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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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FC No.17
노병준 (盧炳俊 / No Byung-Jun)
생년월일1979년 9월 29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울산광역시
포지션포워드, 윙어
신체조건177cm / 67kg
등번호17번
프로입단2002년 전남 드래곤즈
소속팀전남 드래곤즈(2002~2005)
그라츠AK(2006-2007)
울산 현대 호랑이(2010/임대)
포항 스틸러스(2008-2013)
대구 FC(2014~)
국가대표5경기 / 1골
종교불교

1 개요

대구 FC의 공격수. 별명은 노뱅. 전형적인 골게터라기보다는 상대 수비를 휘저어 주면서 호시탐탐 골을 노리는 포처 타입. 선발 출장보다 교체 출장이 훨씬 많은 선수로 교체 출장시에 골 수가 더 많다. 2012 시즌 들어서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워낙 포항 공격진들이 삽을 푸는지라 선발 출장 역시 많아졌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선발 출장에서의 활약도 괜찮은 편.[1]

경기장 사이드로 넓게 퍼져 볼을 받은 후 중앙으로 드리블 돌파를 즐긴다. 퍼스트 터치가 일품이며, 페널티에리어 근처에서 골대 구석으로 감아차는 프리킥 또한 정확한 편. 선발로 나왔을때보다 상대팀 선수들이 지친 후반 조커로 나왔을때 뒷공간을 파고 드는 스타일이 잘 먹힌다.

1.1 유소년 시절

부산에서 초,중,고를 모두 나왔으며, 장산국민학교 시절부터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유년기 시절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축구부 회비를 당시 부산시 축구협회 부회장이었던 박수관 씨가 지원한 바 있다. 동래고 재학중, 우연찮게 동래고 경기를 관전했던 이회택 당시 한양대 감독에 눈에 들어, 한양대로의 진학을 결정하였다. 한양대에서 대활약하며 국가대표로까지 뽑히는 등 대학권에서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통했으며, 한양대 졸업 후 은사인 이회택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되었다.

1.2 전남 드래곤즈 시절

2002년 전남 드래곤즈에 계약금 2억 5천만원, 연봉 2천만원에 4년 계약으로 입단하였다. 전남 입단 당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B형 간염 보균자임이 밝혀지면서 주로 교체출장 요원으로 경기를 나설수밖에 없었다. 결국 5경기 교체출장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조금만 경기를 뛰어도 지친다는 세간의 선입견 속에서 맘고생이 심했던 노병준은, 재활을 거쳐 어느정도 자신의 신체적 조건을 극복하면서 2003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전남에서 몇안되는 밥값하는 공격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결국 39경기 출전 7골 4도움을 기록한다.

여담인데 2001년 ~ 2002년 당시 전남은 약 120억에 가까운 물량공세를 퍼부으며 각급 대표 공격수와 외국인 선수들을 수집했지만, 모조리 먹튀만 뽑아 실패했던 비참한 역사가 있다. 결국 2004년 스카우트 비리 파동이 터지면서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략 이유가 밝혀지긴 했지만.. 그나마 이때의 흑역사급 스카우트 과정으로 뽑힌 선수 중, 현재까지 K리그에서 뛰고있는 유일한 선수가 노병준 선수다.

계약 만료 직전에 전남 드래곤즈과의 재계약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전남은 노병준의 동의없이 경남으로 이적시키려고 하다가[2] 선수 본인이 거부하고 무적 선수로 지내다가 오스트리아 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전남에서 통산 101경기 16골 8도움을 기록했다.

1.3 그라츠 AK 시절

홍순학과 함께 오스트리아 그라츠 AK로 2007년 7월 1일에 이적했다.[3] 그러나 오랫동안 컨디션 조절을 못한탓에 초반의 임펙트있는 활약도에 비해 갈수록 체력이 딸려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2006/2007 시즌 종료 후, GAK 측이 계약해지를 통보함에 따라 자신이 수개월전 진흙탕 싸움을 벌였던 전남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노병준은 FA 이적료가 발생하는 신분[4]이었기 때문에, 전남 외 타 K리그 구단이 노선수를 영입하고자 한다면 수억의 이적료를 지불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선수의 에이전트에게 데일대로 데인 구단들은 노선수 영입을 아무도 타진하지 않았고, 노선수는 울며 겨자먹기 심정으로 전남으로 복귀할수밖에 없었다.

