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역사

1 브루클린 다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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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다저스
Brooklyn Dodgers

원래는 뉴욕의 브루클린을 연고지로 했었다. 1884년 브루클린 애틀란틱스라는 팀으로 출발하여 팀 이름을 몇번 바꾸다가 1932년 브루클린 다저스로 개명. 뉴욕 연고 구단들인 뉴욕 양키스, 뉴욕 자이언츠와 세 팀이 모두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내셔널리그의 대항체인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서 뛰었지만, 이 리그가 해산된 후에, 내셔널리그에 가입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브루클린 다저스 경기장인 에베츠 필드

초창기에는 중하위권의 성적을 올리는 팀이었다. 1916년과 1920년에 내셔널리그 우승에 성공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패배. 그리고 또 한동안 침체기를 가졌다가 1940년을 기점으로 강호로 성장한다. 1941년 다시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브루클린 시절이 끝나는 1957년까지 7번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약 내셔널리그의 강호로 도약하기에 이른다. 내셔널리그 우승을 못하던 시절에도 2등을 5번 차지하는 등, 완벽하게 리그 최고의 강호로 군림했다. 특히 1947년 재키 로빈슨을 데뷔시키면서 메이저리그의 인종의 벽을 무너뜨린 것은 백미 중의 백미. 그렇지 않아도 내셔널리그의 강자로 성장했던 다저스는 이 업적 하나로 순식간에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존경받는 팀의 하나로 더욱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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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뉴욕 양키스 vs 브루클린 다저스 월드시리즈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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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이런 형태였다. 아래쪽의 추레한 캐릭터가 바로 브루클린 다저스의 마스코트 Brooklyn Bum(혹은 Dem Bums).

문제는 월드시리즈에서 번번히 뉴욕 양키스를 만나 번번히 깨졌다는 것. 1941년, 1947년, 1949년, 1952년, 1953년 모두 뉴욕 양키스를 만나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지면서 그야말로 콩라인이 어떤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줬다. 다행히 1955년에 뉴욕 양키스를 누르면서 한 차례 우승을 차지했지만, 다음해 1956년에는 양키스에게 또다시 월드시리즈에서 밀리면서 제대로 물을 먹었다. 뉴욕 시절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양키스에 조공(?)한 월드 시리즈만 해도 다저스가 6회, 자이언츠가 4회이다.[1] 지금의 양키스 전설은 대부분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만들어 줬다. 그러니까 양키스의 27회 우승 중 절반은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조공한거다 양키스는 다저스와 자이언츠를 누르고 뉴욕의 패권자가 되었고, 다저스는 뉴욕의 2인자, 3인자의 지위로 떨어진 뒤였다.

2 서부 이동과 1960년대의 전성기

뉴욕의 1인자가 되기 위한 시도로 당시 구단주인 월터 오말리는 브루클린 행정당국에 돔경기장 건설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 협조 요청은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구장 여건에 대한 불만 및 뉴욕에서 밀린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57 시즌이 끝나자 뉴욕 자이언츠의 구단주였던 호레이스 스톤햄을 서부로 가자고 꼬셔서 서부로 이동한다. 다저스는 로스앤젤레스에, 자이언츠샌프란시스코에 입성하는데 이 결정이 두 팀의 운명을 갈랐다.

