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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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次


1568~1595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겸 양자. 히데요시의 누나의 아들로 원래 농민 출신이라 성은 없었다. 히데요시가 출세함에 따라 히데츠구가 미요시 야스나가의 양자로 갔기에 미요시 성을 썼었고, 미요시라는 성을 쓰기 전에는 히데요시가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 미야베 케이준을 회유하면서 케이준의 인질 겸 양자로 간적도 있어 미야베 성(姓)을 쓰기도 했다. 생전에 여기저기 양자로 갔기 때문에 사용한 성(姓)만 키노시타, 미야베, 미요시, 하시바, 도요토미 5개다.성 세개가진 누구보다 더하다

156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1] 토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지헤에(治兵衛)

1570년 오다 노부나가아자이 나가마사의 동맹이 깨진 후, 1572년 외숙 히데요시가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 미야베 케이준을 회유하면서 케이준에게 인질 겸 양자로 보내진다. 이후에는 미요시 야스나가의 양자로 가서 미요시 성(姓)을 사용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이후에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로 대두되면서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몇 없는 친척으로 중용되었으며, 시즈가타케 전투, 키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 착실히 공을 세워 100만석의 다이묘로 성장했다. 단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서로 간의 유일한 전투인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선 참패를 당한 전적이 있다. 전투에서 신중했던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서로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양군은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이케다 츠네오키가 나카이리(中入り - 별동대를 이끌고 적 후방이나 본거지를 공격하는 일, 일종의 우회 기습)를 건의해 나카이리부대 총대장되어 출진했었다. 근데 이를 간파한 이에야스의 역공에 당했고 함께 출진한 이케다 츠네오키(이케다 테루마사의 부친이자, 히데츠구의 장인 어른)와 모리 나가요시(모리 란마루의 형)등은 전사, 히데츠구 본인은 겨우 목숨을 건진채 도망쳤었다.
그 뒤, 아들 츠루마츠를 잃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칸파쿠 자리를 물려받고 후계자로 내정되지만 히로이마루(뒷날의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찬밥 신세[2]가 되고 이후 모반 혐의 등이 더해지면서 결국 숙청되었다.

그가 저질렀다는 수많은 악행 때문에 살생관백이라 불리며, 오사카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 살인의 범인이 그라고도 한다.[3] 천황이 죽어서 사냥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사슴 사냥을 하겠다고 우기기도 했으며[4] 금녀의 성역이자 금렵구인 히에이(比叡) 산[5]에 여자들을 데리고 사슴사냥을 갔다가 스님들로부터 제지를 받자 더 날뛰며 원숭이며 너구리까지 잡아 절 본당에 가져와 요리해 먹었다. 이를 전해들은 히데요시는 말문이 막혀있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의붓딸과의 추문이 있었다. 히데츠구의 계실(측실이라고도 한다) 이치노다이는 원래 히데요시의 측실이었다가 히데츠구에게 내려졌는데, 히데요시 전의 남편과의 사이에 미야라는 딸이 있었다. 이 딸에게 히데츠구가 손을 댔다는 것. 모녀덮밥 이 소문을 듣고 히데요시는 모녀를 함께 사랑하다니 짐승이나 할 짓이라며 격노했다고 한다.[6]댁이 그런 말을 할 주제가 됩니까

그를 보는 시각에 따라 악행을 일삼은 포악한 권력자와 음모에 휘말린 불우한 청년으로 견해가 갈린다. 과거에는 전자가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그가 선정을 베풀었던 점[7], 센 리큐에게 사사받고 공가들과 교류 했던 교양인이었다는 점 등이 조명되면서 후자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행정면에서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고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는 등 배움에 힘썼고 임진왜란으로 많이 어려워진 일본 백성들 삶에도 노력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2 히데츠구 사건

임진왜란과 함께 히데요시가 말년에 저지른 병크이자 도요토미 정권 몰락의 결정적 원인이 된 사건.
오나라의 손권말년의 병크가 생각난다.

