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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현준호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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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03T17:41:12Z</updated>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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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2월 7일 (화) 11:00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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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2-07T11:00: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http://blogimg.ohmynews.com/attach/6909/1089496720.jpg&lt;br /&gt;
&lt;br /&gt;
玄俊鎬&lt;br /&gt;
&lt;br /&gt;
1889년 8월 29일 ~ 1950년 9월 28일&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일제강점기]]의 기업가이자 교육가. 호남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였으며, 금융인이자 간척사업가로서도 명성을 남겼다. 물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행적도 없지 않았다. 호는 무송(撫松).&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초년 시절 ===&lt;br /&gt;
1889년 8월 29일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만석꾼 현기봉[* 중추원의 참의를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한 지역 유지로, 그의 집안 연주 현씨는 호남 지방에서 유명한 거부 가문이었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lt;br /&gt;
&lt;br /&gt;
담양의 창평영학숙(昌平英學塾)에서 [[송진우]], [[김성수(1891)|김성수]], [[김병로]]와 함께 수학하였고, 그 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메이지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메이지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으로는 [[허헌]], [[김병로]], [[이인]], [[조만식]], [[조소앙]], 송진우 등을 들 수 있다.&lt;br /&gt;
&lt;br /&gt;
=== 기업가, 교육사업가로서의 활동 ===&lt;br /&gt;
1917년 귀국하여 1919년 7월 주식회사 호남은행의 발기인이 되어 은행 창립에 힘썼다. 1920년 8월 호남은행을 설립하고 전무취체역에 취임했다. &lt;br /&gt;
&lt;br /&gt;
이 무렵 김성수에 의해 주식회사 [[동아일보]]가 설립되자 이 신문사의 감사에 취임했다. 1924년 4월 전라남도 평의원에 올랐으며 1925년 호남은행의 대표가 되었다. 1926년 5월 전라남도 도시제사(道是製絲) 주식회사 이사, 같은 달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감사에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1921년 1월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 감사가 되었다. 1925년에는 전라남도 간부였던 고원훈과 토의하여 1926년에 전남육영회(全南育英會)를 조직하였다. 1926년 유지들과 협력하여 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자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고 1927년 5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전남여고)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현재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세울 때는 거액을 내놓는 등, 많은 교육 사업을 실행하였다.&lt;br /&gt;
&lt;br /&gt;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면서 민족주의 운동과는 결별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39년에는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한 민족경제 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전남 영암 서해안 [[간척]]사업을 기획하였다. 결국 일제에게서 공사권을 따내고 동양척식회사와 신탁은행에게서 자금을 조달받아 1943년 4월부터 영암 서호간척지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44년 5월 서호면 성재리에서 양장리에 이르는 약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제방공사를 완성시켰다.&lt;br /&gt;
&lt;br /&gt;
이때 일궈낸 간척지의 규모는 약 270만 평에 달했다.[* 오늘날 읍이나 면이 대개 80만평 ~ 250만평 정도 되는 크기이다. 즉 큰 읍면 한 곳 넓이의 물을 메워 전부 논밭으로 바꾼 것.] 간척사업으로 세운 학파농장에서 약 5천 명이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만큼 많은 고용을 창출하였다. 당시는 일제말로서 거의 모든 조선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무려 5천 명의 밥줄을 해결해준 것.&lt;br /&gt;
&lt;br /&gt;
그 외에도 송정리~담양 간의 조철선(朝鐵線), 광주~여수 간의 남철선(南鐵線) 철도를 유치하였다. 또한 다년간 광주번영회장에 재직하였다.&lt;br /&gt;
&lt;br /&gt;
=== 친일행적과 최후 ===&lt;br /&gt;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다. 이때 전남 지역을 돌면서 전쟁 지원을 역설하였다. &lt;br /&gt;
&lt;br /&gt;
1938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시국대책조사위원회에도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참여했다. 1941년에는 [[윤치호]]의 흥아보국단에 준비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참가했고, 중추원 고문과 참의들이 결성한 시국강연반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가담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lt;br /&gt;
&lt;br /&gt;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불구속으로 수사를 받았고,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그 후 한국 전쟁 때 광주에 들이닥친 북한군에게 붙잡혀[* 얼마든지 피난을 갈 수 있었으나 전처 김희정의 제사를 치러주고 노모 곽순경까지 챙기려다가 피난 갈 타이밍을 놓쳤다고 한다.] 1950년 9월 28일 장남 현영익과 함께 처형되었다.&lt;br /&gt;
&lt;br /&gt;
== 평가 ==&lt;br /&gt;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lt;br /&gt;
&lt;br /&gt;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준호가 조선인을 위해 결코 나쁜 일을 한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현준호의 호남은행이 일본인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융자를 해주지 않아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 당한 적도 있다는 것. 그 외에 인촌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민족자본가로서 독립운동을 몰래 후원했다고도 한다.&lt;br /&gt;
&lt;br /&gt;
일제강점 말기에 서호간척사업으로 수많은 농민들의 생계를 해결해준 것도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소작꾼들과 노무자들의 노임지급 요구에도 성실히 응해 품삯을 두둑히 챙겨주었다고도 한다. 빈민구제활동을 활발히 했다는 증거도 많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그래서인지 일제의 군국주의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서 인심을 잃지 않았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도 좌익 계열에서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 가족 관계 ==&lt;br /&gt;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의 할아버지로도 유명하다. 아래는 가족관계의 자세한 목록.&lt;br /&gt;
&lt;br /&gt;
아버지: 현기봉(玄基奉)&lt;br /&gt;
어머니: 곽순경(郭順卿)&lt;br /&gt;
아내: 신종림(申淙林)[* 전처 김희정이 1932년 7월 26일에 죽은 후, 후처로 들어왔다. 현준호의 자식들 가운데 대부분은 전처 김희정의 소생이다.]&lt;br /&gt;
장남: 현영익(玄永翊)[* 국회 의사과장 역임. 한국전쟁 때 광주에서 피난을 빨리 못 가는 바람에 아버지 현준호와 함께 북한군에 붙잡혔다. 결국 1950년 9월 28일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현영익의 큰 아들이 현양래 현우실업 대표이다.]&lt;br /&gt;
차남: 현영직(玄永稙)[* 한국전쟁 때 국군 중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전방부대에 차출됐다.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억류돼있다가 스스로 돌에 부딪혀 자살했다.]&lt;br /&gt;
삼남: 현영원(玄永源)[* 1927년 生. 1950년에 현준호와 그의 장남, 차남이 죽은 후 현준호 가문의 실질적 장자가 되었으며,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전남방직 창업주 [[김용주]]의 딸 김문희(현재 용문학원 이사장)과 결혼하여, [[현정은]]을 낳았다. 현정은은 1976년 [[정몽헌]]과 결혼하였는데, 2003년 정몽헌의 자살 이후 현대그룹 회장이 되었다. 현영원의 아내 김문희에게는 [[김무성|스물 세 살 아래의 유명한 남동생]]이 있다.]&lt;br /&gt;
사남: 현영국(玄永國)[* 고우건업 대표]&lt;br /&gt;
오남: 현영서(玄永瑞)&lt;br /&gt;
육남: 현영만(玄永晩)&lt;br /&gt;
장녀: 현영송(玄永淞)&lt;br /&gt;
차녀: 현영애(玄永愛)&lt;br /&gt;
삼녀: 현영민(玄永敏)&lt;br /&gt;
사녀: 현영오(玄永吾)[*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교수(1946~1984)인 소은 박홍규(1919~1994)와 혼인했다.]&lt;br /&gt;
&lt;br /&gt;
[[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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