다만 여기엔 약간의 카더라급의 여담이 있다. 원래 오말리는 뉴욕을 떠날 생각이 없었고 될 수 있는 한 팀을 뉴욕에 잔류시키기 위해 애썼는데 오히려 시에서 나 몰라라 했다는 것이다. 이 쪽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저스는 당시 구장인 에베츠 필드(Ebbets Field)를 허물고, 브루클린 더 정확하게는 NBA 브루클린 네츠의 홈구장인 현재의 바클레이 센터 자리에 새로운 구장을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뉴욕시 건축담당자였던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는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위치에 구장이 들어서길 바라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퀸즈 플러싱, 즉 지금의 뉴욕 메츠 홈구장인 시티 필드[2] 자리이다. 모제스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 구장을 설립하지 않는다면 예산지원을 해주지 않겠다고 했고, 오말리는 해당 지역을 거부했고 옛 구장을 그대로 쓸 생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옮겼다는 것이다. 이 것을 들어서 모제스가 나쁜 놈이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미국에도 많이 돌고 있는데, 월터 오말리의 평판이 회복될 일은 별로 없다. 기존구장을 못 쓰겠다고 한 것도 해당지역이 저소득층이 늘어났다[3]라는 등의 경제적 이유였고, 퀸즈 지역을 거부한 것도 기존 홈인 브루클린을 유지하겠다라는 것도 있지만 해당지역이 시영부지였기 때문에 부동산 업자인 오말리가 그 땅을 공짜로 넘기지 않으면 싫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시영부지인 상태로 임대하는 것도 거부, 그럼 구매하라는 것도 거부했다. 여기에 원래는 워싱턴 세네터스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로스앤젤레스 시 당국에게 자신들을 데려가라고 설득한 것도 월터 오말리였다. 즉, 이 사실이 알려졌어봤자 오말리의 평판은 별반 차이가 없고 모제스도 같이 욕먹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고, 같은 맥락에서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도 오말리의 평판은 뉴욕에서는 여전히 최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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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저러나 오말리는 옛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 팬들에겐 송병준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농담처럼 적혀 있는데, 이 당시 다저스와 자이언츠 팬들의 멘붕은 이정로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뉴욕에서 2위이고, 3위라고 하지만 다저스와 자이언츠는 뉴욕 양키스 안티팬들만으로도 어지간한 빅마켓 수준을 자랑했다[4]. 그런데 두 구단이 떠난다고 하니 팬들은 애원, 협박, 성토, 설득, 분노 등을 통해서 이전을 막으려고 애썼고, 이 일의 원흉인 오말리 성토대회는 거의 매일 열렸다고 한다. 특히 다저스의 연고였던 브루클린은[5] 하층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다저스는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6] 이 당시 이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958년 뉴욕의 대표적인 두 칼럼리스트 잭 뉴필드와 피트 햄밀이 역사적으로 태어났으면 안 될 인물 10명을 꼽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쓴 글에서 1위에서 3위까지가 모두 같았다. 1위 아돌프 히틀러, 2위 이오시프 스탈린, 3위 월터 오말리.

If you lock Hitler, Stalin and Walter O'Malley in a room with a Brooklyn Dodgers fan and give him two bullets for his gun, whom would he shoot?

히틀러와 스탈린과 오말리를 다저스팬과 한 방에 가두고, 다저스 팬에게 2발만 장전된 총을 준다면, 그 다저스 팬은 누구를 쏠까?


Shoot O'Malley twice!

"오말리에게 두 방"

이라는 것은 당시 유명한 조크. 이 농담은 나중에 여러 버전이 생겨났지만 원조는 월터 오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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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타임스 헤드라인: LA는 다저스를 환영합니다 - 9만명 운집 예상>

서부 이동은 다저스에게 큰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 메이저 스포츠에 굶주려 있던 당시 서부 지역 사람들은 옮겨온 명문팀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 예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캔들스틱 파크를 홈구장으로 쓰던 당시, 새 구장 신축 여부를 놓고 시와 갈등이 있었는데 항간에 타 지역으로 이전을 한다 카더라, 심지어 '뉴욕으로 다시 돌아간다 카더라'란 뜬소문이 나돌자 팬들이 '부탁이오 가지 마오(Please don't go)'란 피켓카드를 들면서까지 타 지역 이전을 막았다. 그래서 구장 부지도 비교적 헐값에 얻을 수 있었고, 최초로 흑인 선수를 등용하면서 우수한 흑인 및 히스패닉 선수들을 무한정으로 얻었다. 여기에 흑인 관중 유치에서 가장 앞서나간 것은 덤. 인기가 올라가면서 자연히 다저스는 더욱 성공적으로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정착할 수 있었고, 결국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도약하는데 성공했다.[7]