1595년, 히데츠구가 덴노에게 돈을 바치거나 유력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포착되자, 히데요시는 모반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히데츠구를 추궁한다. 히데츠구는 해명을 위해 출두하지만 히데요시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히데츠구는 결국 출가해 코야산으로 들어가고 얼마 뒤 할복한다. 그의 목은 산죠가하라에 효수되고 그의 처자 30여명이 그 앞에서 처형된다.[8] 그것도 모자라 그 시신을 한 구덩이에 파묻은 뒤 '축생총(畜生塚)'이라 이름 붙였다. 당연히 여기에는 이치노다이와 미야도 끼여있었다.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는 측실이라 하나 아직 나이가 어려 히데츠구의 처소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그 안에 들어갔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딸을 살리기 위해 애걸했으나 히데요시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면회 조차 거부하며, 심지어 코마히메 처형 후에도 코마히메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근신처분을 내려, 모가미 요시아키를 몇 개월간 강제로 연금시켰다. 이 와중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정실 부인이자 코마히메의 어머니도 병사 or 자살한다.

다만 히데츠구의 정실은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 즉 이케다 테루마사의 누이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모친이 누구인지는 불명이지만(이치노다이의 딸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확증은 없다) 후에 사나다 유키무라의 측실이 되는 딸 한 명과 그녀의 동복 누이도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또한 오고노 츠보네의 딸인 오키쿠도 갓난아이라는 이유로 외갓집에 맡겨져 살아남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런 히데츠구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히데요시를 민심을 크게 잃었고 히데요시 아들인 히데요리와 히데요리 모친인 차차에게도 원망의 화살이 가는 등 도요토미 세력약화에 결정타를 먹인다. 마에노 나가야스, 키무라 시게코레 등 도요토미를 오랫동안 섬겨왔던 고참 신하들이 할복 또는 유형에 처해지면서 도요토미 정권의 가신단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모가미 요시아키, 호소카와 타다오키, 토도 다카토라, 다테 마사무네 등의 유력 다이묘부터 아사노 나가마사, 미요시 나가후사 등 친족들마저 연루되어 처벌을 받음으로서 히데요시 사후 이들 유력 다이묘와 친족들이 히데요리의 방어막이 되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붙는 계기가 되었다. [9]

예전에는 '간신' 이시다 미츠나리의 참언 탓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많다. 옛 히데츠구 가신들 중 상당수가 이시다 가에 들어갔으며, 심지어 마이 효고 같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미츠나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있다는 것이 그 근거 중 하나. 아무래도 주군을 참소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미츠나리가 오히려 히데츠구의 구명에 나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진상이 어찌 됐든 친아들이 태어나자 필요 없어진 조카를 누명을 씌웠든 잘못을 들춰냈든 하여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물론 적자가 태어나자 위기를 느낀 히데츠구가 모반을 기도했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처첩에 자식들까지 모조리 처형한 것은 지나친 일이다. 실제로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숨겨진 히데요리 아들 도요토미 쿠니마츠까지 찾아서 사형시키자 많은 백성들이 "태합전하가 자신의 아들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줄려고 죄없는 히데츠구와 그 가족들을 학살한 인과응보"라고 말할정도였다.

도요토미 정권의 중추이자 얼마남지 않은 도요토미가의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해서 히데츠구가 오래 살았더라면 히데요시의 난행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고,그 난행에 죽어버렸지만 히데요시 사후 어린 사촌 동생 히데요리의 자리를 찬탈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히데요리를 보좌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쉽게 전횡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수명도 길어졌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3 기타 창작물

3.1 영상물

NHK 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대하드라마 단골 배우인 진나이 타카노리[10] 분. 작가에 따라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는 나름의 능력자나 희생자로 그려지기도 하는 다른 작품에 비해서, 순수하게 열등감 투성이에 능력은 없는 개찌질이에다가 페도 로리콘으로 전락해버렸다(...)

