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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월 혁명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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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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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4-05T13:45: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Imported from text file&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상위 항목 : [[사회 운동 관련 정보]]&lt;br /&gt;
[목차]&lt;br /&gt;
== 독일 3월 혁명 ==&lt;br /&gt;
http://orig14.deviantart.net/e6a2/f/2010/355/7/1/german_revolution_1848_by_arminius1871-d35cd2s.jpg&lt;br /&gt;
3월 19일 [[베를린]][* 연기에 가려서 잘 안보이지만 그림 중앙 부분을 자세히 보면 왕궁이 보인다.]을 점령하고 환호하는 민중들.&lt;br /&gt;
&lt;br /&gt;
=== 개요 ===&lt;br /&gt;
'''Märzrevolution''' &lt;br /&gt;
&lt;br /&gt;
전 유럽에 걸쳐 일어난 [[1848년 혁명]] 가운데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lt;br /&gt;
&lt;br /&gt;
=== 배경 ===&lt;br /&gt;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수립된 [[빈 체제]]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위치한 [[독일 연방|독일어권 지역]]은 가장 격렬히 [[앙시앵 레짐|구체제]]와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부르주아지간의 충돌이 빚어졌다. 일찌감치 [[명예혁명]]과 [[산업혁명]]이 19세기 이전부터 진행된 영국의 경우, 이미 부르주아의 사회적 지위를 구체제 특권층들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대혁명]]의 출발점이었던 [[부르봉 왕정복고|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역시 겉으로야 [[왕권신수설]]을 표방했지만 아랫것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여 독일 지역은 반동 세력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한 곳이었다.[* 물론 구체제가 가장 철옹성같은 곳은 [[제정 러시아]]였지만 이 쪽은 애초에 아직도 [[농노제]]가 유지되던 곳이라서 부르주아라고 부를 만한 세력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몇몇 사학자들은 19세기 이후 [[스탈린|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 실시 이전까지의 러시아를 '유럽의 특급 후진국'이라고 비하할 정도(...) ~~그래도 [[오스만 투르크|병자]]보다는 후진국이 낫다는 건가~~]  &lt;br /&gt;
&lt;br /&gt;
하지만 이미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한 번 퍼져나가고 시작하자 그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1830년대]] 무렵부터는 독일 연방 내 각 국가들만 자유주의자들은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발발한 [[프랑스 2월 혁명|2월 혁명]]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lt;br /&gt;
&lt;br /&gt;
=== 대중 봉기 발발 ===&lt;br /&gt;
프랑스에서 [[프랑스 제2공화국|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군중들의 몰려들어서 자유주의 체제의 수립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패닉]]에 빠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라면서 황급히 [[표현의 자유]]와 [[의회]] 수립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적 헌법을 실시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뒤집고 군대를 동원하여 소요를 진압하고자 한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야전 경험을 풍부해도 소요를 진압한 경험은 적었던 프로이센군은 군중들을 진압하는데 실패했고, 도리어 피를 본 군중들의 분노만 더 키우는 역효과를 불러온다. 3월 18일이 되면 베를린 곳곳에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역으로 진압군을 격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궁지에 몰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사실 인근의 [[포츠담]]으로 도망쳐서 전열을 정비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본인의 성격이 원체 ~~결정장애~~ 우유부단한데다가, 또 꼴에 '내가 이 나라의 국왕인데 어떻게 수도에서 도망치냐'라고 탈출을 거부하기도 했다.]는 결국 다시 시민들에게 굴복하여 시민들의 무장을 허용하는 한편(!), 자유주의적 개혁을 다시 실시할 것을 약속하였다. 심지어 3월 21일에는 시민군 사망자들의 장례식에 국왕 본인이 혁명을 상징하는 모자 프리기아를 착용하고 참석하기도 했다.[* 물론 반강제로 끌려간 것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국왕은 귀족들에게 미친듯이 까였다.]&lt;br /&gt;
&lt;br /&gt;
한편 오스트리아의 [[빈(오스트리아)|빈]]에서도 3월 13일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요구하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빈 체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와 황제 [[페르디난트 1세#s-2|페르디난트 1세]]는 진압을 명령했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고 결국 메테르니히는 황제에 의해 재상 자리에서 해임[* 다만 황제가 능동적으로 해임한 것은 아니고, 오스트리아 제국 의회(Diet)와 시위대가 강경하게 요구해서 마지못해 해임한 것이다.]되어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마찬가지로 페르디난트 1세 역시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위대에게 약속해야만 했다. &lt;br /&gt;
&lt;br /&gt;
하지만 프로이센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소요는 좀처럼 진정되지를 않았는데, 같은 해 8월 황제의 밍기적 밍기적 거리는 태도에 분노한 빈의 노동자들이 다시 시위를 일으켰고, 헝가리에서도 코슈트를 지도자로 삼은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 헝가리의 경우 진압군이 봉기세력에게 연전연패하는 바람에 결국 러시아에게 부탁을 하여 러시아군이 진압하게 된다. ~~그리고 삼십년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는 그냥 발칸반도 절단나게 가만 내버려 둘 걸 하고 후회했겠지~~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12월 2일 황제직에서 퇴위한다.          &lt;br /&gt;
&lt;br /&gt;
그 외에도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바덴|바덴 대공국]] 및 군소 영방국, 헝가리와 폴란드 같이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던 지역 등 독일어권 거의 모든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군주들은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황급히 자유주의적 개혁을 약속해야만 했다.&lt;br /&gt;