복귀한 노병준에 대한 전남의 반응은 냉담했다. 6개월동안 2군 무대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노선수는 2007 시즌 종료 후, 이적을 모색했고 전남은 어디든 좋으니 나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부산 아이파크를 비롯해 여러팀들이 노선수에 대해 영입의사를 보였고, 이후 박창현 당시 포항 수석코치가 오퍼를 넣었고 트라이얼 끝에 포항에 입단을 확정지었다.

1.4 포항 스틸러스 시절

2008 시즌부터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또다시 부상을 입어 3개월을 결장했다. 포항에 입단한 이후 주로 조커로 활약했으며[5] 선발로 뛸때보다 교체로 들어갔을때 골을 더 많이 넣는 등 대활약을 펼쳤고 결국 2009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선제골을 터트리며 팀의 3번째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6]

2009 시즌 종료 후 포항과 재계약을 하지만 2010 시즌 팀이 나락으로 빠지면서 프런트의 농간으로 울산에 6개월간 임대[7]를 가기도 했다. 노병준의 자리에서는 설기현, 조창현 등의 백업이 잇는 반면, 고기구를 제외하면 적당한 타겟이 부족하여 이진호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 14경기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11 시즌 황선홍 감독이 포항에 부임하면서 선발과 교체를 오가면서 맹활약, 비록 골 수는 적지만 순도 높은 골들을 터트리면서 포항 공격진을 이끌고 있다. 그 예로 32라운드 서울 원정에서도 김광석 퇴장으로 수비보강을 위해 노병준을 조기에 교체했는데 그 이후 포항은 제대로 된 공격을 못하고 역전패 당했다.

2012 시즌과, 2013 시즌에는 초반에는 나란히 부진했으나(...) 같은 노장콤비인 박성호와 같이 후반기에 귀신같이 부활. 특히 2013 시즌에는 팬들사이에서도 이제는 은퇴해야 하나 하고 싶을 때 FA컵 16강에서 천금같은 동점골, 그리고 리그 막판 중요 경기에서 골을 몰아넣으면서 포항의 더블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2013 시즌 마지막 울산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울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8] 장면이 TV에 잡히면서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지만 2013 시즌 종료 후 재계약 협상에 실패하면서 무적 선수로 포항을 나오게 되었다. 향후 행보가 묘연했으나 3월에 이르러 대구 FC와의 1년 계약을 알린다. 포항에서 149경기 31골 10도움을 기록했다.

김병지, 김기동에 이은 포항 스틸러스레전드로 남아주기를 바랐지만, 결국 이적하게 된 것에 대해 포항 팬들은 제법 아쉬운 듯.

1.5 대구FC 시절

광주 FC는 무적으로 풀린 노병준을 노렸으나, 대구FC로 이적하자, 하필이면 대구로 이적하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카더라. 차라리 K리그 클래식의 타 팀으로 이적하면 별로 상관이 없을 테지만 대구FC는 강등을 당해서 K리그 챌린지에서 서로 겨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4월 7일 고양 전을 앞두고 남부지방산림청에 의해 산불방지 홍보대사에 위촉되어 녹색캠페인을 전개했다. 이날 대구FC는 홈경기 당시 500명의 관객들에게 멀티스카프를 선물하고 산불예방 서명운동을 가졌다.

이적 직후 부상을 당해 바로 데뷔전을 치루지는 못했고, 결국 4월 19일 강원FC와의 경기에서 대구 소속으로 첫 경기를 치루었다.

4월 26일 안양전에서 후반 시작 윤영승과 교체되어 출전했다. 안양의 측면을 파고드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며, 후반 18분에 프리킥을 차기도 했으나 수비에 맞고 굴절되었다. 후반 47분 볼을 페널티 박스 안으로 전달했고, 장백규가 황순민에게 패스해 동점골의 시발점이 되었고 경기는 1-1로 끝났다.

6월 21일 대전과의 16라운드에서 후반 11분 교체출전했으며, 대전의 레전드 김은중과의 대결이 성사되었으나 경기는 2-3으로 패했다.

6월 25일 콘사도로 삿포레와의 친선 경기에 스리톱의 일원으로 선발 출장했다. 스루패스를 찔러넣어주며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는 등 맹활약을 펼쳤으며, 경기는 2:0으로 승리했다.

9월 27일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 선발출장해 팀의 1:0 승리에 기여했다.

