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

萬積
(? ~ 1198)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1] - 『고려사절요』 14권 「신종(神宗)」 (개성의 북산에서.)

고려 시대의 노비로, 만적의 난의 주동자.

1 개요

최충헌의 노비[2]로 있다가 1198년에 개경에서 나무 뒷산에서 노비 5명과 함께 상의하다가 여러 종들을 불러모으고 미리 누런 종이 수천 장을 오려서 정(丁)이라는 글씨를 적어놓고 이 종이를 표지로 삼게 했으며, 정자 표지를 달고 날짜를 정해 흥국사에서 출발해 격구장에 모이기로 약속했다가 격구장에서 대오를 정비해 한꺼번에 북을 올려 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흥국사에는 몇 백 명만 모였기에 적은 수로는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해 보제사로 모이기로 했는데, 그 전에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순정이라는 종이 주인인 율학박사 한충유에게 고해바치자 만적은 100여 명과 함께 붙잡혀 강물에 던져졌다.

그런데, 그 순정은 현재 가치로 약 2000만 원을 받고 평민으로 계급이 올라갔다고 한다.

2 창작물에서

대중들이 인식하는 만적의 모습과 실제 만적의 모습은 꽤나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돌쇠, 마당쇠같은 이미지보단 실제로는 김준의 예처럼 무장, 가병에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소설 만적에서는 경상도 토착 세도가인 김풍의 노비로 나온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김풍의 아들인 김정이 사냥길에 노복 삼복이를 활로 쏴죽이는 것을 목격하면서 친구 감마라와 함께 도망가는데, 그 전에 죽은 친구의 동생인 분이에게 어머니의 유품인 구리 팔찌를 건네주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한다.

감마라와 도망 생활을 하다가 대사 허정을 만나고 태백산에서 무예를 익히다가 김정과 사랑을 나눈 여진족의 여인인 금소예를 만났으며, 허정의 가르침으로 노비가 없는 세상을 꿈꾸게 된다. 또한 산 속 마을에서 여진족의 여인인 야매영을 만나 관계를 맺게 되는 것 등이 나온다.

최후에 예성강에 던져질 때는 자신의 씨를 잉태한 야매영을 생각하면서 절규하다가 죽는다.

무인시대에선 초반엔 최충헌이 내린 임무를 도맡아 수행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최충헌이 기생 홍련화를 스파이 역할로 이의민에게 보내자 '주인님의 대의는 귀족들 사이에서만 돌고 도는 대의가 아닙니까'라고 한탄했다가 노비가 주인의 대의를 어찌 폄하하느냐며 호통을 들은 것 빼면 최충헌과의 관계도 처음엔 나쁘지 않게 나온다. 최충헌의 목숨을 구하고, 최충헌의 무예 연습 상대를 해 주기도 하며, 이의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비루한 소인배인척 하는 최충헌이 온갖 비웃음을 사는걸 보고 눈물을 흘리는 충직한 심복이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최충헌이 초심을 잃고 점점 변해가자 그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하며, 결국 역사대로 노비들을 모아 '잃을것은 노비 문적이며 얻을 것은 천하다'라는 연설로 마음을 휘어잡고 거사를 계획했으나 순정의 밀고로 실패한다.

훗날 최충헌이 죽기 전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자신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도 언급된다.
  1. 이 말은 만적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중국 진나라 때의 진승 오광의 난 에서 진승이 이야기한 것이 유행어처럼 민중들에게 퍼졌고, 이것이 한반도로도 흘러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2. 사실 만적이 최충헌의 사노비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고려사에는 만적이 사동(私僮)이라고 기록되어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적이 고려사 열전 최충헌편에 있어서 최충헌의 사노비라고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