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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해평 윤씨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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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11T03:36:36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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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6일 (월) 06:07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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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6T06:07: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1 海平尹氏}}}&lt;br /&gt;
 * 분류 : [[한국의 성씨]], [[윤(성씨)]]&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본관인 해평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고려)|고종]]~[[원종(고려)|원종]] 시기의 [[무신]]이었던 윤군정(尹君正)이며, 그 손자인 윤석(尹碩)이 [[충숙왕]] 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져 본관이 해평이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인구는 [[2000년]] 기준 불과 26,341명으로, 전체 본관별 인구수에서 202위, [[윤(성씨)|윤씨]] 중에서는 [[파평 윤씨]], 칠원 윤씨, 해남 윤씨에 이은 4위이며, 70만 명이 넘는 파평 윤씨에 비하면 희성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한미한 가문은 아니었고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정승]], [[판서]], [[부마]] 등을 배출하긴 했으나, 기본 인구가 워낙 적은 편이라 그나마 알려진 조선시대의 유명인은 [[윤두수]](…)와 그 고손녀이자 [[김만중]]의 어머니인 윤씨 정도.&lt;br /&gt;
&lt;br /&gt;
윤군정의 증손 대에서 소수의 문영공파(文英公派)와 다수의 충간공파(忠簡公派)로 나뉘었고, 충간공파는 다시 윤두수 대에서 윤두수의 후손인 오음공파(梧陰公派)와 동생 윤근수의 후손인 월정공파(月汀公派)로 나뉘었다. 아래의 네임드는 대부분 오음공파 출신.&lt;br /&gt;
&lt;br /&gt;
경상도를 본관으로 한 성씨지만, 의외로 경상도에서는 보기 드물고, 충청도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충청북도에 더 많이 산다.&lt;br /&gt;
&lt;br /&gt;
파평윤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카더라]]가 있으나 해평윤씨는 잉어도 먹는다.&lt;br /&gt;
== 가문 번성 ==&lt;br /&gt;
이처럼 비교적 인구도 적고 평범한 양반 가문이었으나,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갑자기 유력 가문이 되었다. 여기엔 크게 두 갈래가 있다.&lt;br /&gt;
&lt;br /&gt;
우선 [[윤두수]]의 장남 윤방의 후손이자 윤두수의 13대손녀가 [[순종(대한제국)|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되면서 외척이 되었다. 동시에 그 아버지인 윤택영과 백부인 윤덕영 형제는 각각 일본으로부터 [[후작]],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 다시말해 [[친일파]]로 변모(…). 다만 윤택영의 장남인 윤홍섭은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독립운동가]]로 남았으며, 해방 이후에는 아래에 언급된 먼 친척들인 [[윤치영]], [[윤보선]] 등과 함께 [[한민당]]을 창당했고(문제는 [[한민당]]도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숙명여자대학교|숙명학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lt;br /&gt;
&lt;br /&gt;
한편 이들과는 촌수거리가 좀 먼, 윤두수의 차남 윤흔의 후손이자 윤두수의 7대손인 윤취동(1798.7.18 ~ 1863.12.21)이란 인물이 있었다. 말이 양반 가문이지 그의 아버지 윤득실 대에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 직접 나뭇짐을 지고 농삿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품이 후하고 성실했던 윤취동은 고향인 [[천안시|천안]]에서 [[아산시|아산]]으로 온 뒤 열심히 농토를 개간해 결국 아산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가세를 다시 일으켰다.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본인은 중추부지사가 되었을 뿐더러, 모은 재산으로 교육시킨 두 아들 윤웅렬과 윤영렬은 각각 [[대한제국]] 군부대신(지금의 [[국방장관]])과 자헌대부로 출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윤웅렬과 윤영렬은 자식을 매우 많이 두었고, 윤취동이 모은 재산과 남다른 교육열로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 또한 대부분 유력인사가 되었다. 이들 중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가 있는 인물들만 해도 [[윤치호]], [[윤치성]], [[윤치영]], [[윤보선]]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윤취동의 주요 자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https://ko.wikipedia.org/wiki/윤취동#.EA.B0.80.EA.B3.84|참고 - 윤취동의 가계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로 표시한다.&lt;br /&gt;
