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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NP 논쟁 - 편집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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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이 문서의 편집 역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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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7년 1월 18일 (수) 02:23에 Maintenance script님의 편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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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7-01-18T02:23: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lt;/p&gt;
&lt;p&gt;&lt;b&gt;새 문서&lt;/b&gt;&lt;/p&gt;&lt;div&gt; * 참고 : [[운동권]], [[학생운동]]&lt;br /&gt;
&lt;br /&gt;
||이 항목은 [[사회구성체 논쟁]], [[사구체 논쟁]]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목차]&lt;br /&gt;
== 개요 ==&lt;br /&gt;
80년대 중반 한국의 [[학생운동]] 진영에서 제기된 이념 논쟁. '사회구성체 논쟁', 이를 줄여 '사구체 논쟁'이라고도 한다. --[[콩팥]]의 사구체와는 관계없다--&lt;br /&gt;
CNP란,&lt;br /&gt;
 *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주의혁명)&lt;br /&gt;
 *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주의혁명)&lt;br /&gt;
 *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주의혁명)&lt;br /&gt;
의 세 가지 계통의 약자이다. &lt;br /&gt;
&lt;br /&gt;
이 셋 중에서 NDR이 운동권의 주류 위치를 차지했다. 80년대 중반에 NDR은 주체사상을 수용한 세력이 성장하면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으로 진화하여 80년대 후반에는 다수파 민족해방([[NL]]) 노선과 소수파 제헌의회(CA) 노선으로 분립된다. 이때 CA 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헌법제정민중회의(CPC) 노선이 등장하며, CA 노선은 자기해체 과정을 거쳐 CA다수파는 NL 노선에 합류하여 NL-좌파가 되고 CA소수파는 민족민주(ND) 노선의 소수정파로 존립한다. &lt;br /&gt;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수용한 여러 소정파들이 형성되었는데, CPC와 아울러 민중민주([[PD]]) 계열로 통칭되었다.&lt;br /&gt;
&lt;br /&gt;
== 비판 ==&lt;br /&gt;
80년대 당시 학내 [[운동권]] 세력들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려는 의도로,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사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여러 이론적 기반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될 사상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는 결여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다소 이상한(…) 이론을 재조립해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이러한 사구체 논쟁인 것이다. 당시 사구체논쟁은 학생운동, 재야운동권, 노동운동을 비롯한 운동권 각계각층의 이론가들이 총 망라하여 나름대로 심도있게 벌인 논쟁--[[키배]]--이었다.&lt;br /&gt;
&lt;br /&gt;
근본적으로 서양 역사와 사회에 기반한 사회 이론을 당시 한국 사회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가 망한 케이스라고 평가받는다. 당시 이런 병크를 저지른 집단이 국제적으로 한둘이 아니다.&lt;br /&gt;
&lt;br /&gt;
또한 당시 운동권의 분파 프레임은 이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인원들이 주도하고 있는 현대 한국의 진보정치에, 주로 부정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lt;br /&gt;
&lt;br /&gt;
== 역사 ==&lt;br /&gt;
=== 80년대 이전 ===&lt;br /&gt;
사실 8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 재야 운동권은 대부분 [[민족주의]]운동이나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4.19 혁명]]부터 시작된 사회운동의 계보를 관찰해 보면 [[좌파]]를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은 아직 금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까지 재야 운동권에서 인기를 얻은 이론은 [[매판자본론]]이나 [[종속이론]], 반독재 [[자유주의]] 이론 등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회 비판이었지 사회주의 혁명론은 별 인기가 없었다. 아니 인기가 없었다기 보다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통제,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로 성장할래야 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60~70년대 내내 남한에 [[좌파]]나 [[사회주의]], [[주체사상]] 노선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에는 서울대 도서관에 일본어로 된 &amp;lt;[[자본론]]&amp;gt; 등 여러가지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서 의외로 손쉽게 접할 수 있었고, 1960년 총선에서 사회주의 계열정당인 사회대중당이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합법정당으로 활동했던 [[사회민주주의]]계열의 [[통일사회당]]도 존재했다. 그리고 60년대 초반의 [[사회대중당]]등 사회주의 정당을 북한이 지원했던 일도 있었고, [[통일혁명당]]같이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가 있는 지하당도 존재했다. 소수이긴 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집단도 존재했다. 물론 이들은 지속적인 단속과 탄압으로 하나둘씩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70년대에 유신독재가 강화되면서 끝없는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은 기본적으로 반공국가의 기조가 강했기 때문에, 조직이 커질 수 없는 [[듣보잡]]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일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니 뭐니 하는것은 [[역적]]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lt;br /&gt;