오슈를 정벌하는 도중 술자리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가족을 불러서 시중들게 만들며 자기 꼬봉이 되라고 요구하는데, 그것만 해도 명문인 모가미씨[11]에게는 굴욕 중의 굴욕이건만 겨우 10살 남짓한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를 앉혀놓고 술을 따르라며 희롱하다가 급기야 첩으로 달라고 조르기까지 한다. 옆에서 보던 아사노 나가마사가 어이없었는지 코마히메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이니 좀 큰 뒤에나 데려가라고 하자, "나가마사 자네는 아직 여자 맛을 모르는구만. 활짝 피어난 꽃도 아름답지만 조그마한 꽃봉오리의 맛 또한 각별한 것이야."라고 꾸짖고, 당황한 요시아키가 코마히메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서 폐를 끼쳐 가문의 망신이 될까 두렵다고 최대한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건 내가 천천히 하나하나 가르치겠다!"라고 일갈하여 좌중과 시청자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이런 변태적인 모습을 보이는 히데츠구에게 식겁한 모가미 요시아키가 필사적으로 거절하려고 하자 열등감이 폭발해서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날 소홀하게 대접하고도 앞으로 출세할 수 있을 것 같나?! 코마히메를 내놔!"라고 억지를 부려 결국 관철시키고 만다. 대놓고 변태 아저씨 A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다가 너무 노골적인 단어들이라서 저건 도저히 TV에 나올 워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들도 많다(...)

후일 히데츠구 사건으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데, 코마히메의 죽음은 모두가 안타까워했지만 이 드라마의 히데츠구는 보여준 모습이 있는지라 많은 시청자들이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요시아키는 자기가 권력 앞에 굴했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며 비통해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2006년 작품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요 근래의 평가가 반영되어 인정받고 싶어했던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온다. 역사적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히데츠구의 휘하였다는 것을 반영하여 드라마 내에서의 평가가 후한편. 히데요시를 위하여, 포로로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 모습이 나오고 전쟁보다는 행정에서 나름 공적을 발휘한 것도 나온다. 하지만 츠루마루가 생겨난 후 불안해 하는 모습이 점차 보이고,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좌절하여 술로 인생을 보내게 된다. 거기에 관백자리에서 내치려는 것을 안 부하들의 반발과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자결하게 된다.

2016년 작품인 사나다마루 에서는 능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인품도있는 사람좋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츠루마루가 죽고난뒤 자름 정신을 차려서 제대로 관백의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히로이마루가 태어나자 심각하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동생의 죽음에대해서 차갑게 대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에 질려서 결국 관백자리를 버리고 도주한다. 쿄에있는 사나다가의 저택에서 숨어지내다가 사나다 노부시게가 히데요시에게 소환되자 코야산으로 도주, 결국 그곳에서 할복하며 생을 마감한다.

3.2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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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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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개발살 당한 것 이외에 군사적으로 큰 실책도 없고, 오히려 행정면에서 히데요시를 보조한 전적이 무색하게 완벽한 폐급 능력치로 나온다.

능력치는 최근작인 창조 기준으로 통솔 37, 무용 52, 지략 27, 정치 55

3.3 한국의 사극들

80년대 중순 당시 엄청난 제작비로 만들어 인기를 끌던 MBC의 사극 조선왕조 5백년-임진왜란편에서는 풍신수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추남이라고 알려졌던 히데츠구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남형 탤런트인 박찬환[12]씨가 배역을 맡았다. 어째 한자 이름이 豊臣秀로 나온다. 풍신수길이 빡돌아서 강제로 할복시키는데 풍신수차는 등장하자마자 할복하면서 퇴장...심히 안습하다.

