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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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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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장한 무라타.

요미우리 자이언츠 No.25
무라타 슈이치 (村田 修一)
생년월일1980년 12월 28일
국적일본
출신지후쿠오카
포지션내야수
투타우투우타
체격177cm 92kg
프로입단2002년 자유획득제도[1]로 입단
소속팀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3~2011)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2~)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야구 선수.

10여년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주력 타자로 활약하다가, 2011년 오프에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서 뛰고 있다.

2 선수 생활

2.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고교 시절에는 팀의 에이스 투수이자 고교 통산 30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하지만 고시엔 대회에서는 대회를 씹어먹던 초고교급 괴물 마쓰자카 다이스케에게 투수전 끝에 패배했고, 본인 말로는 이 경험이 타자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니혼대학 경식야구부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입단한다. 입단 첫 해인 2003년에는 본 포지션인 3루수가 아닌 2루수로 출발했는데, 3루 자리에는 팀에서 밀어주는 또다른 거포 유망주인 후루키 카츠아키[2]가 있었기 때문이다. 타율은 낮았지만 장타력을 앞세워 가능성을 보여줬고,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후루키를 외야로 밀어내고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첫 해 성적은 0.224 25홈런 56타점.[3]

하지만 이후에는 공수 양면에서 부침을 겪으며 발전이 없는 모습을 보이다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각성, 이 해 0.266 34홈런 114타점의 호성적을 거두며 리그 정상급 3루수로 거듭나게 된다. 2007년에는 36개의 홈런을 쏘아올리며 아론 가이엘, 타카하시 요시노부, 타이론 우즈(이상 35홈런)를 제치고 첫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올랐고, 2008년에는 구단 신기록인 4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2년 연속 세리그 홈런왕에 등극했다. 홈런과 더불어 타율(0.323), 출루율(.397), 장타율(.667), OPS(1.062) 모두 커리어 하이였다. 말 그대로 몬스터 시즌.

2009년에는 부상에 신음하며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하는 와중에도 팀 내 최다인 25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2010년과 2011년에는 풀타임을 소화하고도 각각 26홈런, 20홈런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다. 2011시즌 후 무라타는 FA를 선언했는데, 이미 1년 전 우치카와 세이이치를 놓친 요코하마는 무라타만큼은 어떻게든 잔류시키려 애를 썼지만 결국 무라타는 요코하마에서 활동하며 5할승률이 넘은 적도 없었으며 우승을 원한다는 말과 함께 2년 5억 엔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FA 계약을 맺고 팀을 떠나게 된다.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30홈런 100타점을 노린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이적 첫 해인 2012년 성적은 0.252 12홈런 58타점의 저조한 성적을 냈는데, 특히 12홈런은 데뷔 이후 가장 적은 숫자였다. 통일구 반발계수 논란 등으로 인해 아무리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기대 이하의 성적. 대신 리그의 3루수 경쟁자들도 싸그리 망하는 바람에(...)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수상했고, 팀이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면서 그토록 원하던 우승반지도 득템했다.

2013년에는 0.316 25홈런 87타점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모처럼 이름값을 했고, 2년 연속 베스트나인 수상과 더불어 생애 첫 골든글러브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시즌 후 요미우리와 3년 10억 엔에 연장 계약을 맺었다.

2014년에는 통산 300홈런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정규시즌 성적은 0.256 21홈런 68타점으로 기대 이하였고, 리그 최다인 22개의 병살타를 기록하는 등 중심타자로서 제몫을 하지 못했다. 2015년에는 부상 때문에 규정타석도 채우지 못하고 0.236 12홈런 39타점으로 사실상 커리어 로우를 찍었다.

3 이모저모

2005년 시즌 중 심한 부진으로 타순이 점점 내려가면서 결국 9번 타자로 기용되었는데, 당시 요코하마 감독이었던 우시지마 카즈히코[4]는 시합 전에 무라타를 불러 "9번 타자의 다음은 뭐냐?" 라는 질문을 했다. 이 때 무라타는 별 생각 없이 "1번 타자입니다"정답!라고 대답했는데, 이에 감독은 "멍청아! 그 다음은 없어!"[5]라고 일갈했고, 이것을 계기로 무라타의 타격이 살아났다고 한다. 무라타 왈 "생사를 걸고 쳤습니다."라고...(...)

조지마 겐지처럼 호탕함을 어필하는 규슈 사나이. 인터뷰 등에서도 스스로 "사나이 무라타"(男村田)라고 칭하면서 각오를 다질 때가 많다. 그리고 부진하면 "소녀 무라타"(乙女村田)라고 까인다[6]

명선수들의 은퇴경기를 망친 전력으로 유명하다(...). 200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전 에이스 사사오카 신지의 은퇴 시합에서 본인의 홈런왕 타이틀을 확정짓는 홈런을 쳤고[7], 2010년 한신 타이거즈의 주전 포수였던 야노 아키히로의 은퇴경기에서 후지카와 큐지에게 역전 홈런을 때려내며 은퇴경기의 당사자인 야노가 출전조차 하지 못하는 사태를 만들어냈다.[8] 보통 이런 경기에서는 보기 좋은 장면을 만들어주기 위해 약간은 설렁설렁 플레이하는 것이 일본프로야구의 불문율과 같은데, 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검승부를 함으로서 그들의 마지막길에 예우를 표하는 자세로 시합에 임한 것이라지만 유종의 미를 볼 것을 기대하고 경기를 보던 해당 선수들의 팬들에게는 그저 멘탈붕괴를...이건 뭐 강커태도 아니고 그래도 2007년 진구구장 야쿠르트전에서 스즈키 켄의 선수 인생 마지막 타석에서는 평범한 3루 파울플라이를 일부러 흘리며 스즈키가 계속 타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스즈키 켄은 결국 15구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중전 안타를 만들어 내며 은퇴 경기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1. 상위지명후보 선수가 희망팀을 선언, 우선 교섭을 할 수 있었던 제도. 2006년에 폐지되었다.
  2. 무라타와 동갑(80년생)이지만 이쪽은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2군 본즈. 뛰어난 장타력을 갖고 있었지만 막장 컨택과 선구안, 수비의 종합선물세트도 가지고 있었기에 프로에서 자리잡지 못하였다. 나중엔 격투기 선수로 전향해 경기를 가진 적도 있는 기인.
  3. 이 시기 요코하마는 내야를 중심으로 우치카와 세이이치, 무라타, 후루키 등 양질의 타자 유망주들이 존재했다. 다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수비능력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내야수비의 축이었던 베테랑 유격수 이시이 타쿠로만 죽어라 고생했다는 후문이 존재한다.(...)
  4. 주니치 드래곤즈, 롯데 오리온즈에서 활약한 투수 출신.
  5. 9번 타순에서도 못치면 그땐 주전 자리는 없다는 의미
  6. 男은 오토코, 乙女는 오토메라 읽는다.
  7. 사사오카는 다음날 진구구장에서 열린 후루타 아츠야의 은퇴경기인 야쿠르트전에서 후루타와의 맞대결을 위해 한 번 더 등판하기는 했다만... 어쨌든 그 날의 주인공은 사사오카가 아닌 후루타다.
  8. 자세한 상황은 후지카와 큐지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