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씨 정권
4대 이의민5대 최충헌6대 최우

최충헌
崔忠獻, (1149 ~ 1219)

1 개요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다섯번째 집권자이자 권력 세습에 성공한 인물. 그리고 [1]의 대선배.(최순실 도?)

무신 집권자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자 무소불위 권력을 가졌던 그야말로 무신 정권의 정점에 오른 사나이.

고려의 무신이자 간신. 무신정권의 집권자.[2] 우봉 사람으로 초명은 최난(崔鸞), 생전에 진강후(晉康侯)에 봉해졌다.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냉정하고 냉혹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쿠데타의 동지들은 물론이고 동복형제인 최충수,[3] 외조카인 박진재를 비롯한 자신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할 기세가 있는 인물이라면 인척이라도 뒤도 안 돌아보고 무참하게 처단했다.

심지어 임종 직전에도 최씨 정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우에게 자기 사후의 일을 처리하는 법을 전달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었다.

공신 척결에서 이인자라면 서러운 조선 태종 이방원조차도 차마 자기 아들인 양녕대군 폐세자 만큼은 주저했는데 최충헌은 그런 거 없다. 임종 직전에 최향 보다는 최우가 최씨정권을 안정시킬 재목이라고 판단한 즉시 최우에게 모든 권한을 다 넘겨주고 최우에게 최향을 제거하도록 했다.

무신정권 집권자 중에는 아들인 최우와 함께 드물게 시호를 가지고 있는데 시호는 경성. 물론 받은 이유는 권세가 하늘을 가를 수준이라. 최충헌의 죽음으로 무신정권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이 시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4]. 거기다 최충헌이 죽는 1219년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49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의 무신정권 중 딱 중간.

2 성장과 순탄치 않았던 벼슬길

상장군인 최원호의 아들로 그의 외조부인 유정선도 상장군을 지낸 전형적인 무인 가문 출신으로 글을 배워 음서를 통해 문관이 되어 양온령에 임명되었으며, 성릉직, 위위주부 등을 거쳤다가 스스로 도필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흥위위 보승산원으로 옮겼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문관에서 무관으로 탈바꿈하였고 명종 4년인 1174년에는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부원수 기탁성에게 발탁되어 별초도령이 되었고,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본위별장으로 승진하였다. 1176년에는 지안동부사부사에 임명되면서 서리들에게 엄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관대하여 찰방사의 보고로 그 공이 으뜸이라 보고하였으며,[5] 임기가 끝나자 1180년에 응양부 섬낭장, 1181년에 응양부 진낭장에 임명되었다.

1187년에 경상진주도 안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권신의 뜻에 거슬려 탄핵을 받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이해에 용호군 섭중랑에 임명되었다가 1188년에 용호군 진중랑이 되었다. 1193년 겨울에 감문위중랑장 본위차장군이 되었다가 1194년에 섭장군이 되었다가 1195년에 □□좌우위정용 섭장군이 되었다. □□로 되어있는 것은 최충헌의 묘지에서 글자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으며, 아래에 나올 □□도 동일한 이유다.

3 병진정변과 집권

1196년 4월에 그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이 최충헌 동생인 최충수비둘기를 빼앗은 것이 계기가 되어 동생의 설득으로 동생인 최충수와 종친 노석숭, 생질인 대정 박진재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고 미타산 별장에서 이의민과 그 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최충수가 말을 타고 있는 이의민을 급습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는데 최충헌이 덤벼들어 칼로 베어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에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의민의 아들인 지광과 지영은 그 자리에서 잠깐 피했지만 결국 이들도 잡혀 죽는다.

이의민을 죽인 후 감문위 섭대장군에 올랐다가 좌우위를 거쳐 추밀원좌승선 지예부 겸 지어사대사 태자첨사에 임명된다.

3.1 비둘기 강탈 사건과 이의민 제거

한 나라의 권력 교체는 어처구니 없는 문제로 인하여 났다. 이의민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나쁜짓을 저질렀는데,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다짜고짜 뺏어간 거다.

고려사에는 워낙 기록이 간략하여 세부적인 정황을 알기 힘들다.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었다는 기록과 이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가서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말투가 무례해 이지영이 결박했다는 기록 등이 나온다. 끝내 최충수는 비둘기를 뺏기고, 심한 굴욕을 겪었다. 참고로 무슨 비둘기였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당시 무신들이 쓰던 연락용 비둘기(전서구)였다는 추측도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고려시대에 전서구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관상용 비둘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아무튼 이 일로 최충수는 형인 최충헌을 찾아가 반란을 모의했다.

다만 이것을 비둘기 탓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석하면 무리이다. 최씨들도 음서로 벼슬할 만큼 권위있는 가문이었는데, 그들의 재산을 함부로 뺏어갔으니 이의민 일가가 얼마나 앞뒤 안가리고 다녔는지 짐작 가능하다. 또한 이의민은 본래 천민이었는데, 천민 출신들이 귀족 출신의 무장들을 만만하게 보고 다녀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다라 쉽게 느낄 만하다.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무례하게 군 일도 한 시사점이다. 즉, 비둘기는 이의민 제거를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6]

비둘기 강탈을 명분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진짜 비둘기 때문에 분노했을 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권력자들이 키우는 비둘기는 보통 비둘기가 아니라 혈통 좋은 비둘기였고 이런 비둘기 한마리의 가격은 지금으로 따지면 고급 외제차 또는 서울 아파트 가격에 맞먹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급외제차를 강탈당한다면 적개심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말로 이의민을 없애려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면, 당연히 거사 직전까지는 수상한 낌새를 철저히 감춰야 하는데, 최충수는 비둘기를 뺏긴 것까진 그렇다쳐도 이지영의 집에 쳐들어가 대놓고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하는 찍힐 짓거리를 했다. 즉 거사를 준비하는 사람치곤 지나치게 경솔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비둘기 빼앗긴 게 원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최충수가 워낙 생각이 없어서 거사가 발각될 위험은 생각지도 않고 이지영의 집에 쳐들어갔거나(......)[7]

4 반대파 숙청

이의민을 죽이고 장군 백존유에게 이러한 사실을 얘기하면서 왕에게 죄를 청했다가 위로하자 대장군 이경유, 최문청과 함께 이의민의 남은 도당들을 칠 것을 청한다. 평장사 권절평, 그 아들인 장군 권준, 평장사 손석, 그 아들인 장군 손홍윤, 이들의 모의에 가담한 장군 권윤, 장군 유삼상, 어사중승 최혁윤 등을 체포하여 죽였는데, 이때 죽인 손홍윤의 처 임씨의 아름다움을 듣고 몰래 사통하였다.

대장군 이경유도 이들의 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지자 죽였으며, 상장군 길인, 장군 유광, 장군 박공습 등이 항전하자 직접 군사를 이끌어 무너뜨렸으며, 이들이 수창궁에서 항전하여 포위하자 유광, 박공습 등은 자살하였다. 수창궁에서 항전하기 전에 도망간 길인은 북산에서 중으로 변장하였다가 바위 아래로 투신하였으며, 상장군 주광미, 대장군 김유신, 대장군 권연 등을 죽였다.