징비록에서는 유세형이 맡았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죽은 틈을 타 네네가 추천해서 관백자리에 앉았는데 비중은 거의 없다. 하지만 히로이마루가 태어나고 안그래도 불안했던 입지가 더 줄어들게 되고, 결국 히데요시가 전쟁을 반대하는 다이묘들을 숙청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그를 희생양으로 써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을 씌워 할복자살하게 만든다.[13] 이때 히데츠구는 울면서 자신의 딸만큼은 살려달라고 말하는데 히데요시가 말로는 알았다고 했고 그 뒤의 일이 나오지는 않지만 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히데츠구의 일가족은 물론 관련된 사람들까지 싸그리 다 죽여버렸다(...) 사실 작중에서도 알았다고 말하는 히데요시의 표정부터가 이미 그럴 생각 없다는걸 피력하고 있다.
  1. 히데요시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다.
  2.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지명받았을 당시엔 만나서 얼굴도장 찍으려는 사람으로 넘쳐났지만, 히데요리가 태어나자마자 손님이 뚝 끊켰다. 돈을 빌렸던 사람들은 다른사람한테 돈을 빌려가면서까지 다 갚고 모든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3. 덧붙여 이 사건은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범인으로 의심 받았다. 그가 앓고 있던 한센병 때문에 인육 등을 노린 살인으로 의심한 것 같다.
  4. 이때 '죽은 이에게 공양하기 위해 사슴사냥을 하니, 살생관백(셋쇼간파쿠. 원문에서는 셋소우간파쿠라 이른다)이라 부른다.'는 낙서가 돌기도 했다. 셋쇼는 일본어로 살생을 뜻하기도 하고 섭정을 뜻하기도 한다. 일종의 말장난.
  5. 고대로부터 히에이 산은 조정과 국가를 비호한다는 진호국가 사상의 중심, 천태종의 총본산으로서 일본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성소였으며, 이 산을 통째로 불살랐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후 '제육천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6. 그러나 그가 자행했다는 악행들은 악의적인 날조로 보기도 한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 ~~하더라"라는 식의 근거없는 소문만 있었다.
  7. 그의 영지 중 하나였던 오미하치만시에서는 아직도 그를 기리고 있다. 다만 자기 지역 영주였던 무장을 기리는 건 오늘날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로 소위 '악인'이나 '모반자' 이미지가 박힌 것으로 알려진 아케치 미츠히데마츠나가 히사히데도 그들이 영지였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들을 기리고 있다.
  8. 그중에는 토요토미 정권 핵심 다이묘나 나름대로 지방에서 영향이 있는 다이묘 딸들도 있었다. 이들이 숙청되면서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품은 일부는 나중에 토요토미가문을 배신하고 이에야스에게 붙는다.
  9. 이 외에도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히데츠구의 가신이었던 야마우치 카즈토요,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카즈우지, 다나카 요시마사 등의 다이묘들도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에 붙었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하였을 때부터 따랐던 중신들로 히데요시도 이들을 깊이 신임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하라고 미카와에 영지를 내렸으며, 원래대로라면 이에야스가 에도에서 오사카로 진격할 때 버텨주는 방패막이 되었어야 했으나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바로 이에야스에 붙어버렸으며,(...)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경우엔 아예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바치기까지 하였다
  10. 명탐정 코난 실사판 기획에서 모리 코고로를 맡은 적이 있다(...)
  11. 모가미 요시아키 항목 참조.
  12. 불멸의 이순신에서 권준역
  13. 이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히데츠구는 히데요시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히데요시가 "그럼 누가 감히 관백전하를 모함했다는거냐!"라고 주변에 역정을 내는 을 한다. 이때 마에다가 한명 있긴 하다고 말해주고 히데요시는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이 "태합전하."(...) 히데요시는 "...나?"라고 말하며 뚱하게 있다가 이내 진의를 깨닫고는 마에다를 칭찬하며 "그래 히데츠구. 그럼 내가 할복할까?"라고 묻는다. 히데츠구는 당연히 울며 겨자먹기로 혐의를 시인할 수 밖에 없었고 히데요시는 네 영지로 돌아가서 잘못을 생각해보고 할복하라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