리 박익균 [[중위]]는 좌 1선의 제 1장갑대대와 합세하여, 연대의 주력으로 양면의 적을 격파하기로 결심하고 전진하였는데, 속칭 구리곡재를 돌파할 때, 그들의 복병에 협격 당함으로써 375고지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대대 대전원이 극도로 피로에 지쳐 있었다. &lt;br /&gt;
  이리하여 375고지에 양 대대가 합세하자 선임인 제 2기병 대대장 대리였던 박익균 중위는 연대 지휘소와의 합세를 위하여 양 대대를 이끌고 반변천에 도섭하여, 속칭 놋갈(목계 서쪽 3.5km) 부근에 서주 방어 태세를 갖추고, 청송에 위치한 연대 지휘소로 연락[[장교]]를 파견하였다. &lt;br /&gt;
&lt;br /&gt;
  8월 5일 &lt;br /&gt;
  이날 사단은 새벽에 제 18연대(연대장 중령 임충식)의 지휘소가 습격되어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당한 채 주력(제 18 및 독립기갑 양 연대)의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의성군]]으로 집결하기에 이르렀다.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송 전투 결과  ==&lt;br /&gt;
&lt;br /&gt;
아군은 10일이나 시간끌기에 성공했다.&lt;br /&gt;
[[분류:전쟁]]&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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