그 밖에 참지정사 이인성, 상장군 강제, 상장군 문득여, 좌승선 문적, 우승선 최광유, 대사성 이순우, 대복경 반취정, 기거랑 최형, 낭중 문홍분 등 36인을 잡아 죽이면서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하였으며, 판위위사 최광원, 소경 권신, 장군 권식, 장군 두응용, 낭장 최비 등을 남쪽 변방에 귀양보낸다.

오로지 대장군 최문청만이 정직하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좌승선 문적의 처인 최씨가 남편의 시체를 찾아서 이고 가니 열녀라 칭송하면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많이 죽어 인심이 흉흉했기 때문에 사자를 각 도에 보내어 안심하도록 하였다.

5 명종 폐위

1196년 5월에 아우인 최충수와 함께 봉사 10조를 국왕인 명종에게 건의하였다.

봉사 10조의 내용
1. 왕이 머물던 별궁 수준인 수창궁 대신에 정궁인 연경궁으로 환궁할 것.
1.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관리들의 수를 줄일 것.
1. 불법적으로 탈취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환원할 것.
1. 불법적으로 세금을 함부로 징수하거나 세율 인상을 하지 않도록 할 것.
1. 왕실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무분별한 특산물 진상을 하지 않도록 할 것.
1. 승려의 정치참여 금지와 왕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할 것.
1. 지방관들의 향리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할 것.
1. 중앙 관료들의 사치를 금하고 근검, 절약을 장려토록 할 것.
1. 너무 많이 세워진 사찰들의 숫자를 줄이도록 할 것.
1. 언론기관인 대관의 역할을 강화하고 인물을 가려 등용하도록 할 것.

이게 제대로 시행되어 고려가 안정화 될 가능성은 당연히 0에 수렴했는데(굳이 따지자면 20%), 당연히 그 이유는 이 안건을 발의한 최충헌 때문으로 본인부터가 왕궁과 맞먹는 크기의 집을 짓고 교정도감이라는 기형적 기관을 설치하여 관리를 등용하며 정적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등 저 내용과는 매우 거리가 먼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단, 불교 문제(6번,9번)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저 내용을 지켰는데, 이는 지나칠 정도로 세력이 커진 불교계를 약화시키고 통제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을 유지해왔던 불교계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에는 어김없이 승려가 끼어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봉사 10조를 올린 뒤 본격적으로 국정개혁에 나서 권세를 업고 부당하게 승진한 내시 호부시랑 이상돈, 군기소감 이분 등 50여명을 쫓아낸다. 또한 소군(小君)으로 중이 된 왕홍기, 왕홍추, 왕홍규, 왕홍구, 왕홍각, 왕홍이 등 6명은 대궐 안에서 정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절에 돌아가게 하고, 명종이 총애하는 중인 운미, 존도 등도 본래 속해있던 절로 쫓아냈다.

이와 같이 개혁을 착수하자 좌승선, 지어사대사가 되고, 1197년에 충선좌리공신의 작호가 내려진다. 흥왕사에 가서 불상이 이룩된 것을 축하하려고 했지만, 흥왕사의 승통 요일, 중서령 두경승과 모해코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한다.

그러나 국왕인 명종이 봉사 10조를 이행하지 않자 아우인 최충수가 왕을 폐위할 계획을 제안하였고, 이에 제사를 지내어 하늘에 고한다. 그러나 이 날 저녁에 천둥, 번개가 치는데다가 우박이 내렸으며, 또한 폭풍이 불어 나무를 뽑고 담과 집이 무너졌고, 7일 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고 한다.

왕진의 여종을 사랑하여 이를 세우기 위해 최충수가 사공인 왕진을 옹립하자고 하였지만 자신은 국왕의 아우인 왕민을 국왕으로 세우자고 하여 의견이 갈리게 된다. 결국 박진재의 중재로 자신의 의견대로 왕민을 국왕으로 세우기로 한다.

1197년 9월에 명종 폐위에 반대할 만한 신하 중에 두경승을 붙잡아 자연도로 귀양보내고, 추밀원 부사 유득의, 장군 고안우, 대장군 백부공, 친종장군 주원적, 장군 석성주, 시랑 이상돈, 낭중 송위, 낭중 염극권, 어사 신광한 등 12인의 문무대신들과 대선사 연담 등 10여 명의 중들을 연달아 영남으로 귀양보낸다. 그리고 왕홍기 등 소군(小君) 10여명을 붙잡아 해도로 귀양을 보내며, 이후 명종을 쫓아내어 유폐하고 태자 왕숙, 태자비를 강화도에 쫓아낸 뒤 신종(왕민)을 옹립하게 된다.

6 끝없는 숙청

신종이 즉위하자 대중대부 상장군 □□, 겨울에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지주사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내시 민식 등 70인을 내쳤다. 민간에서 왕이 달애정의 물을 마시면 환관이 권세를 부린다고 하여 이를 무너뜨리고 광명사의 우물을 어수로 하였다. 신종에게 상장군 추밀원지주사, 정국공신(政國功臣) 삼한대광(三韓大匡) 대중대부상장군(大中大夫上將) 주국(柱國)에 임명되었으며, 추밀원사 최련을 성주에 귀양보낸다.

10월에 아우인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내려 하였고, 이를 말려 멈추게 하였지만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가 이를 말리는 어머니를 떠밀어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러자 분노한 최충헌은 조카인 박진재, 김약진, 노석숭과 함께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아우인 최충수가 이끄는 군사를 무너뜨렸다. 동생인 최충수는 임진강 이남으로 내려가 후일을 기약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쫓는 이에게 파평현(지금의 장단군) 금강사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이 공으로 지주사 지어사대사에 임명된다.

또한 1198년 5월에 노예인 만적과 그 일당이 반란을 모의한 것을 가노인 순정을 통해 알게된 율학 박사 한충유에게 그 사실을 듣고 이들을 잡아죽였다. 한충유를 합문지후에 제수하고, 순정은 노비에서 면하여 양민으로 삼았다.

1199년 김준거, 김준광 형제를 의심하여 각각 황주 목수, 상주 목수로 낮추으며, 6월에는 조정의 신하 30여명을 강제로 은퇴시켰다. 8월에 황주 목수가 된 김준거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항상 사냥을 일삼으면서 상주 목수인 김준광과 모의하였고, 또한 박진재의 문객이었던 신기지유 이적중이 김준거와 모의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황주의 백성들을 뽑아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개경에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김준거의 장인인 낭장 김순영이 이를 고하자 김준거를 잡아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그 처자들을 노비로 삼았다. 김준거의 아버지인 평장사 김영존은 늙었기 때문에 황려현으로 유배보내면서 어사중승 강순의, 내시 정공필을 보내 안변에서 김준광을 잡도록 시켰는데 정공필은 기은별감을 사칭하여 김준광이 이를 맞아들이자 체포하여 잡아죽이고, 도망가는 이적중도 잡아 죽였다.

