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력사

高力士

나라의 환관(684년~762년)

본명은 풍원일. 조부 이전에는 벼슬을 지낸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풍군형이 죄를 지어 관직과 가산을 몰수당하고 10살이던 풍원일은 노비가 되었다. 698년에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가 측천무후를 모셨다.

이름이 바뀐데는 두 가지 다른 사료가 있다.

신당서구당서에 의하면, 당태종의 셋째 아들 이각의 아들 이천리가 풍원일과 또 다른 환관을 궁에 바치면서 금강역사(金剛力士)에서 따와 금강과 력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풍력사가 되었고, 나중에 죄를 지어 측천무후에게 매를 맞고 궁에서 한 번 쫓겨났을 때 환관 고연복이 양아들로 받아들여 고력사가 되었다고 한다.

1971년 발견된 고역사의 신도비에 의하면, 고력사의 성과 이름은 측천무후가 고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력사로 고치게 하여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력사의 아버지 풍군형의 묘지명에는, 고력사는 어렸을 때 양자로 들어가서 성이 바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력사의 양부 고연복의 묘지명에는 특별한 언급은 없다.

당현종의 최측근 환관으로 당현종 시대에 권세를 누렸다.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력사라는 이름대로 아주 덩치가 크고 힘이 셌다고 전해진다. 수많은 재상들이 뜨고 지던 당현종 옆에서 떠나지 않아 사실상 당현종의 진정한 최측근으로 활동. 실제로 이보국(이양반도 환관이다)이 당숙종에게 당현종을 이간질해 사실상 유폐시킬때도 맨 먼저 한 것이 고력사를 당현종 옆에서 떼어내는 것이였다. 결국 현종이 유폐되면서 분사한다.

현종에게 충정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환관의 힘이 커진건 고력사를 시작으로 한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것이 당숙종 이래로 환관들의 전횡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