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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통일혁명당 사건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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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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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7일 (화) 11:42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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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 항목: [[대한민국/정치]], [[대한민국/역사]], [[북한의 대남 도발사]], [[사건 사고 관련 정보]]&lt;br /&gt;
&lt;br /&gt;
[include(틀:사건사고)]&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lt;br /&gt;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 조직 사건이다.&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 시대적 배경 ==&lt;br /&gt;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의 파도가 지나간 뒤, 1962년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일어나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격히 변동하기 시작했다. 세계 전쟁이나 미국의 공격에 대한 위기감이 쌓인 북한 정부는 우선 자체의 힘을 기르는 데 쏟기로 결정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방이었다. 1962년 12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회의 전원회의에서 &amp;quot;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amp;quot;를 주 내용으로 한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lt;br /&gt;
&lt;br /&gt;
다른 한편으로 북한은 남한에서의 혁명을 기대했지만, 그건 북한이 일방적으로 지원해서 되는 게 아니며 남측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국제적인 반미 혁명세력과 단결하여 범세계적인 반제/반미 전선을 결성하고자 했다. 1964년에 열린 전원회의에서도 이와 같은 방안을 '3대 혁명역량 강화방침'으로 정리했다. 이 방침은 북한의 혁명기지 강화, 남한의 혁명역량 강화, 국제 혁명역량과의 강화를 내세웠으며 이는 북쪽의 '민주기지'를 강화한 뒤 주로 무력에 의지해서 남북통일을 달성하고자 한 한국전쟁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남쪽은 그 자체의 힘에 따라 '남조선혁명'을 이룩해야 함이 강조된 것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 경과 및 주요 활동 ==&lt;br /&gt;
북한 정부는 남한에서 4.19 혁명이 실패한 주 이유가 바로 혁명을 이끌 당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북한이 만든 '남조선혁명론'이 남쪽에 퍼지면서 지하 혁명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964년 3월 15일에 남한에서 비밀리에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주요 참가자들은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이었다. 이들은 지하신문 &amp;lt;혁명전선&amp;gt;과 합법 대중잡지 &amp;lt;청맥&amp;gt; 등을 발간했으며, 대학가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 최후 ==&lt;br /&gt;
그러나 1968년 8월에 통혁당은 중앙정보부가 이 조직의 주요 인사들과 접선하기 위해 내려온 북한 공작선을 나포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이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amp;quot;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괴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한 뒤 합법화하여 반정부 및 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amp;quot;라고 발표했다. 이때 중정은 김종태 등 3명을 포함해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여 73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2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그들 중 절대 다수는 김종태 등의 실체와 북한 연루 사실을 몰랐고, 심지어 ‘통혁당’이라는 조직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김종태 등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사형을 당했고,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전향서를 쓴 뒤 1988년에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71년에 체포된 [[류낙진]] 역시 무기형이었으나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lt;br /&gt;
&lt;br /&gt;
1969년에 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던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북한측은 그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뒤 대규모 추모집회를 열었다. 이후 평양전기기관차공장은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은 '김종태사범대학'으로 바꾸었다. 조직이 와해된 뒤에도 통혁당을 재건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줄줄이 발각되었고, 1979년에 통혁당 강원도 재건위가 발각된 것을 끝으로 완전 소탕되었다. &lt;br /&gt;
&lt;br /&gt;
한편 북한측의 주장에 따르면 1969년 8월에 당 중앙위원회가 지하에서 조직되었고, 1970년 2월에는 당 선언과 강령이 발표되었다. 그해 6월에는 &amp;lt;통일혁명당의 소리&amp;gt;라는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후 통혁당은 1985년에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바꾸었고, 방송 명칭도 '구국의 소리'로 바꾸었다가 2003년에 방송을 중단했고, 2005년에는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바꾸어 잔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남쪽이 아닌 북쪽에서 활동하는 '''유령단체'''일 가능성이 높다.&lt;br /&gt;
&lt;br /&gt;
== 출처 ==&lt;br /&gt;
 * &amp;lt;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공저. 역사문제연구소 기획)&amp;gt;. 웅진지식하우스. 2013. p243 ~ 244.&lt;br /&gt;
 &lt;br /&gt;
[[분류:정치 사건사고]] [[분류:1960년대]] [[분류:제3공화국]]&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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