 * 장남 웅렬★(1840.5.18 ~ 1911.9.22) : [[대한제국]] 군부대신.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파]]가 되고 1년 만에 죽었다(…). 여러 여자와의 사이에 총 5남 2녀를 두었는데, 윤치호는 두 번째 부인 전주 이씨 소생이고 윤치왕·윤치창은 측실 김정순 소생이라 터울이 꽤 크다.&lt;br /&gt;
  * 장남 [[윤치호|치호]]★(1865.1.23 ~ 1945.12.9) :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정치가]], [[예술가]],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3남 윤광선이 [[남궁억]]의 딸과 결혼하여 그와 사돈 관계가 된다. 증손녀 윤순명은 [[방응모]]의 증손자[* 단 양자인 조카의 손자이므로 친증손자는 아니다.]인 [[방상훈]] 현 [[조선일보]] 대표와 결혼했다.&lt;br /&gt;
  * 3남[* 불확실하지만 윤치왕의 장교자력표에 생모(김정순)의 차남이라 되어있어 [[요절]]한 형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치왕(1895.2.17 ~ 1982.12.21) : [[영국]] [[글래스고]]에서 유학하여 [[의사]]가 된 뒤 [[군의관]]으로 [[소장(계급)|소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재향군인회]]를 창설했다. 의사이자 의학자로서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세브란스 병원]] 2대 원장을 맡기도 했다. 자손들은 대부분 [[학자]], [[기업가]], [[정치가]]가 되었다.&lt;br /&gt;
  * 4남 치창(1899.3.5 ~ 1973.10.1) : [[시카고 대학교]]에서 유학한 뒤 [[기업가]],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 이사를 맡기도 했다. [[손원일]] 제독의 [[매부|매형]]이다. [[탤런트]] [[남궁원]], 전 외무부 장관 [[김동조]]와도 사돈관계가 된다.&lt;br /&gt;
 * 차남 영렬(1854.4.15 ~ 1939.11.4) : [[대한제국]] 자헌대부. 형과는 달리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가난해졌지만 차남 윤치소의 재산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조카 윤치호는 [[윤치호 일기|그의 일기]]에서 &amp;quot;치소가 아니었다면 삼촌은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amp;quot;(…)이라는 [[패드립]]을 날렸으며, 학식이 없다고 까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리분별력과 수완은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한 명의 본처(한진숙)와 두 첩과의 사이에서 총 9남 5녀를 두었으며, 아래의 아들들은 모두 본처 소생이다.&lt;br /&gt;
  * 장남 치오★(1869.9.10 ~ 1950.12.22) : 계몽운동가, [[친일파]]. 자손이 굉장히 많은데, 장남인 윤일선은 [[의사]]로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으며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의사]]나 [[예술가]]가 되었다.&lt;br /&gt;
  * 차남 치소★(1871.8.25 ~ 1944.2.20) : [[정치가]], [[기업가]]. [[이병도]]의 겹사돈이다. 일찍부터 이재(理財)에 밝아 윤영렬이 집안 재산 관리를 그에게 맡겼으며,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100칸이 넘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도 그가 지은 것이다. 이 사람도 자손이 많다. 장남이 [[대한민국]]의 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며, 삼남 윤원선은 [[흥선 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5남 윤택선은 자식이 없었던 윤치병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윤창구는 [[KIST]] 교수를 지냈다.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정치가]], [[학자]], [[목사]] 등이 되었다.&lt;br /&gt;
  * 3남 [[윤치성|치성]]★(1875.4.7 ~ 1936.8.11) : 해당 문서 참고. 이 사람도 자손이 많으며 대부분 [[언론인]], [[기업가]], [[학자]] 등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차남 윤달선은 (대부분 [[개신교]]였던 이 집안에서) [[조계종]] [[승려]]가 되었다. [[윤치성]] 문서 참고.&lt;br /&gt;
  * 4남 치병(1880.7.10 ~ 1940.1.24) : 관료였으나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며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lt;br /&gt;
  * 5남 치명(1885.10.27 ~ 1944.4.21) : 윤치병과 함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아산시]]에서 교육자로 살았다. 아들 윤유선은 [[세브란스 병원]] 원장, 국립보건원 원장 등을 지냈다.&lt;br /&gt;