이에 김순영을 장군으로 삼고 정광필 등 5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하면서 신종에게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었다가 병부상서 지이부사가 되어 문무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199년에는 삼중대광(三重大匡) 수대위상주국(守大尉上柱國)이 되었으며, 최충수의 사위인 조준을 호부시랑 우간의대부에 임명한다. 또한 1200년 12월에 경대승이 운용했던 사병집단인 도방을 부활시키고 도방을 육번도방으로 바꾸어 자신의 경호를 강화하였으며 추밀원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로서 경주별초군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해에 추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에 임명되었으며, 1201년에 내시 이부원외랑 노관과 함께 인물을 심사하여 관직을 배치하면 왕은 수락만 하고 2부의 판사가 살펴보기만 할 정도로 권세가 막강하였으며, 최충헌의 좌우의 부탁을 받거나 뇌물을 바쳐서 뜻에 맞는 자들은 모두 관직에 앉았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외가 친척인 노관을 총애하여 수 년도 되지 않아 이부낭중에 임명하거나 자신의 애첩인 월부를 통해 뇌물을 바친 충주 판관 최효기를 내시에 소속시킨 것이 있다.

그의 권세가 컸기 때문에 용호군졸인 중미가 최충헌이 보냈다고 사칭하면서 군사 도장을 이용하여 봉추의 일흥창에서 백성들을 침해하면서 마음대로 돈을 거두었다. 중미의 탐학질은 갈수록 심해져서 탄원서가 날아왔고 이 사실을 전해듣자 가구소를 통해 중미를 붙잡아 참수했다. 이후 최충헌 자신을 사칭하는 것과 내외에 3일 동안 군사 도장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였다. 빈객들을 인도하면서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맞아들이는데 그 자리가 매우 사치로웠다고 한다.

1201년 겨울에는 추밀원 이부상서 어사대부가 되었으며, 1202년 10월에 경주에서 반기를 들자 3품 이상의 문무관을 모아 의논하여 병부낭중 송효성, 형부원외랑 박인석 등을 보내 설득했으나 듣지 않자 대장군 김척후 등에게 이들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1202년에 수태부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었다가 중서시랑평장사 이부상서 태자소사에 올랐으며, 그리고 춘주에서 길이 험하여 고을 사람이 뇌물을 바치자 춘주를 승격시키고 안양 도호부로 삼았으며, 어느날 왕궁에 나가니 어사대의 관리가 영접하였다고 한다.

1203년 4월에 노비들이 나무와 풀을 베는 것으로 대오를 나누어 동교에서 전투 연습을 하자 이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였으며, 도망간 이들을 제외하고 잡은 50여 인을 고문하고 강에 던졌다. 1204년에 급사 동정 지구수의 집에 모여 무리 30여인이 자신을 죽이기를 모의하였다가 이 사실을 전해듣자 지구수를 잡아들이려고 했지만 놓쳤으며, 그 대신 지구수의 아우인 지구영을 붙잡아 주모자가 장군 이광실인 것을 알아내자 이광실을 해도로 귀양보낸다.

7 무신정권의 정점에 오르다

1204년에 신종이 동심좌명치리공신에 책봉하였으며, 신종이 희종에게 양위하자 그 해 겨울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를 더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가 되었으며, 또한 왕실 소유의 토지 100결을 하사받고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에 책봉되었다.

또한 문하시중에 임명되면서 진강군 개국후라는 작위를 받아 식읍 3,000호(최충헌의 묘지에서는 식읍 1,300호에 봉해졌다고 되어있다.), 식실봉 200호를 받았는데 희종에게서 항상 은문 상국이라 불렸으며, 작위만 공으로 받은 게 아니고, 1205년에 지금의 진주 지역에 진강부(흥녕부)를 설치해서 많이 털어먹으면서 관복이 아닌 평상복으로 황궁을 무상으로 출입하였고 행차할 때는 일산을 받치게 하였다.

내전숭반 우광유를 권지합문지후로 삼았고, 성랑(省郞)이 남반의 관원이라는 이유로 관례에 맞지 않다고 하여 서명하지 않자 나라의 사신을 독단으로 응대한 재능이 있다고 제수한 것이라 하여 서명하게 만들었다. 이 때 희종이 중서령 진강공에 임명하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206년에 중서령 상주국 판이부사가 되고, 진강후에 봉해졌다.

1207년 5월에 조카인 박진재가 대장군이 되어 자신을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한 시도를 하자 그를 붙잡아 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린 뒤 벽령도로 귀양을 보냈고, 그의 문객 중에서 사나운 자는 먼 섬으로 나누어 유배보냈다. 희종이 최우의 저택에서 거처를 옮기자 어가를 맞이하여 활동(闊洞)의 저택을 바치자 왕족과 고관들이 이를 보고 다음날에 파하였는데 매우 사치했으며, 희종이 격구를 관람을 할 때 온갖 물품을 받았다. 이 때 진강공에 봉해졌다.

1208년에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고 1209년 4월에 청교역리(靑郊驛吏) 3인이 최충헌 부자를 죽이려고 하여 거짓으로 공첩을 만들어 승려들을 모았고, 귀법사의 중이 공첩을 가진 사람을 잡아 이 사실을 알리는 등 살해 미수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무신들의 의결기관인 중방을 유명무실화하고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별감을 설치하여 그들의 당을 수색하였다.

청교 사람이 우복야 한기를 무고하자 그와 세 아들을 죽이고, 장군 김남보 등 9인을 죽이고 종자는 먼 섬에 나누어 유배보냈다. 이 때 설치한 교정별감은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희재찬화협보익량공신에 봉해져서 식읍이 13,000호에 이르렀다.

1210년 3월에 익명서를 통해 직장동정 원서가 재상 우승경과 함께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원서를 문초하였다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유익겸이 벌인 소행이라 하자 서초(書草)를 찾아내어 유익겸을 섬으로 귀양보낸다.

일찍이 최충헌이 활동(闊洞)에 집을 지어놓고 집 100여채를 헐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 대궐과 비슷하였으며, 별당을 짓고 십자각이라 하였는데 토목공사가 심하여 나라 안에서 불평이 많았다.

남자 아이, 여자 아이를 잡아 오색 옷 입혀놓고, 네 모퉁이에 묻어놓으면 집 기운이 없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러한 말이 떠돌자 아이를 가진 자를 이를 숨기거나 무뢰배가 아이를 잡으면 그 부모가 놀라서 뇌물을 줘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이에 어사대를 시켜서 방문을 붙여놓는다.

인간의 목숨은 귀중한 것인데 땅에 묻어서 재앙 따위가 없어지겠는가. 아이를 잡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을 잡아오도록 하여라.

라는 내용을 붙여서 소문이 약간 없어졌다.