=== 80년~83년: 준비기 ===&lt;br /&gt;
그러던 중 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이 터지게 되고, 재야 운동권은 심각한 충격을 받기에 이르른다. 그때까지 재야 운동권은 미국(정확히는 [[지미 카터|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로 인해 미국을 우방으로 믿고 있었지만 미국이 수수방관하는 바람에 엄청난 희생자가 났다는 결론에 부딪히게 되고,[*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바라보고, 미국식 민주주의 시스템이 한국의 롤 모델이라고 파악하는 이론가들도 꽤 많았다.] 또한 단순히 이때까지의 시민민주주의/자유주의 민권운동에 국한되는 이론으로는 사회의 구조적인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학생운동가들과 재야 운동가들은 본격적으로 좌파 사상을 대안으로서 학습하게 된다. 80년대 초중반은 '''&amp;quot;원전 탐독의 시대&amp;quot;'''라고 불릴 정도로, 조잡한 필사본이나 복사본으로 된 [[자본론]]이나 &amp;lt;[[공산당 선언]]&amp;gt;, &amp;lt;[[모순론]]&amp;gt;, &amp;lt;[[무엇을 할것인가]]&amp;gt; 등등 외국의 서적들을 돌려보기에 이르른다.[* 물론 당시에는 금서였으니 번역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lt;br /&gt;
&lt;br /&gt;
이러던 와중에, 사회 혁명에 도달하는 방법과 사회 혁명의 모델을 구상하던 재야 운동권의 사람들 사이에서 &amp;quot;현재 한국의 사회발전 단계가 어디냐&amp;quot;와 &amp;quot;변혁의 주체인 민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amp;quot;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사회혁명 운동을 할 때 필수적으로 '''현재의 정세 파악'''과 '''이 국가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는 민중이 누구냐'''를 따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바로 이것이 &amp;quot;사회 구성체 논쟁&amp;quot;(약칭 사구체 논쟁)이다.&lt;br /&gt;
&lt;br /&gt;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전까지의 재야 운동권의 이론과는 사뭇 달랐다. 왜냐하면 기존의 민족주의 운동이나 자유주의 운동가들의 시각에서 사회 혁명은 '''&amp;quot;독재가 물러가고 모든 시민들이 한 표씩 얻는&amp;quot;''' 상황만 도래하면 종료하는 것이기 때문. 하지만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러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 구조적 개혁으로 노동자/농민등의 민중이 주체가 되고 사회의 모순을 생산하는 자본가/군벌들이 타도되는 사회를 최종점으로 잡았다. 이는 사실 맑스/레닌주의의 무산대중 혁명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lt;br /&gt;
=== 84년~85년: 1단계 논쟁(CNP 논쟁) ===&lt;br /&gt;
1984년에서 1985년까지 운동권 내에서는 본격적으로 'CNP' 논쟁이 벌어진다. 개요 문단에서도 서술했듯이 각각 CDR, NDR, PDR의 앞글자를 따온 것.&lt;br /&gt;
&lt;br /&gt;
시민민주혁명론(CDR)은 당시의 한국을 주변부 자본주의로 보고, 한국 사회에서 모순을 느끼는 계층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 민족 자본가 등 다양한 계층임을 지적하였다. 또한 민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후 민중운동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민중민주혁명론(PDR)은 당시의 한국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해하였다.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표방하는 집단으로, 이들은 인민(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주창했기 때문에 PDR이라고 칭해졌다.&lt;br /&gt;
&lt;br /&gt;
민족민주혁명론(NDR)은 한국 사회를 신식민주의로 파악하였다. 즉 한국의 모순은 민족적 모순과 국가 권력의 독점 자본이 중첩되어 나타난 결과로 본 것이다. 이들은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연합을 이룬 후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lt;br /&gt;
&lt;br /&gt;
CDR론은 우익 기회주의 이론으로, PDR론은 좌익 급진주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져 당시 학생운동에서는 NDR론이 주류로 떠오른다.[[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98|#]]--매체가 매체인 만큼 걸러서 읽자-- &lt;br /&gt;
&lt;br /&gt;
=== 86년~87년: 2단계 논쟁(NL-CA 논쟁) ===&lt;br /&gt;
