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율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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斛律光
515~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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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명장. 자는 명월(明月).

2 개요

고차족(高車族) 북제 삭주(朔州)사람으로 대대로 북제에서 이름높은 장군가문이었다. 아버지인 곡율금(斛律金)은 군공으로 북제의 좌승상의 자리에 오른 무인. 후에 함양군왕(咸陽郡王)까지 되었고 사실상의 북제 창업자인 고환(高歡)의 군에 있었을때 부른 칙늑가라는 노래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곡율광은 어릴때부터 말타기 같은 무예에 뛰어나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고작 17살때 고환에게 발탁되어 도독(都督)의 자리에 올랐고, 고환의 아들인 고징(高澄)과 친하게 지내어 그 탓으로 정로장군(征虜將軍)과 위장군(衛將軍)의 자리에 올랐다. 고징과 후에 사냥을 하러 갔을때, 커다란 새 한마리가 날고 있자 곡율광이 이를 쏘아 떨어뜨리자 정확히 목에 맞아 마차 근처에 떨어졌다고 한다.

3 업적

564년 북주의 달해성흥(達奚成興)이 북제의 평양을 공격하자 곡율광은 보병과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나가 힘껏 맞서 싸웠다. 곡율광이 힘껏 맞서 싸워 이기자 적은 달아났고 이를 추격하여 3000여명의 포로를 사로 잡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고 그해 겨울 북주는 재상 우문호(宇文護)[1]가 무려 10만의 군세를 장군 위지경을 선봉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옹주목(雍州牧)-제국공(齊國公) 우문관(宇文寬), 옹주자사 달해무(達奚武), 경주총관(涇州總官) 왕웅(王雄)등이 호응하여 낙양으로 진격하였다.

이 대대적인 공격에 북제는 난릉왕(蘭陵王) 고장공(高長恭)과 곡율광 두 명의 명장을 먼저 파견해 구원에 나섰고, 북제의 왕인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 역시 뒤늦게 병사를 추슬려서 출발하였다.

낙양 망산에서 북제와 북주의 군대가 대치하자, 지장인 단소(段韶)가 꾀를 내었다. 먼저 곡율광은 선두에 나서 적의 군대와 싸움을 시작하며 시선을 주목시켰다. 그 사이에 고장공은 중군(中軍) 500명의 기병으로 북주군을 돌파하고 낙양에 입성해 성내의 수비병과 합류하여 성밖과 성 안에서 정신없이 협공을 퍼붓자 북주의 장군 위지경들은 일단 후퇴하고 우문관, 왕웅등의 병력이 계속 응전하였다.

북주의 맹장인 왕웅이 곡율광의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곡율광은 순간적으로 쫄았는지 일단 말을 타고 후퇴하였다. 어찌나 위급한 순간이었지 그 주변에는 병사 한명과 화살 한대밖에 없었다고 한다. 바로 잡을 지경이 되자 왕웅은 신이 났는지 곡율광에게 소리쳤다.

"너를 잡아 내 왕께 바치리라!"

그 말을 듣자마자 곡율광은 화살 한 대를 집어서 말 위에서 쏘아 왕웅을 맞췄다. 왕웅은 말 위에서 부상 당해 일단 진지로 도망은 쳤으나, 하필 이마를 맞아 그 날 밤으로 사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전쟁터에서 적장을 직접 죽인것.

장군이 화살 맞아 죽을 지경이니 북주군의 사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곡율광은 기세를 타고 공격을 퍼부었고, 위지경과 우문관은 간신히 살아 도망쳤지만 베어낸 수급만 3,000개에 갑옷과 무기등의 물자는 전부 북제가 꿀꺽하게 되었다.

북주는 근성을 발휘해서 567년 12월 다시 낙양을 포위하자, 곡율광은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이를 막으러 갔다. 곡율광은 직접 앞에 나서서 "환갑집예(環甲執銳) 신선사졸(身先士卒)"이라고 외치면서 적군을 대패시키고 수급 1천개를 얻었다.

후에 북제군은 남하하여 선양 땅에 이르렀는데, 우문헌(宇文憲), 신국공(申國公) 탁발현경(拓跋顯敬)등이 방비하고 있어 100일동안 대치만 하고 있었다. 곡율광이 선양의 길목에 성 두개를 쌓고 철수하자 이때가 기회다 싶은 북제군은 5만 대군을 동원하여 뒤통수를 치려 하지만 시원하게 패배. 오히려 개부 우문영(宇文英), 도독 월근세량(越勤世良), 한연(韓延)등의 장수가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우문헌과 우문걸 등이 이끄는 3만 군대가 다시 한번 곡율광을 공격하지만 또 발리고 양경흥 등의 장수가 죽고 말도 천필이나 빼앗겼다. 이 정도면 거의 호구 왔능가 수준.