다저 스타디움 공사 장면.다저 스타디움

다저스는 로스엔젤레스 입성 2년만인 1959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1962년 지금까지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다저 스타디움이 개장한 이후, 다저스는 샌디 쿠팩스라는 불세출의 투수를 앞세워 1963년, 1965년 월드시리즈를 재패했다. 특히 1963년 월드시리즈는 뉴욕 양키스를 4-0 스윕하는 다저스의 완승으로 끝났는데, 명언제조기 요기 베라의 말씀이 아주 걸작이다. 월드시리즈 시작 전 25승 5패 평균자책점 1.88의 성적을 올린 샌디 쿠팩스를 두고 저런 애송이에게 25승이나 내주다니 내셔널리그 타자들은 전부 바보인가?라고 말했는데, 시리즈 종료 후 25승을 어떻게 올렸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5패나 한겨?[8] 1966년에도 월드시리즈에 오르지만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4-0 스윕을 당한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샌디 쿠팩스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는데[9] 27승 9패 평균자책점 1.73의 기록을 올린 괴물 에이스의 공백을 메꾸는건 절대로 불가능했다.[10] 결국 그렇게 다저스의 1960년대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3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다저스

샌디 쿠팩스가 은퇴하고, 돈 드라이스데일이 노쇠하면서 다저스는 잠시 흔들리게 되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망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4년 연속 서부지구 2위를 기록하면서 암흑기 아닌 암흑기를 걷게 되었을 뿐, 강호로서의 입지는 여전히 탄탄했다. 그리고 1974년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 당대 최고의 팀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패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등장한 '빅 레드 머신' 신시내티 레즈와의 치열한 패권다툼의 시대가 전개된다. 일단 1975년과 1976년에는 신시내티에 밀려서 지구 2등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1977년, 1960년대의 영광을 이끈 월터 앨스턴 감독이 은퇴하고, 후임으로 토미 라소다가 등장한다. 그리고 1977년과 1978년, 2년 연속으로 신시내티를 제치고 지구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만년 하위팀에서 강호로 등장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2년 연속 제치고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때도 다저스의 발목을 잡은 것은 뉴욕 양키스였다. 2년 연속 만난 과거 뉴욕의 라이벌과의 클래식 매치에서 다저스는 2년 연속 패배하면서 1970년대는 결국 2인자의 시절로 마무리해야 했다.


1981년 우승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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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우승 장면

그러나 근성의 다저스는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라는 멕시코 출신의 에이스를 발굴하며, 히스패닉 계열의 팬들을 끌어 모으면서 다시금 인기의 발판을 마련한 후, 마침내 1981년 월드시리즈에서 지긋지긋한 뉴욕 양키스를 꺾고 드디어 26년만에 우승을 차지한다.[11] 이후 1983년과 1985년에는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패배했으나, 1988년 월드시리즈에 올라 최강 전력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1차전 커크 깁슨의 그 유명한 절뚝거리면서 끝내기 홈런을 시작으로 당시 리즈시절이었던 에이스 오렐 허샤이저의 역투까지 더하여 4승1패로 우승을 차지한다. 1988년의 이 우승은 현재까지 다저스 마지막 우승이다.

전반적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강호로서 군림하기는 했지만, 우승을 노리기에는 한 끗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늘 상위권에서 활약했던 시절이었으니, 실패한 시즌은 거의 없었다.

4 암흑기 아닌 암흑기

이후 90년대에는 암흑기 아닌 암흑기를 보내게 되는데, 1995년과 1996년에만 플레이오프 진출했으니 암흑기라 해야 맞지만 정작 성적은 꾸준히 5할 이상 내는 괜찮은 성적이라서 완벽한 암흑기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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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5년 연속 내셔널리그 신인왕(사진 좌측부터 에릭 캐로스, 마이크 피아자, 라울 몬데시, 노모 히데오, 토드 홀랜스워스)을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아시아 지역의 개척에 나서 노모 히데오박찬호를 등장시킨 것도 1990년대였다. 흥행이라는 면에서 보면, 흑인 선수 및 그 시장의 개척, 히스패닉 선수 및 그 시장의 개척에 이어, 세 번째로 다저스가 또 다시 새로운 시장을 발굴했으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1990년대가 다저스의 최고 침체기였던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1996 시즌을 마지막으로 다저스 최고의 명감독 토미 라소다가 팀을 떠나고, 다저스의 아버지라고 할만한 구단주 오말리 가문이 구단을 70 넘어서도 2세를 본 루퍼트 머독의 FOX 코퍼레이션에 팔아넘기는데, 이때부터 2004년까지는 다저스 팬들도 완벽하게 흑역사 취급하고 있다. 감독들은 두 시즌 간격으로 교체됐고[12], 좀 한다 싶은 선수들에게 지나친 거액을 안겨주여 계약하면서[13] 팀 운영도 힘들어졌다.

