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나리토시

森成利
(1565년? ~ 1582년 6월 21일)

일본전국시대 때의 무장으로 나리토시라는 이름은 시호이며, 나가사다(長定)라고 불리는 또다른 시호는 관정중수제가보에 기록된 것이다. 나가야스(長康)라는 설도 있지만 활약 당시의 문서에서는 나리토시이다.

아명은 란(乱), 란마루(蘭丸), 란포시(乱法師) 등으로 일반적으로는 모리 란마루(森蘭丸)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사료에는 모두 란(乱)으로 기록된 걸 보면 란(蘭)이라는 문자가 들어간 것은 후세의 창작으로 보인다. 본 성은 미나모토 씨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모리 요시나리의 3남이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그와 중도 관계를 가지면서 우대를 받았다거나 요시나리를 대신하여 노부나가가 양부 역할을 했다는 설[1] 등이 있으며, 란마루라는 이름은 노부나가의 시동을 맡았을 때 물려받은 이름으로 그 전의 시동에게도 란마루란 이름을 내려준 것으로 보아 노부나가가 대대로 시동에게 붙인 이름으로 추정된다.

1582년 다케다 정벌에 공헌했다고 하여 미노 국의 이와무라 성(카네야마 성의 성주라는 설도 있음)의 성주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에 혼노지의 변 당시 노부나가의 명으로 혼노지에 불을 지른 후 아케치 미츠히데군의 진입을 막다가 야스다 사쿠베에란 무장에게 살해당한다.

현대에 나오는 창작물에서는 주로 노부나가가 가장 가까이 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당시 여러 지역이나 정계에서는 그다지 인식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중대한 임무도 맡겨지지 않았으며, 노부나가 휘하에서 활동한 기간도 2년 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18, 19세였기 때문에 에도 시대 이후의 창작이나 모리 가문의 선전이라는 얘기가 있다.

노부나가와 얽힌 그에 대한 일화가 세 가지가 있다.

어렸을 때 귤 광주리를 나르고 있었는데 노부나가가 이를 보고 무거워 보이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지만 바로 넘어져서 노부나가가 웃었는데, 노부나가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넘어졌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외출하다가 돌아올 때 란마루에게 문을 닫고 오지 않은 것 같아서 닫고 오라고 하자 확인하니 닫혀 있었으며, 란마루는 일부러 문을 열었다가 소리가 들리도록 닫았다고 한다. 란마루가 돌아오자 노부나가가 문이 열려있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란마루는 닫혀 있었지만 노부나가님이 열려있다고 하여 문을 다시 열어 모두에게 소리가 들리도록 닫았다고 했다.

노부나가가 란마루에게 천하에 대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고 얘기하자 란마루는 시라타카냐고 물었다. 노부나가는 생물이라고 대답하면서 란마루는 자신이냐고 반문하면서 대답하자 노부나가가 웃었다고 한다.

란마루는 노부나가가 아끼던 후도 유키미츠라는 단도를 하사받았는데, 혼노지의 변에서 란마루가 죽고 난 이후에는 코쿠라 번(小倉藩)의 오가사와라(小笠原) 가문이 입수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개인소장품이다.

창작물에서는 주로 모리 란마루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그 외에도 란마루라는 이름으로도 나온다. 대개 쇼타 속성을 지닌 어린 미소년으로 등장.
  1. 모리 요시나리는 시바타 가츠이에보다도 먼저 노부나가를 섬긴 최고참 가신이었고, 노부나가가 가장 힘들었던 노부나가 포위망 시기에 지원이 끊긴 최악의 상황에서도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에게 필사적으로 맞서다 전사한 충신이어서 노부나가가 그의 전사 소식에 매우 애통해했다고 한다. 즉, 가신의 자식이지만 양부 역할을 기꺼이 맡을 만한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