겨울이 되어 곡율광이 보병과 기병 5만여명으로 화곡(華谷)의 옥벽(玉壁)에 주둔하자 적장인 우문헌 탁발현경 등은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대치하고 있었다. 곡율광은 그 곳에 성채를 쌓고 만여호의 백성들을 스틸하고 되돌아갔다.

계속 그런 식이 되자 571년 무렵 곡율광이 세운 성채와 진이 무려 12개나 되었다. 위효관이 이끄는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이 그 중의 하나인 평용으로 공격을 하지만 또 발리고 북주군으론 안된다니까요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1,000명이나 되는 애꿎은 병사들만 전사자 신세가 되었다. 괜히 근처에 있던 북주군이 공격해오자 곡율광은 5만 명의 병력으로 무참하게 바르고 오히려 역공에 나서 북주의 성 4개를 빼앗고 포로 1,000명을 잡아온다.

4 직위

아무튼 이렇게 싸우기만 하면 이기니 벼슬이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 대장군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 함양군왕과 좌승상의 자리에도 오른다. 또한 첫째딸은 황후가 되었고 둘째딸은 태자비가 되고, 아들과 동생이 제후가 되고 세 번째 공주가 시집을 왔다. 동생인 곡율선은 도독으로 국경에서 변경을 점검하니 그 위세가 돌궐에 까지 미쳤다고 한다.

그야말로 가문의 위세가 절정에 달한 것인데, 정작 곡율광은 그야말로 철저한 무인이라 자신의 부귀가 너무 대단한것에 대해 근심하면서 집안에서도 근엄하게 행동하고 항상 검소하고 꾸미지 않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뇌물이야 당연히 안 받고.

5 누명

하지만 문제는 북제의 마지막 황제인 후주 고위가 워낙 그렇고 그런 양반이라 주위에 간신배들이 들끓었다. 곡율광에게 간신배 토벌을 권하는 사람들이 있자 곡율광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목인용권(目人用權) 국필파의(國必破矣)."

한편 북주의 장수 위효관은 곡율광을 싸움터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간첩을 파견해 곡율광에게 누명을 덮어 쓰게 한다.

백승비상천 명월조장안 고산불추자붕 곡수불부자수
百升飛上天 明月照長安 高山不推自崩 斛樹不扶自竪

맹안노공배상대부 요설노모부득어
盲眼老公背上大斧 饒舌老母不得語[2]

또한 그 외에도 여러 노래를 가르쳐 쉴새없이 부르게 하니 후주 고위 역시 의심하여 곡율광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된다. 거짓으로 상을 준다고 하고 곡율광을 부르자, 의심없이 혼자 말을 타고 온 곡율광은 어이없이 죽고 만다. 물론 그 이후에 모반죄로 일족이 끔살 당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고위가 사람을 시켜서 곡율광의 집안을 수색하게 하자, 단 하나의 칼, 화살, 활도 없었고 쌓아놓은 재물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고위는 그때서야 낚인 걸 알고 슬퍼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북주의 무제는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곡율광 사망 후 곡율광, 단소 등과 더불어 북제를 지킨 명장이자 황족이었던 난릉왕 고장공이 버티고 있기는 했으나, 고위 이 인간이 고장공의 명성이 너무 높자 미친듯이 견제를 해댔다. 이에 고장공은 군부에서 은퇴를 하고 싶어했으나 그렇게 하면 북제의 멸망은 뻔하였기에 은퇴도 못 하고 있다가, 곡율광 사망 1년 뒤 남조의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결국 고위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곡율광이 죽은지 딱 5년 뒤, 곡율광에게 한 번도 못 이기던 북주의 군사들이 업성을 함락시키고 북제를 멸망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곡율광을 추모하여, 북주 무제는 자신을 그토록 물 먹인 곡율광을 상주국 숭국공의 지위에 추서하며 말했다.

"곡율광이 살아 있었더라면, 내 어찌 제나라에 발을 디뎠겠는가!"
  1. 무려 황제를 3명이나 죽이고 새로 앉힌 어떤 의미에선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2. 백승은 곡식을 측량하는 단위로 100승이 10말로 1곡에 해당하며, 이는 곡율광을 의미한다. 밝은 달은 곡율광의 자인 명월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