특히 90년대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급으로 성장하는 페드로 마르티네즈, 폴 코너코를 다른 팀에 퍼주며 남 좋은 일만 해주는 등 여러모로 속쓰린 일이 많았다. 토미 라소다의 감독직 은퇴 이후 한솥밥을 먹었던 유격수 빌 러셀에게 밀려 감독직을 얻지 못한 과거 다저스의 명포수는 결국 옆동네로 떠나서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세이버메트릭스를 팀의 모토로 삼았던 폴 디포데스타 단장은 팀내 리드오프감 중견수 유망주를 두번이나 룰5 드래프트로 내몰고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기도 했는데, 그 선수는 2008년부터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내셔널리그 외야 골드글러브를 3연패한 중견수 셰인 빅토리노. 이때부터 DTD는 시작되었다

5 막장 맥코트 시대

돈을 우선시하던 FOX 계열에서 부동산 재벌 프랭크 맥코트가 팀을 인수하고, 고액 연봉의 먹튀들을 차례차례 처분하면서 다저스는 다시 회복되어 갔다. 물론 이 때는 맥코트가 다저스의 진정한 재앙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2004년 8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 비록 첫 상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처참히 말리고 탈락했지만. 이후 2006년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2년 연속으로 내셔널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 올라가지만 2년 연속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패배했다. 월드시리즈는 20년째 못 올라가고 있지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강자 자리를 탈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기간동안 좋은 성적을 보여주자 떠나갔던 관중들도 차츰 돌아와서 메이저리그 전체 관중동원 2위의 초인기구단의 위상을 회복했다.

그러나 다저스의 진정한 재앙이 찾아오는데, 바로 구단주 맥코트가 상상 이상의 막장이었던 것. 이미 빚을 내서 구단을 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빚을 만회하기 위해 다저스를 이용할 것은 점쳐졌지만, 구단주 부부가 이혼소송을 하면서 팀을 담보로 싸움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에 팀의 재정을 구단주의 사적인 일로 낭비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팀을 도저히 돌볼 수도 없는 상태임이 드러났다. 다저스를 담보로 거액의 돈을 빌려 사치를 일삼았고, 심지어 다저스를 통해 정치 자금을 모아 정계 진출까지 꿈꿨다고 한다. 여기에 점성술사를 고용해서 그들의 점에 따라 승패를 점쳤다고 하니 이건 뭐(...). 그래서 대권을 노리고 질러야 할 2009년 오프시즌 동안에 정작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동쪽의 누구는 이해할 수 없는 괴짜스러운 행동을 저질러도 제국을 재건하기라도 했지...

분명 2010 시즌 선발진은 화려했다. 제2의 샌디 쿠팩스를 꿈꾸는 88년생 좌완 영건 클레이튼 커쇼, 2009 시즌 전반에 사이 영 페이스를 달렸던 채드 빌링슬리[14], 첫 시즌부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좋은 모습을 보인 존 일라이, 일본인 투수 구로다 히로키, 준수한 4~5선발의 성적을 보이는 비센테 파디야까지. 하지만 구단주의 막장짓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흔들리는 팀이 성적이 잘 나올리가(...).

급기야 명문 다저스가 선수들 월급을 못 줄 신세에 몰렸다. 결국 중계권을 FOX에 헐값에 팔아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개입해서 중계권 계약을 무효로 만들었다. 결국 맥코트 부부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다저스는 2011년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명문 다저스라는 위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저스를 노렸다. 댈러스 매버릭스의 구단주 마크 큐반이나, 다저스의 스타 출신인 스티브 가비가 이끄는 투자자 집단, 그리고 옛날의 구단주인 오말리 가문 등등.