노인우가 거짓으로 미친 척 하여 직언을 하자 인주 수령으로 낮추었으며, 이후 노인우가 임기가 다 차서 왔을 때 집 세 채에 금옥, 전국 등을 왕부에 바쳐서 국가에서 사용하는 것에 돕자고 하였다. 이 때 노인우가 남겨서 경비에 쓰면서 백성에게 거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부끄러워 하였다.

그렇게 권력을 부리던 와중에 1211년 12월에 수창궁에 나갔다가 국왕인 희종이 내시낭중 왕준명을 중심으로 참정 우승경, 추밀사 사홍적, 장군 왕익 등과 함께 최충헌을 암살하려고 했다. 희종은 내전으로 들어갔으며, 내시부의 관원이 최충헌의 종자에게 분부가 있어서 음식을 하사한다고 속여서 좁온 마루로 유인한다.

갑자기 10여명이 최충헌의 종자 여러 명을 공격해서 죽이자 깜짝 놀라 희종에게 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쫓기다가 지주사방의 지장에 숨어서야 그들이 찾지못했다. 뒤늦게 지유 신선주, 지유 기윤위, 상장군 김약진과 도방이 달려오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암살이 미수에 그치면서 상장군 정방보에게 지시하여 사약 정윤시 등 내시를 잡아 가두고 문초하여 주모자 왕승경을 비롯하여 우승경, 사홍적, 왕익 등을 알아내어 이들을 외지로 귀양보낸다. 또한 국왕인 희종을 폐위하여 강화도에 유폐시켰다가 자연도로 옮기고, 태자 왕지는 인주, 덕양후 왕서는 교동도, 시령후 왕위는 백령도에 추방하였다.

희종의 뒤를 이어 한남공이었던 명종의 아들인 강종(왕정)을 즉위시켜 옹립하자 1212년 1월에 흥녕부를 진강부라 고치면서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에 책봉되었다. 강종의 뒤를 이어 1213년에 그의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하였으며, 장군 이광유를 보내어 자연도에 있는 희종을 교동도로 옮겼다. 이 때 별장을 옮겼는데 창검을 든 경비병이 수 리에 가득차면서 조신들 중에 따르는 이가 많았다. 처음으로 첨서 추밀원사 금의, 추밀원 부사 정배보 등이 이를 따라갔다고 한다.

1215년에 단오날에 백정동궁에서 그네를 매어넣고, 4품 이상 문무 관원들을 초청하여 3일간 잔치를 하였다. 중방과 장군방에 행차하면 반드시 화려하게 꾸며놓고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며, 그가 돌아갈 때도 화려하게 하였다.

7.1 긴 것으로 유명해진 관직명에 대해서

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대략 '벽상삼한' '삼중대광' '개부 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병부 어사대 판사' '태자태사' 정도로 끊어서 읽으면 된다.

- 벽상삼한은 삼한벽상공신을 의미한다. 왕건이 신흥사를 세우면서 거기에 공신당을 세우고, 건국초기에 활약한 공신들을 공신당 벽에 그림으로 그렸는데[8],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이 삼한벽상공신이다. 당연히 최충헌 이전 시기까지는 살아서 받은 인물이 없다. 근데 최충헌이 뭘 잘했다고 이 칭호를..
- 고려 문산계 정1품 품계이긴 한데, 이것도 원래는 정식 품계가 아니다. 박술희 등의 개국공신들이 죽은 다음에 추존하고, 이후 고려는 정1품직을 비워버렸다. 그래서 고려의 수상인 중서문하시중이 종1품이다. 때문에 최충헌 이전에 산사람으로 벽상삼한과 삼중대광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충렬왕 시기에 삼중대광을 정식 품계로 도입했고, 벽상삼한도 붙였다가 떼었다를 반복했는데, 이는 최충헌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의동삼사는 '삼사' 즉 한나라 시대 삼공과 같은 지위라는 의미로 최상급 품계로 혹은 대광이라고도 불린 직위이다. 개부는 의동삼사에 막부를 열 수 있는 권리를 더한다는 의미[9]로, 개부가 붙으면 일반 의동삼사보다 한단계 높은 격이다. 후에 고려시대 말기가 되면 '의동삼사'가 정1품 관직이 된다. 최충헌 이전에도 내릴 수 있었던 관직중에서 최상급 직위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신라나 고려왕들이 중국에서 받은 가장 일반적인 관직명이 바로 개부의동삼사이다.
- 수는 고려시대에 관직을 겸직시킬 때 붙이던 접두어이다. 태사는 원로대신들에게 내리던 종1품 관직으로 왕의 고문직인 삼사(三師)[10]중 가장 높은 지위이다.
- 원래는 문하시랑과 동중서문하 평장사인데 합쳐서 하나의 관직명이다. 문하시랑은 바로 고려의 수상이었던 중서문하성의 장관인 문하시중을 문종 시기에 이름을 바꾼 것이고, 동중서문하평장사는 당나라 이래의 재상직으로 송나라 시기에도 명목상 재상직은 동중서문하평장사였다. 이후에는 합쳐서 문하시랑평장사라고 해서 하나처럼 사용된다. 혹은 문하시중을 종1품, 문하시랑평장사를 정2품으로 보기도 하는데, 겸직이 넘쳐났던 고려시대에는 그냥 대부분 겸직했다. 실질적인 문관직중 최고위관직이었다.
- 고려는 문관직과 무관직이 있는데[11], 문관직의 실질적 최고위직이 종1품 문하시중이라면, 무관으로 이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 정3품 상장군이다. 고려시대 중앙군인 2군 6위의 장들을 상장군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대장의 위치이고, 상장군들과 대장군들이 모이는 중방이 합참의 역할을 하고, 특히 응양군의 상장군이 현재 대한민국으로 치면 합동참모의장 역할을 하게 된다.
- 관직에는 품계, 실제 직위, 그리고 명예직인 훈직이 있는데, 관직에 붙여서 부른다. 당나라 시기부터 송대까지 쓰인 훈직에 상주국과 주국이 있는데, 상주국이 더 높은 지위이다. 고려 문종이 상주국을 정2품 취급을 하였다. 신라와 고려왕들에게 중국이 내린 관직이 개부의동삼사라면, 여기에 흔히 따라붙는 칭호가 바로 상주국이었다고 하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의종이 금나라에게 받은 칭호가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고려국왕'이었다.
- 판사는 해당부서의 최고위직이라는 의미이다[12]. 상서성의 6부중 병부의 수장이 바로 판상서병부사[13]인데 상서성은 떼고 판병부사라고 하거나, 혹은 판사를 뗴고 병부상서라고도 불리는 직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 어사대 역시 상서성 아래에 있는 관직인데,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하는 일종의 독립관청이다. 즉 판어사대사는 현대로 따지자면 감사원장이다.
- 말 그대로 태자를 교육시키는 가장 높은 직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온갖 좋은 건 죄다 짬뽕시킨 최충헌의 권력욕을 알 수 있다. 이론적으로 얻을 수 있는 관직은 전례를 무시하고 다 얻어낸 것으로, 위치상 최고위직은 물론이고 병부와 어사대, 태자교육 같은 꼭 필요한 부분은 실무직까지 가져갔다. 고려시대 관직의 특징이 겸직[14]이긴 하지만 산 사람은 가진 적이 없는 품계를 챙겨간 것을 보면 그 위세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최충헌도 이렇게 긴 관직명이 불편했는지, 나중에는 그냥 은문상국(恩門相國)[15]으로 줄여서 불렀다고 한다. 솔직히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님, 인사 올립니다."라고 말하다가 숨 넘어갈듯

8 거란의 공격

1216년 8월에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는데 스스로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변방에서 보고한 자가 있으면 귀양을 보냈다. 이 때문에 변방의 장수들이 해이해져서 보고하지 않았고, 거란이 개성까지 공격하면서 인심이 모두 최충헌을 원망하였다.