  * 6남 [[윤치영|치영]]★(1898.2.10 ~ 1996.2.9) :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주로 [[교수]]가 되었으며, [[KBS]]의 [[윤인구(방송인)|윤인구]] [[아나운서]]가 손자다.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의 사돈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ㅎㄷㄷ]]하다... 불과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윤취동의 자손들 중 [[정치가]], [[외교관]], [[법관]], [[의사]], [[학자]], [[기업가]], [[예술가]], [[언론인]] 등으로 출세한 사람만 백 명이 넘는다고 하며. 게다가 인척, 사돈 관계를 맺은 사람까지 따지면 대한민국의 웬만한 유명인사와 다 연결될 정도.&lt;br /&gt;
&lt;br /&gt;
여기에는 살짝 야사 삘나는 뒷이야기가 있다. 윤취동의 아버지 윤득실은 없는 살림에도 [[거지]]들을 구제하고 어려운 이를 보살폈는데, 시주받으러 다니다가 굶고 쓰러진 [[승려]]를 데려다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승려는 이에 보답하고자 [[이순신]] 장군의 묘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잘될 거라고 일러주었고, 후에 윤취동은 아버지 득실을 그곳에 몰래 암장했다.[* 후에 윤득실 묘는 근처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심지어 그 승려는 만약 들키면 [[오리발|몰랐다고 잡아떼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가세가 다시 서고 자손이 번성하고 출세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서 보면, 그 승려는 그 집안을 명예로서는 아주 추악하게 추락시키려고 그 짓을 했는가란 생각이 들 지경이다. [[원균]]의 정치적 뒷배경 신료 라인에는 누가 있는가란 첫 인물을 상기한다면 말이다.&lt;br /&gt;
&lt;br /&gt;
[[파일:yoon_tree.jpg]]&lt;br /&gt;
&lt;br /&gt;
다소 씁쓸하게도, 저 격랑의 시대에 저런 유력 가문이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 가계도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물론 끝끝내 친일을 거부한 윤보선이나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아버지(윤택영)는 친일파, 아들(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인 등, 가까운 친척 간에도 한쪽에서는 [[조선귀족]] 작위를 받아 떵떵거리고 한쪽에서는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고 조용히 살기도 했다. 절묘하게도 [[윤치호]] 삼형제는 각각 일본 / 영국 /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각각 친일, 친영, 친미파가 되었다. 가공할 분산투자인 셈이다.&lt;br /&gt;
&lt;br /&gt;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다른 [[네임드]](?) 친일파 가문인 [[여흥 민씨]], [[전주 이씨]]([[왕공족]] 등 일부) 등은 [[조선귀족]] 작위와 일제 은사금으로 아무 생각없이 놀고 먹다가 [[8.15 광복|일제의 패망]]과 함께 사이좋게 [[망했어요|망한]] 사람이 많은 반면에, 윤취동의 후손들은 기본적인 경제관념과 교육열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가 [[기업가]], [[학자]], [[의사]] 등으로 출세하여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위세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더 까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안습]].&lt;br /&gt;
&lt;br /&gt;
이는 애초에 가세의 근원이 은사금 등이 아니라 대부분 윤취동 개인이 축적한 부(富)와 교육열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윤치왕의 경우 [[1910년대]]에 사비로 [[영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뿐더러 유학 시절 1년에 5천원 정도를 썼는데, 이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2억 5천만 원'''이 넘는 액수다. (참고로 당시 [[조선총독부]] [[국장]]급의 월급이 80원 정도였다.) 이렇게 집안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윤치명·윤치병 같은 인물들도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물론 윤취동의 후손들과 별개로, [[순정효황후 윤씨]]를 업고 받은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금으로 떵떵거렸던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그냥 몰락했다. 심지어 윤택영은 낭비벽이 너무 심해 그 많은 은사금을 다 날리고 [[파산]] 선고를 받고 [[후작]] 작위까지 잃어버렸고, [[빚쟁이]]에게 쫓겨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객사]]했다. 그나마 아들 윤홍섭은 [[독립운동]]에 투신해 집안의 체면을 살렸으니 [[견부호자]]라 볼 수 있을듯.&lt;br /&gt;
&lt;br /&gt;
== 나무위키에 문서가 존재하는 실존 인물 ==&lt;br /&gt;
 * [[윤극영]] : [[순정효황후 윤씨]]의 아버지인 윤택영과 같은 항렬이다.&lt;br /&gt;
 * [[윤두수]]&lt;br /&gt;
 * [[윤보선]]&lt;br /&gt;
 * [[윤인구(방송인)|윤인구]]&lt;br /&gt;
 * [[윤치성]]&lt;br /&gt;
 * [[윤치영]]&lt;br /&gt;
 * [[윤치호]]&lt;br /&gt;
 * [[순정효황후 윤씨]]&lt;br /&gt;
&lt;br /&gt;
[[분류:성씨/한국]]&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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