11월 2일 강원 FC와의 34R K리그 챌린지에 선발출장했고 팀의 여갓적인 6-1 승리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대구가 한 경기에서 6골 이상 넣은 것은 창단 이후 처음이다. 전반 6분에 터닝슛을 시도했으나, 골로 연결되진 못했다. 후반 6분 최원권의 프리킥을 감아차 팀의 3번째 골을 기록했다. 후반 9분 프리킥을 찼으나 골키퍼가 선방했고, 나온 볼을 조나탄이 차 넣어 팀의 4번째 골을 기록하는데 기여했다. 5번째 골은 부상에서 복귀한 장백규와 강원의 측면을 돌파한 후 올린 공을 그대로 받아 골문으로 꽂아넣은 노병준의 골이었다. 이후, 후반 36분 신창무와 교체되었다.

11월 8일 충주 험멜와의 35R 경기에도 출장했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하고 팀은 1-2로 패배.

11월 16일 안양 FC와의 2014 시즌 마지막 경기에 출장해 맹활약을 펼친다. 전반 10분 코너킥을 찼고, 안상현이 헤딩을 날렸으나 골키퍼 선방에 막혔다. 하지만 전반 18분에 코너킥을 조나탄이 발리슛으로 깔끔하게 골로 연결시켰고, 후반 9분의 프리킥을 김대열이 백헤딩으로 골을 기록하며 세트피스만으로 2도움을 올리고 36R 위클리 베스트에 선정된다.

19경기 출장해 4골 3도움을 기록했다.

2015시즌 키프로스 전지훈련에 합류했다. 최원권과 함께 대구FC의 고참으로서 챌린지에서 베테랑이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했다.

1월 14일FK추카리치(세르비아)와의 친선경기 노병준은 이날 대구의 유일한 득점을 올렸다. 골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반전을 벤치에서 시작했지만 후배들을 열심히 독려했다. 경기가 풀리지 않자 후반에 들어갔다. 친선경기지만 임하는 자세부터 남달랐다. 긴 전지훈련으로 지친 선수단을 다독이는 여유를 보였다. 실수를 해도 박수를 쳤다. 지친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브라보"를 외치며 한 발 더 뛰게 만들었다. 팀을 만들어가는 대구에서 활력소 역할하며 고참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2 에피소드

2.1 전남 드래곤즈 구단과의 갈등

오스트리아 리그 그라츠 AK 이적 당시 전남에서 이적동의서를 발급해주지 않는 등 마찰이 있었지만[9] 하지만 이적 후 8경기 뛰고 부상당한데다가 구단도 자금난에 시달려 결국 다시 무적 선수로 돌아갔다.[10] 노병준 본인은 이 시기가 선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하는데 사실상 2년동안 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혼 뒤 6개월 동안 처가생활 했다고 했다고 하니 그의 심정은 이루말할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포항에 입단하고 첫 월급을 받았을때 아내에게 전화하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다만 스카우트 비리 파문이 터진 직후, 포스코측이 전남의 예산을 엄청나게 깎았기 때문에 당시 전남은 돈이 상당히 쪼들리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꽤 섭섭지않은 금액을 노선수에게 제시했었다는게 전남측의 증언이다.

워낙 전남에서 안좋게 떠났던 노병준이였기에 전남측도 좀 치졸한 짓을 한 것 사실이었고, 노병준도 이에 앙심을 품고 전남 드래곤즈 공홈 게시판에 두고보자는 식으로 비방글을 게제함에 따라 양 측의 앙금은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 완전히 틀어졌다. 결국 FIFA한국프로축구연맹의 중재로 이적 동의서가 발급된 노병준은 2006년 7월 정식계약을 체결하고 데뷔전에서 도움을 기록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숨겨진 유럽파 선수로 한동안 조명을 받았다.

2.2 결혼

노병준에 관해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로는 결혼 이야기가 있는데 전남 시절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에어로빅 학원을 찾았다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지금의 부인과 만났다고 한다.(둘의 나이 차이는 6살) 그 뒤 몇 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후로 대도 노병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담으로 노병준이 제일 힘든 시기였던 (오스트리아에서 전남복귀시까지) 그 기간동안 돈을 못벌어 장인장모집에 얹혀살면서 눈치를 많이 봐야했다고..

2.3 별명

노장임에도 신인 선수들 못지 않은 활약과, 이름 때문에 팬들 사이에선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칭송을 많이 듣는다.