삭주 분도장군 이지영이 사망하자 그의 기생인 자운선을 첩으로 삼았으며, 인구를 계산하여 공물을 더욱 징수하는 것이 이지영보다 심하였는데 이에 흥화 운중도에 많이 살던 양수척(楊水尺)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에 양수척들이 거란군에게 항복하여 길을 안내하면서 기생의 무리와 순천사의 주지를 죽이면 나라를 돕겠다는 익명서를 보내자 최충헌은 기생인 자운선, 상림홍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세도를 믿고 방자하게 굴던 순천사의 주지는 도망갔다.

장수를 보내어 거란군을 막게 했는데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의 문객이라 관군은 약했으며, 집의 병사들을 사열하면서 창 끝에 은화를 매달아놓아 나라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군사를 모집하였다. 문객들 중에서 관군에 종군하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먼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싸움 연습을 보았는데 문의 계단이 높고 험하여 말이 오를 수 없자 사람으로써 말 형상을 만들면서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여 싸우게 했다.

또한 거란의 장군을 사로잡으면서 금패를 찬 형상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베어버리고 군사를 개선하게 하였다. 또한 기생들을 시켜 봉래산의 선녀가 와서 하례하는 형상으로 만들어놓고, 이를 즐거워하여 은화, 명주, 비단 등을 상으로 주었다.

평주에서 거란 군사 2인을 잡아보내자 거란의 군사가 이 달 그믐달에 개성을 치겠다고 실토하였으며, 이를 듣고 선주 충위를 시켜 군사를 정돈하면서 수 만의 군사들에게 자신과 아들인 최우를 호위하게 하였다. 자신의 집에 군사들을 배치하면서 경계하였고, 거란군이 가까이 오자 백관에게 명령하면서 성을 지키게 하면서 성 밑의 집들을 허물로 도랑을 파게 하였다.

1217년 1월에 최충헌을 따라 종군한 흥왕사, 홍원사, 경복사, 왕륜사, 안양사, 수리사 등의 중들이 최충헌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거짓으로 도망가면서 거란병이 왔다고 알리면서 문지기 56인을 베어 죽였다. 이들은 낭장 김덕명의 집을 허문 후 최충헌의 집으로 향하였지만 최충헌의 군사들이 이들을 추격하고 300여 명의 중을 베고 이들을 사로잡았으며, 이들을 문초하니 중군 원수인 정숙첨이 관련되어 있었다.

성문을 닫고 도망간 승려들을 찾아내어 모두 죽였으며, 중 300여명을 남계사 냇가에 베어버렸다. 시체가 매우 많아서 몇 달 동안 사람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거란병은 선의문에 이르러서 황교(黃橋)를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9 말년

1218년 1월에 낭장 김덕명이 풍수에 따라 강종의 능을 개장하는 것을 고하자 명령을 내려서 날짜를 받으려고 했다. 사천대(司天臺)가 의심하여 점을 치지 않자 판사 최계량을 고란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어서 대장군 이부를 섬으로 귀양보냈다.

고종이 아들인 장군 최향 및 장군 신선주, 장군 기윤위, 장군 박세통, 장군 최준문 등에게 쌀, 명주, 비단 등을 주자 군사들을 모아 주었는데 기윤위의 군졸이 이유없이 고함을 질렀다는 이유로 자기 마음대로 명령하여 주는 것을 중지하였다.

옛부터 도목정사는 연말에 하는 것인데 전쟁 때문에 돈으로 벼슬을 구하는 자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거란군을 핑계로 날짜를 미루었다. 1218년 정월에 도목정사를 열고 뇌물을 받아 벼슬을 주었으며, 거짓으로 늙었다는 이유로 정사에 물러나려고 하는 것을 고종이 그 뜻을 알아채고, 궤장을 주고 나와서 정사를 보게 하였다.

아들인 최항을 시켜서 사졸들에게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으며, 낭장 대집성 등 5인을 차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대집성은 거느리는 군사가 없었기 때문에 승려, 노예를 불문하고 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하여 크게 요란하자 이를 듣고 노하여 관직을 빼앗았다.

1219년 3월에 고종에게 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때마침 조충이 거란을 격파하고 돌아오자 이를 시기하여 군공을 논하는 것을 주관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지 않았다. 6월에 낭장 기인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죽였으며, 7월에 조충에게 상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교위 손영 등 10인이 탄식하였고, 주위 사람이 이를 고하자 이들을 잡아죽이고 동류 백 여인을 베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1219년 9월, 칼로 흥한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라도 하듯 7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그는 왕씨 성을 되돌려 주면서 죽기 전에 고종에게 궤장(几杖)을 반납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선행을 베풀었지만 큰 틀에서 나라가 달라진 건 없었으며, 죽을 때는 하루 종일 풍악을 울리게 하고는 노래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최충헌의 치밀한 성격은 죽기 직전에도 잘 보여줬는데, 최충헌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직감하고 아들 최우를 불러서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불순한 모의를 하려는 자들이 있을 거다. 너는 오늘부터 문병을 끊어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결코 부르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고 최우는 그렇게 하기로 했으며, 사위인 김약선에게 자신을 문병하게 하였다.

최충헌의 말대로 그가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반란 음모가 싹텄고, 그 중에 최준문이라는 이가 있었다. 최충헌의 노비 동화가 마을 사람들과 많이 사통하자 이를 희롱하면서 누구를 남편으로 삼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공생 최준문을 얘기하니 그를 종으로 부리다가 대정에 제수하여 대장군에 이르러 최충헌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총애받은 대장군 최준문과 함께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 등이 자신들이 최우에게 숙청될 것이라 여겨 최우가 최충헌의 문병을 오는 틈을 타서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우는 부친이 위중한데도 문병 한 번 오지 않자 김덕명이 최우에게 이 계획을 발설하였으며, 음모자들은 최우를 찾아가서 그에게 "아버님께서 위중하셔서 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라는 전갈을 전했다. 최우는 대뜸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보내어 도중에 최준문을 죽여버렸으며, 이는 앞에 나온 최충헌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에 한 일로 죽은 뒤의 일까지도 생각했던 최충헌의 치밀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자식으로는 상장군 송청의 딸과 결혼하여 최우, 최향 등을 낳았으며, 임씨에게서 최성, 왕씨에게서는 최구를 낳았다.