2011년에는 이렇게 팀이 제정신이 아니고 연봉이나 덜어내며[15][16] 리빌딩을 시작해야 할 처지까지 가나 했지만, 맷 켐프클레이튼 커쇼[17]가 다저스 팬들의 유일한 희망으로 군림하였고 후반기에 콜업된 유격수 유망주 디 고든이 3할을 치면서 눈을 즐겁게 해줬으며 옛 명감독 토미 라소다는 84번째 생일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 명예 감독으로 덕아웃에서 선수단을 지휘하고 홈 관중들에게 생신 축하 노래를 들었다.

시즌 종료 후 커쇼는 다저스의 암울한 득점지원 속에서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안 케네디와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 아메리칸리그의 금강불괴와 함께 78년만의 양대리그 동반 트리플크라운을 이뤄내는 대기록을 세웠고, 켐프는 리아나와의 결별 이후 분노의 맹타를 휘두르며 39-40으로 아깝게 40-40을 놓쳤지만 내셔널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에 등극했다.

6 다시 태어난 내셔널리그의 공룡구단

각 시즌의 내용은 해당 시즌 문서 참조.

맥코트의 막장 행각으로 지쳐가던 팬들에게는 다행으로 팀은 과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스탠 카스텐, 매직 존슨과 그 외 여러 사장단이 뭉친 구겐하임 컨소시엄에게로 넘어갔다. 팬들은 다른 누구보다 카스텐 사장이 야구단을 잘 경영했던 경험이 있으므로 다저스의 부활에 대해 기대를 걸었다. 더불어 네드 콜레티는 이제 카스텐에게 밀려 바지단장이 될 거라는 환호성도 같이 질렀다.(...)

2012년 중반 핸리 라미레즈를 영입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와 대규모의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아드리안 곤잘레스, 조시 베켓, 칼 크로포드를 영입, 페이롤을 확 올리면서 돈 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2013년 1월, 자세한 규모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하튼 최소 1년 3억 달러 가까운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25년 70억 ~ 80억 달러의 중계권 계약을 체결하며 그야말로 공룡 구단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시청률 상승, 그리고 팀 성적 상승에 대한 의지 표명 및 보험으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네임밸류와 연봉만 높은 고령자들도 받아들인 게 흠이라면 흠.

2013년, 위엄넘치는 빅마켓 구단으로 다시 태어난 다저스의 운영 원칙은 스탠 카스텐이 클레이튼 커쇼의 7년 2억 1천 5백만 달러 계약 발표 당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잘 나타난다. 이 때 카스텐 사장은 5년차 옵트 아웃이 있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은 없는 계약에 대해 '옵트 아웃은 얼마든지 넣어줄 수 있다. 하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은 말도 안 되는 조항이라고 생각한다. 옵트 아웃보다 어이가 없다. 내 생전 트레이드 거부권을 계약에 넣은 적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한 마디로 '네가 잘해서 돈 더주는 건 얼마든지 더 줄 수 있는데 네가 못하는데 자리 보전해달라는 징징은 ㄴㄴ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고효율은 포기하더라도 고효과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 이는 빅 마켓으로서 나름 현명한 처신이며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팜을 가꾸는 데에도 카스텐 사장이 직접 나서서 발언할 정도로 열심이라, 유망주 팜의 전체적인 두께는 얇더라도 탑 100에 들어가는 핵심 유망주들은 사수하면서 열심히 키우고 있다.

2013, 2014년 좋은 정규시즌 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서 좌절하자, 2014년 10월 탬파베이 레이스의 단장 앤드류 프리드먼을 영입하여 사장에 앉히고 전권을 부여했다. 로건 화이트를 비롯한 예전 프런트 멤버들 다수가 교체되었고 프리드먼은 맷 켐프를 과감하게 트레이드하는 등 본인의 색깔에 맞는 방향으로 팀 개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6.1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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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13 시즌: 미라클 다저스, 그러나 가을좀비에 의해 무너진 트루 에이스의 눈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13년으로.

6.3 2014 시즌: 또다시 가을좀비에게 덜미를 잡히고 라이벌 팀의 우승을 지켜보고 말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14년으로.

6.4 2015 시즌: 앤드류 프리드먼 사단과 함께하는 첫 번째 시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15년으로.