2.4 페이스북은 인생의 낭비

2013년 4월 22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화제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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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있을 베이징 궈안과의 AFC 챔피언스 리그 원정 경기를 앞두고 흑인 축구선수 프레데릭 카누테비하하는 발언을 페이스북에 올린것. 문제가 생기자 노병준은 "농담인데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로 무마 하려 했으나....이것은 쉴드가 불가능한 명백한 인종차별 발언이다. 해외 축구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 존 테리등의 유명 선수들이 인종차별 발언 논란으로 인해 엄청난 곤욕을 치뤄야 했던 것에서 보듯이 FIFA가 축구계 최대 문제로 보고있는 것 중 하나가 인종차별 문제임을 감안하면 농담으로 했다고 말하기엔 사건이 커질수도 있다.어떻게 진행될진 모르지만 이러한 글을 페북으로 아무 생각없이 싸지른건 분명 잘못한 행동이다. 그덕에 존 듀어든의 칼럼에도 "인종차별 발언을 제대로 사과해라"라며 까였다. 해당칼럼[11] 그나마 구단에서 빠른 대처로 사과문을 올리고 노병준 역시 제대로 된 사과를 하면서 마무리. 당연히 노병준 본인은 황선홍 감독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웃자고 던진 말에 죽자고 덤비면"이라는 노병준의 변명에 한 뉴스댓글은 "죽자고 덤빌만한 말을 웃자고 올리니 문제다."란 명언으로 응수했다.

여담으로 이 사건이 터지고 국내 축구 갤러리FC 서울 갤러가 직접 AFC와 기자들에게 캡쳐본을 뿌리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맨 처음 사건을 언급한 갤러가 FC 서울 지지자였는데 이를 두고 몇몇 포항 팬들이 북패라는 단어로 응수하자 빡친 나머지 메일과 트윗으로 이 사실을 알린 것이라고. 이로 인해 한동안 국축갤에서는 "괜히 사건을 키워서 K리그 이미지만 실추시킨다" vs "잘못한 건 당연히 짚고 가야 하는 거 아님?"로 한동안 키배가 벌어졌다.그 서울 팬이 평소에 국축갤에서 지역드립 일삼던 종자였다는 건 반전

2.5 기타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바가지 머리가 있다. 축구를 좀 모르는 사람들도 가끔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저 촌스러운 머리는 뭐임? ㅋㅋ"하고 웃는 스타일이지만, 사실 이 스타일을 추천해 준 건 다름 아닌 노병준의 아내다. 프로선수라면 팬에게 뭔가 어필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는 아내의 추천에 어떻게 보면 촌스러울수도 있는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것. 물론, 이후 포항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과 2000년대 이후 김병지, 김기동에 이어 사실상 포항의 레전드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실력을 보면 그의 머리는 단순한 어필이 아닌 실력이 겸비된 팬들에게 기억될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다.

포항에서 사실상 방출에 가깝게 대구로 이적하는 바람에 김기동과 같이 포항의 레전드로 남기는 힘들게 되었지만 노병준 본인은 포항에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이적 이후에도 포항 팬들이 마련해준 행사에 거의 참가하는 편이다. 그래서 대구 팬들에게 곱지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고.

  1. 다만 나이 때문에 풀타임을 뛰는 경우는 적다.
  2. K리그의 대표적인 악법 중 하나. 선수의 이적 동의가 없어도 이적 시킬 수 있는 규정 때문에 억지로 팔려간 선수들이 한두명이 아니다.
  3. 당시 노병준의 에이전트는 홍이삭 에이전트였는데, 유럽 변방리그 이적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의 무조건적인 해외진출을 조성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4. 2005년 이전 FA 계약자들에게 해당하는 사항, 이근호J리그에서 울산 현대로 이적 당시 이적료가 발생했다.
  5. 어쩔 수 없는게 전남 시절에 B형 간염에 걸려서 고생했던 적이 있었고 그 뒤로 체력 회복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6. 결승 MVP를 수상했다.
  7. 이진호선수와 맞임대 되었다.
  8. 2012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9. 재계약 협상과정에서 전남과 감정이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이적동의서 사건으로 노병준과 전남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지금도 노병준은 전남 구단에게 이를 간다고 한다.
  10. 사실상 한푼도 못 벌었다고 한다.
  11. 그런데 듀어든이 이 칼럼을 쓴 시점엔 이미 노병준도 아차하고 사과다운 사과를 한 이후였다. 그 때문에 노병준은 인종차별로 한 번 까이고, 가벼운 사과로 두 번째 까이고, 제대로 사과한 후에 듀어든의 칼럼이 올라오는 바람에 사건을 몰랐던 네티즌들에게 다시 또 사과 안하냐며 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