10 사후

김준최의를 살해하여 최씨정권을 붕괴시킨 후 공신전에 있던 공신화상은 제거되었고 묘정에 배향되어 있던 위패 또한 철거되었다. 그의 무덤은 기록이 없고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우봉 최씨가 전국에 300명이 채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충헌 가문은 거의 멸족된 것으로 추정된다.

11 왜 왕을 못했는가? (혹은 안 했는가?)

100여년 뒤에 위화도 회군을 거쳐 실권을 다 장악했었던 이성계와 비교해도 최충헌의 권세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비롯한 최씨정권의 후계자들은 결코 왕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바로 새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명분을 세워줄 엘리트 집단인 동조세력이 없어서였다.[16]

무신 정권으로 문벌 귀족들이 작살났으나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최씨 집권기 때에는 무신 가문들과 혼인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세력을 복원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들은 고려라는 틀을 지키기를 바랐지 새 왕조 개창을 바라는 집단은 아니었다.

이들이 완전히 몰락함은 대몽항쟁을 지난 간섭기 때로, 이 시기에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이었던 토지(장원)가 몽땅 작살나고 원 간섭기 때는 권문세족들에게 실권을 몽땅 빼앗기면서 사라져갔다. 문벌 귀족이 사라짐은 무신 정권 이래로 외척이 못 나왔던 탓도 있다. 원 간섭기엔 아예 왕비는 원 황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그 자신의 '군사력'이었으되, 단순히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올라간 것이 아닌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으로서의 면모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바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의 동조가 있었다.

이 신진사대부들은 신돈성균관을 부활시키면서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과는 달리 훈고학이 아닌 성리학을 바탕으로 자란 집단이었다.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도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친원파가 본격적으로 득세하자 정계에서 밀려났다. 최충헌이나 최씨 정권 집권기와는 시기적으로 꽤나 거리가 먼 상황.

이 신진사대부들이 본격적으로 고려를 버리고 새 왕조 개창을 주도함도, 바로 공민왕 - 우왕 초기에 권문세족과의 싸움에서 철저하게 져 더 미래가 안 보여서였다. 결국 그들은 요동정벌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외줄타기를 하던 이성계를 골랐으며, 막연하게나마 야심이 있었지만 아이디어가 없던 이성계는 이들과 결탁하여 고려를 무너뜨렸다.

사실 종합적으로 따지면 당시 최충헌을 비롯한 무신 집권자들은 왕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문신들은 본래 자신들의 적이나 다름없고, 무신 내부에서는 뒤통수를 칠 놈들이 쌓인 데다가 그나마 전부가 자신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반란은 허구헌날 일어나고, 외부로는 거란이나 몽골이 쳐들어오는데 자기들 권력 건사하느라 제대로 막지도 않고, 덕분에 민심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기었으니..게다가 심심하면 홍건적, 여진족,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이 이어지고 왕실과 정부가 민심을 상실한 고려 말기와는 달리 무신정변 이전의 고려 전기는 권력집단 내부의 불화지배층의 사치와 향락이 있다 해도 대부분의 지방 호족이나 백성들 입장에서는 불안정하지만 나름 그래도 멀쩡히 돌아가던 나라를 웬 힘만 잘 쓰는 놈들이 권력을 잡는답시고 피바람을 불러일으켜서 아예 지옥으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즉 명분이나 기반 자체가 없는 무신 집권자들로서는 왕을 하고 싶어도 실제로 그랬다간 순식간에 끔살당하거나 나라가 쪼개질 판이었으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 무인시대 마지막회처럼 자기가 왕을 해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한 꿈을 접어 권세에 취한 늙은이로 바뀐 것이 아니라, 무신정권의 정점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그 방법을 빼면 별다른 길과 비전이 없어서였다. 무인시대 마지막회는 정말 최충헌이 젊은 시절에 왕에 올라 새 왕조 개창의 꿈을 꾸었다보기보단 지난 시절에의 후회라고 봐야 맞다. 젊은 시절에 생각한 개혁을 저버리고 추악해지기보단 차라리 그렇게 해야 더 나았으리라는 것.

12 대중매체에서

12.1 무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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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갑수씨가 분하여 열연을 펼쳤다. 배우의 전작 중 하나였던 태조왕건종간이 보여줬던 얼음같이 냉혹한 모습에 최충헌 특유의 광기어린 모습까지 더해지니 가히 최강의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전체적인 흐름은 난신적자를 처단하고 고려의 광영을 되찾겠다며 일어선 젊은 장군이 자신이 멸하려 했던 추악한 난신적자로 변모하는 모습. 극 초반에는 주정뱅이 노릇을 해서 안동 김씨 가문을 안심시킨 대원군에게서 모티브를 딴 듯, 뇌물을 바치고 술자리에서 난동을 부리며 이의민의 의심을 없애고 소인배로 보이게끔 하여 속여넘긴 뒤, 위례성 부근에서 몰래 군사를 조련하여 끝내는 미타산으로 내려간 이의민의 목을 베고 권력을 쟁취한다.

특히 자신을 질타하는 황후에게 "신은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다"라는 대사를 칠 때의 카리스마는 전율이 일 만큼이며 자기를 죽이려 한 희종을 폐위시키고 황제의 옥좌에 앉아 크게 웃는 모습은 절대 권력자의 포스를 제대로 보여준다. 만적의 난을 진압한 직후 체포된 만적이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말을 마치고 처형된 후 시신 처리 방법을 묻는 장수에게 천노는 사람이 아니다. 불에 태우는 다비도 말 것이며 땅에 묻어 거름으로 쓰지도 말거라! 강물에 수장하여 물고기 밥이 되게 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잔혹함을 드러낸다. 아들인 최우의 장인으로 극중에서는 희종의 친위쿠데타를 가장 먼저 눈치채고 원군을 보낸,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숙첨, 이의민 토벌에 힘을 보탰던 양수척 출신의 기생 자운선 등을 가차없이 토사구팽하는 장면은 냉혹함도 보여준다.