&lt;br /&gt;
=== 반동 세력의 역습 ===&lt;br /&gt;
하지만 [[융커]]를 비롯한 반동 세력들이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다시 군대를 규합하여 1848년이 지나가기 전에 다시 베를린을 탈환하였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역시 가면을 집어던지고 다시 구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자유주의 헌법과 의회는 명목상으로는 존속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유명무실해졌다.[* 헌법의 경우 [[왕권신수설]]을 박아버려서 국왕과 총리가 의회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되었으며, 의회의 경우 악명 높은 납세액에 따른 3등급 투표권(Dreiklassenwahlrecht) 제도를 도입해서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전체 의석수의 불과 30%만을 선출할 수 있게 해버렸다. ~~뭐 애초에 의회가 어떤 권한이 있던 것도 아니고~~]   &lt;br /&gt;
=== 통일 시도 ===&lt;br /&gt;
한편 이 당시 독일 사회에서 점차 목소리를 얻어가던 [[민족주의]]에 입각한 통일 독일을 세우려는 시도 역시 3월 혁명과 맞물려 이루어진다. 1848년 5월 18일에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수입되면서 이러한 시도에는 박차가 가해진다. 전반적으로 중도 우익 계열의 자유주의자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입헌군주제]]의 지지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들 대부분이 대학교 교수였기 때문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는 [[백면서생]]끼리 모아서 뭘 하겠냐는 식으로 빈정대면서 이 의회를 교수님들의 의회(Professorenparlament)라고 불렀다.]이 다수를 차지한 프랑크푸르트 의회를 달군 가장 뜨거운 화두는 바로 통일의 범위 문제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주축이 될 것을 주장하는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이 주축이 될 것을 주장하는 [[소독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 심지어 대독일주의 중에서도 독일어권 지역이 아닌 발칸반도나 헝가리 일대를 통일 독일에 포함시켜야 하느냐 마느냐 여부를 놓고도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lt;br /&gt;
&lt;br /&gt;
초기에 전반적으로 힘을 얻은 것은 대독일주의였지만,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발칸반도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의회 내에서는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소독일주의가 점차 지지를 받게 된다. 하지만 프로이센 왕국 역시 통일 독일의 군주직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이들 입장에서는 의회 '따위'가 신성한 왕위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러한 분위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오스트리아의 대표자로 의회에 파견된 로베르트 블룸(Robert Blum)이 반 정부 소요에 참가했다는 명목으로 처형당한 사건.[* 명목상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깔끔하게 무시당했다(...)]&lt;br /&gt;
&lt;br /&gt;
이런 상황에서도 1848년 12월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굴하지 않고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한 헌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이미 반동 세력이 재집권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에서는 말 그대로 씹혔고 그렇게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유명무실화된다.  &lt;br /&gt;
&lt;br /&gt;
=== 혁명의 붕괴 ===&lt;br /&gt;
여전히 남부 독일 지역에서는 혁명가들의 세력이 강성했고, 그들은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열심히 지지해주었지만 이들의 세력은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 비교해서 너무나도 미약했다. 게다가 의회의 다수 구성원을 차지하던 온건 중도 세력들은 급진 민주주의자[* 대충 [[공화주의|공화주의자]]라고 뭉뚱그렸어 볼 수도 있다. 이들이 급진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으로 급진적이라는 것이지 21세기의 정치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우파 세력에 가깝다. ~~당장 [[미국 공화당]]만 봐도 알 수 있다.~~] 및 사회주의자들의 등장에 공포에 질려서 구체제 특권층들과 결탁해버린다(...)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독립 봉기가 진압되어 가면서 오스트리아는 다시 독일 내 문제에 전념을 기울일 수 있게 됐고, 결국 1849년 5월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해산되고 독일 3월 혁명은 최종적으로 수포로 돌아간다.&lt;br /&gt;
&lt;br /&gt;
=== 여담 ===&lt;br /&gt;
 * 오늘날 독일의 국기인 흑-적-백 [[삼색기]]가 대중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된 것이 바로 이 때의 일이다.&lt;br /&gt;
 * 3월 혁명의 실패에 실망한 많은 독일인들이 [[아메리칸 드림|풍요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나가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독일계 미국인]]들의 선조 중 상당수를 차지한다.&lt;br /&gt;
 * 비스마르크는 3월 혁명의 실패를 회상하면 '우리 독일인들이 콩가루인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저 때만큼 그게 극명히 드러났던 시절도 없었지.'라고 냉소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독일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가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비스마르크는 절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구체제적인 정치질서를 유지하는 대신에 대중과 부르주아지들의 불만을 달랠 겸 프로이센의 위상을 신장하고자 통일을 추구한 것 뿐이다.] &lt;br /&gt;
== [[러시아 2월 혁명]] ==&lt;br /&gt;
통상 러시아 2월 혁명이라고 지칭하지만 3월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까지도 [[제정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썼는데 혁명이 시작된 시기가 율리우스력으로는 [[1917년]] [[2월 23일]]이며, 범세계적으로 쓰이던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 9일]]이기 때문.&lt;br /&gt;
&lt;br /&gt;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 혁명]] 항목 참조.&lt;br /&gt;
&lt;br /&gt;
[[분류:유럽사]][[분류:독일의 역사]][[분류:러시아의 역사]]&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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