NDR이 학생 운동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86년, --만악의 근원--김영환이 주축이 된 단재사상연구회에서 제작된 '강철서신'이 학생 운동가에 유포되기 시작한다. 소위 '강철서신'은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이 아닌 [[주체사상]]에 기반한 문건이었고, 많은 대학생들이 이에 경도되어 후의 NLPDR을 구성한다.[[http://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41939.html|#]] 주체사상은 이전까지의 이론에서 설명되지 않던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부분이 해소(?)시켰다. 이전까지의 이론들은 민중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서로서로 [[우리가 남이가]] 식의 공동체 정서가 남아있는 한국에서 무자비한 계급혁명을 완수할 이론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깔끔하게 이를 &amp;quot;민족적 애국인사&amp;quot;와 그렇지 않은 자들로 이분화 시켜버린다. 일단 민중 주체의 혁명을 하긴 하되, 양심적인 자본가나 기업가는 우리 편이고, 민족적 공동 이익을 위한 그 외의 사회 상층부 인사들도 전부 규합 대상이라는 것. 이들은 현 단계를 일제시대와 별 다를바 없는 식민시기로 규정했기 때문에 민족해방이 우선이라고 불렸고, 민족공동체 건설을 최 우선으로 꿈꿨다.--[[나치당|국가사회주의]]?--&lt;br /&gt;
&lt;br /&gt;
이러한 주체사상의 유입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과 [[민족]]이라는 기치 하에 엄청난 감수성 폭발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사회혁명과 민족봉승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이른다. 반면 '''민족이 장땡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 단계가 아직 레닌의 이론에 나와있듯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단계에 머물러있고, 이를 먼저 해결 해야 그 다음에 비로소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다가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 상층부와 민중(민족)을 분리한 민족민주주의 혁명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에 민중이 주체가 되는 혁명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민족 민주주의를 주창했기 때문에 [[ND]]라 불렸다.&lt;br /&gt;
&lt;br /&gt;
이로서 NDR에서 [[NLPDR]]이 분화되었다. 이들은 민족 민주 민중, 즉 '삼민투' 투쟁을 이끌었으나 견해의 차이로 인해 민민투(민족민주투쟁위원회)와 자민투(자주민족투쟁위원회)로 분열되었다. &lt;br /&gt;
&lt;br /&gt;
민민투는 [[CA]]로, 자민투는 [[NL]]로 명칭을 바꾸었다. CA는 당시 현재의 정부를 타도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해서 아예 나라를 새로 만들자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사실상 [[러시아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케렌스키]] 정부의 설립을 본딴 것이다. CA는 ND라고도 불렸다. 80년대 중반까지 원래 이들은 계속적으로 이론적 갈등을 겪었다.&lt;br /&gt;
&lt;br /&gt;
[[6월 항쟁]]의 진행과정에서 NL은 일반 시민에게 잘 다가갈 수 있는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내세운 반면, CA는 기존의 제헌의회 수립 주장을 반복했기에 CA의 세가 위축되고 NL이 학생 운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lt;br /&gt;
&lt;br /&gt;
=== 88년~90년: 3단계 논쟁(NL-PD 논쟁) ===&lt;br /&gt;
80년대 말에 와서 CA는 해체되었다. CA파 중 일부는 NL 집단으로 들어갔지만, 이들은 주류 NL과는 달리 북한의 주체사상에 반대하는 소위 '비주사 NL'(NL좌파) 노선으로 나섰다. 나머지 대다수의 CA파는 PDR 세력과 합쳐 민중민주([[PD]])로 진화했다.&lt;br /&gt;
&lt;br /&gt;
이 시기 NL과 PD 사이에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진다. NL은 한국을 봉건제의 연장, 반 봉건 상태의 국가로 보았다. 그러나 NL의 주장은 북한의 이론에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PD는 한국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았다. 이 NL과 PD의 대립 구도는 [[6월 항쟁]], 직선제, [[노태우]]의 당선, 90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미약하게나마 진보정치 진영에 뿌리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lt;br /&gt;
&lt;br /&gt;
=== 90년대 이후 ===&lt;br /&gt;
90년대에 들어서 이념 논쟁의 기반이었던 학생운동 자체가 쇠락하였다. 학생운동 자체의 문제도 있었으나(이게 직접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1996년 한총련 사태와 1997년 구타 살인 사건이며 이 사건은 [[한총련]]이 결정적으로 쇠하게 된 사건으로 꼽힌다,), 학생운동 대신 정치적 이슈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소위 '시민사회 세력'이 성장한 것도 학생운동 쇠퇴의 원인이었다. 이를 두고 학생운동은 그 사명을 다했다는 비관론도 없지는 않다. &lt;br /&gt;
&lt;br /&gt;
그래도 이들 세력을 기반으로 1998년 [[국민승리21]]을 거쳐 본격적인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출범하고 진보 세력이 정치권에 입성하면서 8~90년대의 사상 논쟁이 열매를 맺었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2013년 [[통합진보당]]의 ~~깽판질~~부정선거와 진보 정당의 대분열로 인해 다시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lt;br /&gt;
&lt;br /&gt;
2000년대에 들어 학생운동은 정치적 사안을 벗어나 학내 인권 운동이나 청년 실업 문제 등 사회 현안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적 이론을 가지고 싸우던 기존 [[운동권]] 세력은 세가 미약해졌다. 그 와중에 학생운동 개혁 이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정작 현장에선 별 성과를 얻지 못하는 중(...)&lt;br /&gt;
&lt;br /&gt;
== 참고 자료 ==&lt;br /&gt;
[[http://www.unn.net/ColumnIssue/Univ50Detail.asp?idx=83&amp;amp;n4_page=1&amp;amp;n1_category=4|한국대학신문]]&lt;br /&gt;
[[분류:제5공화국]] [[분류:노태우 정부]]&lt;/div&gt;</summary>
		<author><name>Maintenance script</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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