여하튼 그 포스는 말년의 모습까지 쭉 이어진다. 자신의 동지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도 늘 '거병의 대의'를 운운하지만, 실상은 권력의 단맛에 점차 취해가면서 권신으로 바뀌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니 문제다. 끝내 157화에서 젊은 날의 이상은 다 내다버린 채 고종이 하사한 궤장과 왕씨 성을 받고는 황제께서 나를 부친의 예로 대하신다! 나는 이제 최충헌이 아니라 왕충헌이다라며 낄낄대며 좋아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화에서 쓰러져서 혼수상태의 꿈 속에서조차도 궤장을 찾아 헤메며 궤장이 없으면 조정에서 물러나야 하느니...안된다! 궤장, 궤장을 찾아야만 한다라며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도 권력을 탐하는 모습, 궤장을 찾으니 좋아하며 세월도 병마도 내게서 천하를 뺏어갈 수 없음이야, 이 나라는 내 것이다. 고려의 주인은 바로 나 최충헌이란 말이다라며 낄낄대다가 나타난 최충수와 박진재의 환영을 보고는 벌벌떠는 모습, 늙어 죽기 직전의 최충헌이 젊은 날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훌륭한 대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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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중 대사 -

늙은 최충헌 : 누...누구냐....?
젊은 최충헌 : 문하시중, 날 알아보시겠소이까?
늙은 최충헌 : 아..아..아.. 아니, 넌...? 넌..?
젊은 최충헌 : 그렇소, 내 황실의 권위를 바로세우고 난신적자들의 전횡을 척결하여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거병을 하였던 최충헌이오.
늙은 최충헌 : ...당치도 않다! 내가 최충헌이거늘, 네놈이 어찌 나를 참칭하는 것이냐?
젊은 최충헌 : 노인장께서는 최충헌이 아니오이다.
늙은 최충헌 : 뭐..뭐라? 내가 최충헌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젊은 최충헌 : 노인장은 한 줌도 안되는 권세를 움켜쥐려는 야심 때문에 거병의 대의를 배신한 후안무치한 죄인이오이다. 두 분 황제를 창검으로 폐위시킨 대역죄인이오이다. 조정과 군부를 움켜쥐고 황실을 겁박한 난신적자이오. 고통받는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은 탐욕스런 권신이오이다. 나라의 존망이 위급에 처한 전란 중에도 자신의 권세만을 지키려던 소인배이오이다! 노인장은 최충헌이 아니라 이 나라 황실과 백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늙은 난신적자일 뿐이오이다.
늙은 최충헌 : 다..당치도 않다! 내 구국의 결단으로 금강야차를 척살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금강야차의 반역에 무너졌을 것이다! 내 나라를 위한 대의멸친의 피를 토하는 충정으로 충수, 진재를 다 베었다!최충수, 박진재: 개소리 집어치우시오! 또한 내 지난번 전란 중에 황도를 지키지 않았다면 이 나라의 황실과 사직은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혀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 네놈이 어찌, 네놈이 어찌 나를 질타하는 것이냐!
젊은 최충헌 : 임종을 앞두고도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하다니 참으로 가련하구려.
늙은 최충헌 : 뭐..뭐..뭐라...?
젊은 최충헌 : 노인장, 금강야차 삼부자를 척살하였을 때 최충헌을 환호하던 백성들의 뜨거운 함성을 잊으셨소이까? 내 그 때 황실과 조정을 모조리 도륙내고 스스로 황제의 용상에 앉았어야 했소이다! 나 최충헌이 황제가 되었다면 거병의 초심을 내던져버리고 충의로 결의를 맺었던 거병의 동지들을 무참히 참살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내 문신귀족들과 결탁하여 황실을 겁박하고 굶주린 백성들, 만적이 같은 천노들의 열망을 짓밟는 더러운 난신적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이다. 비록 천명을 거역한 대역죄인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처형을 당했을지언정 권세의 단맛에 취한 병약한 늙은이로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이오이다!
늙은 최충헌 : ......!
젊은 최충헌 : 내 세월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스스로 황제에 올라 거병의 대의를 이룰 것이거늘...... 참으로, 원통하구려... 원통하구려... 참으로 원통하구려...

무인시대는 이 한 장면으로도 명작이라 부를 만하다.그리고 뒷날(?) 김춘추도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멘탈갑이라서인지 끝까지 안 무너지고 버티다가 비꼼을 들었다.

여담으로 젊은 시절 경대승과 만난 적이 있다. 최충헌은 경대승에게 고려를 백성을 위하는 나라로 만들려면 그가 조정 영수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당연히 경대승은 거절했다. 또 경대승이 "자네의 대의가 황상 폐하의 뜻을 거스른다면 어쩌겠나"라 묻자 "황제를 폐위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겠다"라 했다. 그 말을 듣자 경대승은 최충헌에게 절대 정치를 해선 안될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권력을 잡은 뒤인 최충헌의 행보를 생각하면 사실상 예언과 같은 말이었다. 사실 이 때도 최충헌의 나이가 더 많았지만 경대승의 지위가 더 높은데다가(경대승은 장군이고 최충헌은 응양군 낭장이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토벌하기 직전에서야 경대승 이상의 지위를 갖는다.) 사실상 정권의 수장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깎듯이 대한다.

또한 무인시대 집권자들 중 유일하게 자신을 3인칭화하는 말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는 거병의 대의를 내세우면서도 권의 의식과 자의식을 우회적으로 표출하는 수단으로써 후일 자신이 젊은 시절에 품었던 대의가 변질된 독재자가 될 미래를 나타내는 복선으로 해석될 수 있다. 권력에 방해가 된다면 황제 폐위는 물론이고 동생과 생질까지 처단하는 냉혹한 모습은 위와 같은 심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냉혹함 때문에 무인시대 집권자들 중 유일하게 암살 또는 요절당하지 않고 절대 권력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그럼 우린 냉혹하지 않았단 말이냐?

12.2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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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의 전 사극 무신에서는 충공깽한 소개가 나왔다. 사극 무신의 행보가 의심스러워지는 부분이다. 원래 이환경 작가가 나오면 다 저 모양이 된다. 본편에서는 장기덕후(…)로 나오며 드라마에서 지루한 부분이 최충헌이 나오는 분량 전부라는 악평도 나오는 상황. 무인시대에 나온 말년의 최충헌과는 거리가 먼 모습인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무인시대의 최충헌은 극을 이끌고 가는 주연 최충헌인데 반해 무신의 최충헌은 극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 있는 조연 최충헌이라서 당연히 묘사 자체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한국 드라마에서 주역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게 더 힘든 일 아닌가? 그것도 더 예전 드라마에서(...) 하지만 너무나도 늙어버린 독재자 캐릭터를 연기한 주현의 포스와 아우라는 대단했다.

실제로는 외침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도 안 썼고 오히려 국경 지대 지휘관들이 공격의 징후를 알려오면 이를 씹거나 보고한 자를 파직했던 게 최충헌인데, 뜬금없이 몽골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준비해둔 자료가 있다며 최우에게 전달한다. 이후 그 밀지가 몽골에 대한 자료가 아닌 자신의 서명만이 적혀 있는 내용이라는 게 밝혀지지만….


그리고 14화에서 마침내 대형 사고를 쳐버렸다. 최충헌의 죽음을 무슨 위인급 인물이 죽는 것처럼 폭풍간지로 치장한 데다가 최충헌 사후 그의 치세를 평가하면서 개혁 정치를 시도해 나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는 드립에 뒤지는 날 술판 벌인 걸 가지고 보기 드문 사내다운 호방한 면모라는 드립까지. 나라가 망해가는데 주지육림을 벌인 은주왕도 호방해서 그랬나 보다.주무왕: 뭣이라?!