6.5 2016 시즌: 새로운 감독과 함께하는 첫 시즌, 다시 NLCS에 올랐으나 최강전력을 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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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욕을 떠난 이후까지 합치면 다저스는 8회, 자이언츠는 5개.
  2. 시티 필드는 에베츠 필드를 아주 빠다박은 모습이기 때문에, 다저스가 그 자리로 갔을 경우를 예상하는 것은 정말로 쉽다.
  3. 문서 상단에도 언급이 있고, 아래에도 언급이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저스에 골수팬들이 많았다.
  4. 지금도 뉴욕에는 놀랄만한 숫자의 양키스빠들이 존재한다. 보스턴 레드삭스팬들도 꽤 되고. 뉴욕 메츠가 그 대항마 역할을 이어받을 수준이 되지 않다보니 대체로 라이벌인 레드삭스로 편입되는 경우가 좀 있다.
  5. 이전 버전에서는 브롱스라고 적혀 있었는데, 브롱스는 양키스의 연고지다.
  6. 이후 이 팬덤을 이어받은 것이 뉴욕 메츠이다.
  7. 다만 스프링캠프는 한동안 브루클린 시절때 이용하던 베로비치를 계속썼었다가 2008년 3월 애리조나로 옮겼다.
  8. 요기 베라에 이 말에 그 당시 다저스의 주전 내야수였던 모리 윌슨은 "그는 잘 던졌지만 우리가 경기를 망친 것이다."라고 말했다.
  9. 팔꿈치 인대 파열로 인한 은퇴. 지금은 토미 존 서저리(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가 개발되어 인대가 끊어져도 수술을 통해 재활이 가능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수술 방법이 알려져 있지 않아 팔꿈치 인대 파열은 곧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의미했다. 만약에 그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면? ㅎㄷㄷ
  10. 그리고 저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좋은 은퇴 시즌 기록이다. 아니 메이저리그 모든 투수의 시즌 기록 중 가장 좋은 시즌의 기록이라고 해도 5위권안에 들만한 성적이긴 하다.
  11. 여담으로 이해 NLCS 시리즈는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꺾고 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릭 먼데이의 뜬금 솔로포로도 유명하다. NLCS 5차전까지 가는 접전(당시 5전 3선승제)이었는데 재밌게도 5차전이 열린 날이 월요일이어서, 이 릭 먼데이의 뜬금포를 '블루 먼데이'라고 부르며 요즘도 가끔 회자하곤 한다.
  12. 빌 러셀-데이비 존슨- 짐 트레이시
  13. 대표적으로 대런 드라이포트. 다저스 입장에서는 2000년 당시 당연히 박찬호를 우선 잡고 싶어했지만 박찬호는 FA시장에 나가서 자기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 연장계약을 거부했고, 다저스는 할 수 없이 드라이포트와 연장계약을 맺는데 문제는 13승이 개인 최다승, 4.16이 최저 평균자책점, 192이닝이 최고이닝이었던 투수에게 연평균 12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이유도 없이 안겨준게 문제. 드라이포트에게 너무 큰 돈을 안겨줘서 정작 박찬호가 FA시장에 나왔을때 돈이 없어서 크게 베팅하지도 못했다. 물론 박찬호의 허리부상 염려때문에 텍사스 레인저스 말고는 접근하는 팀도 없었긴 하지만...
  14. 후반기에 박살나면서 무참히 꿈은 깨졌다. 그래도 4.03의 ERA에 196.1이닝 소화.
  15. 하지만 $12M의 연봉을 수령하는 구로다 히로키가 눈치없이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하여 다저스 팬들이 뒷목을 잡았다(...). 그래도 구로다의 성적만 보면 다저스에서 실질적인 2선발을 맡아 200이닝을 던진 공로가 있으니 까방권도 줄 수 있는 편.
  16. 정작 라이벌 자이언츠에서 3년 21M으로 모셔온 후안 유리베는 2할을 겨우 넘기며 자이언츠의 첩자로 거듭났다.
  17. 특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팀 린스컴과 자주 맞붙었는데 그 때마다 굉장한 호투를 선보이며 더욱 복덩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