12.3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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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17]

코에이의 푸른 늑대와 흰 사슴 4(징기스칸 4)에는 시나리오 1에서 등장하는데 시나리오 1이 시작하는 1189년은 사실 이의민 집권기. 명종의 휘하로 있는데 정변으로 명종을 쫓아낸 것을 반영했는지 충성도가 심각히 낮다. 능력치는 한글판에서는 정치, 전투, 지모 순으로 각각 64, 64, 61. 일본어 원본에서는 전투와 지모는 똑같지만 정치가 61이다. 병과적성은 보병, 궁병, 기병, 수군 순으로 각각 B, C, D, C이며 특기는 건설, 등용, 화공 특기를 소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최충헌의 메리트는 역사대로 긴 수명.

제법 쓸만한 장수로 고려로 플레이하면 초반에는 거의 고려의 밥줄이다. 플레이시 당장 연회로 충성도를 올려주자. 또한 등용 특기가 있기 때문에 히라이즈미 정권에서 무사시보 벤케이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뽑아오기에 좋다. 반대로 생각하면 충성도가 낮기 때문에 금이나 남송, 일본으로 플레이하면 간첩질로 빼 오기 쉽다. 등용 특기를 이용해서 인부를 끌어모으거나 건설 특기를 사용하여 가도 만들기 인부로 쓰기 좋다. 도시의 영주를 맡기기 딱 좋은 능력치와 특기를 가지고 있다.

컴퓨터가 고려를 담당할 시 (설정된 수명이 짧은) 명종이 일찍 죽어버려 최충헌이 고려의 수장이 되어 진짜로 '최씨왕조'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종종 발생한다. 흠좀무 사실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해도 본의아니게 최씨 왕조가 될 수도 있다. 플레이어의 경우 담당한 왕이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면, 그 즉시 게임오버가 뜬다. 이 때문에 1시나리오 고려를 선택하면 어떻게든 후계자를 생산하는게 명종의 최대과업이 되는데, 재수가 옴붙으면 공주만 성년(8세)이 된 상황에서 명종이 급사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왕자 뿐만 아니라 사위의 경우도 후계자가 될 수 있는데, 고려에서는 첫 공주와 결혼시킬 만한 인물이 외부 장수를 특별히 끌어오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는 최충헌 정도가 고작이 된다. 그래서 첫번째 공주와 결혼해서 사위가 된 최충헌만이 후계자인 상황에서 명종 급사=최충헌 왕위등극이라는 루트를 타버리는 것이다. NPC의 경우도 명종이 남자 후계자를 생산하지 않은 상황에서 급사[18]까지는 진행되는데, 이 때 최충헌이 사위가 아니더라도 NPC국가를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그나마 가장 능력치가 높은[19] 최충헌에게 왕위를 넘겨버리는 것이다.

원조비사에서는 일판, 한국판 양쪽 다 등장한다. 정치고문인데 능력치는 정C전C지B매D. 무신정권을 연 사람치고는 매력이 많이 낮지만 체력이 14라 그럭저럭 괜찮다. 단 정치고문은 정치력이 B 미만이면 도움이 안되니 정치력이 좋은 장수를 영입하는 즉시 정치고문을 교체하고 일반 장수로 쓰는 편이 낫다.

12.4 다음웹툰 무장

다음웹툰 무장에서 고려의 무신집권자 최충헌이 등장한다.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집권자로 등장 권세를 탐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더 이상 탐할 권세도 없다..;; 상당히 카리스마 있으며 신료들과 고종을 압도하는 위엄을 보인다.
  1. 최충헌을 시작으로 최씨정권 4대 세습 60여년, 김일성에 김씨조선 3대 세습 60여년 이상으로 둘 다 왕을 칭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왕의 위치란 점과 민심을 무시한 정권 유지가 최우선이란 점에서 매우 닮아있다. 그러면 안되지만 김정은 사후 자식이 이을 경우 4대 세습까지 닮게 된다.
  2. 고려사, 고려사절요, 기타 국내외 역사서에서도 그를 반역 열전이나 간신열전으로 포함되는데 더불어 조선 후기에 갈수록 사림들이 최충헌을 역적이라고 비방하고 규탄하게 두고두고 까는 이유는 임금 폐위와 패륜 그리고 다수의 악행 때문이다. 더불어 외국 사서에도 마찬가지이다.
  3. 다만 최충수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게 형이나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고 했는데 이를 만류하는 어머니를 밀어서 넘어뜨리기까지 했다. 어머니를 밀어 넘어뜨린거야 그렇다고 쳐도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고 한것은 이의방이 그 짓 하다가 죽은걸 생각하면 처벌받을 일이기도 하다.
  4. 다만 무신정권 전체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의민까지를 형성기, 최씨 정권을 안정기, 최의의 뒤를 이은 김준부터를 붕괴기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최충헌은 형성기를 끝내고 안정기를 수립한 인물이 된다.
  5. 다만 최충헌 찬양 일색인 최충헌묘지명의 내용이라 신뢰성은 떨어진다.
  6. 고려사의 이의민 열전과 최충헌 열전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에 최충수가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을 없애겠다란 뜻을 밝히고 바로 얼마 뒤에 이의민 일파가 제거를 겪는다. 즉 '도저히 못 참겠으니 군사를 준비하자!'라기보다 사극 무인시대처럼 일찍부터 이의민을 제거하러 준비했으며, 비둘기 사건은 빌미에 불과하다고 봐야 자연스럽다.
  7. 결국 진실은 최충수 본인만이 알겠지만, 최충수가 훗날 반역자로 규정되어 죽는 바람에 열전도 자세히 작성되지 않았던지라 현재로선 알 방법이 없다.
  8. 이는 당나라의 능연각훈신을 연상시킨다.
  9. 진짜로 일본 막부 같은거 생각하면 안되고 원수부 같은 의미이다
  10. 태사, 태부, 태보
  11. 다만 이건 둘 다 품계상으로는 문산계에 포함된다.
  12. 판사의 바로 아래가 지사로, 병부판사의 아래라면 병부지사가 된다.
  13. 상서성에 있는 병부의 최고위 관직이라는 의미
  14. 중서문하성은 직위를 가지고, 상서성이 실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양자를 겸직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고위관료는 관직명이 상당히 긴데, 그래봤자 실무직은 하나 둘 정도이다.
  15.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신하가 아닌 상국(국가의 큰어르신)현실은 무신정권에 고려 말아먹은 주범으로 대접한다는 호칭.
  16. 비슷한 경우로 청나라 말기의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었다가 3개월만에 쫓겨난 예를 보았을 때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게다가 최충헌을 비롯한 무신정권은 민심 장악에 있어서도 막장이었으니...
  17. 그런데 남송이종과 동일한 얼굴이다.(...) 그나마 이게 비스코 정발판에서 새로 추가된 것이고, 원판 파위업키트에선 아예 클론무장 얼굴로 뜬다.(...)
  18. 명종의 자연수명이 짧게 설정되어 있어서 평균적 자손생산 설정으로는 남자후계자가 태어나서 8세가 되기전에 명종이 사망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19. 징키스칸 4에서 신분은, 국왕>왕자>왕족=사위>동향>타향 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