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카즈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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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FC No.11
미우라 카즈요시
(三浦 知良 / Kazuyoshi Miura)
국적일본
출신지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생년월일1967년 1월 26일
포지션스트라이커
177㎝ / 72㎏
프로 입단1986년 산투스 FC 입단
소속팀산투스 FC (1986)
파우메이라스 (1986)
SE 마츠바라 (1986)
CRB (1987)
XV 지 자우 (1987~1988)
코리치바 (1989)
산투스 FC (1990)
요미우리 SC (1990~1992)
베르디 가와사키 (1993~1994)
제노아 CFC (임대) (1994~1995)
베르디 가와사키 (1995~1998)
GNK 디나모 자그레브 (1999)
교토 퍼플 상가 (1999~2000)
비셀 고베 (2001~2005)
요코하마 FC (2005~ )
시드니 FC (임대) (2005)
에스폴라다 홋카이도[1] (임대) (2012)
국가대표89경기 55골
1993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김주성(대우 로얄즈)미우라 카즈요시(베르디 가와사키)사에드 알 오와이란(알 샤바브 FC)

1 소개

일본의 현역 축구선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고, 49살인 현재도 아직 현역으로 요코하마 FC에서 뛰고 있다. 2015년 계약을 또다시 연장하여 한국 나이로 지천명이 되는 2016년까지 그라운드를 밟게 되었다.

J리그 최고령 출전선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2],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고 2014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홍명보 감독보다 무려 두 살이 더 많다!! 도대체 언제까지 현역으로 뛸 건지…….(관련 기사)

2 클럽

1986년에 브라질로 축구유학, 일본의 브라질 유학 1세대이다. 브라질 프로팀에서 4년간 뛰다가 J리그가 출범하자 1990년 일본에 돌아왔다. 이후 요미우리 FC에 들어갔다. 이후 이 팀은 이름이 베르디 가와사키로 바뀌고 90년대 최고의 명문구단이 된다. 1994년에는 세리에 A팀인 제노아 CFC에 영입되지만 첫 경기인 AC 밀란 전에서 밀란의 수비수 프랑코 바레시와 충돌하여 코뼈가 골절되는 불운을 겪었고, 최종 성적 23경기 출장 1골 1도움으로 별 활약을 못 펼친 채 일본으로 돌아왔다. 다시 1995부터 다시 베르디 가와사키에서 뛰었다. 이후 크로아티아 리그(1998), 호주리그(2005)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결국 해외에서는 별 활약을 펴지 못했다. 그리고 교토 퍼플 상가비셀 고베를 거쳐 2006년부터는 요코하마 F.C에 있다. 체력적 한계인지 2010년에는 10게임밖에 출전 못했다.

2016년 홈경기에서 최고령득점을 갱신하고#, 그 뒤로도 계속 갱신하고 있다#.이러다 환갑까지 가는거 아니야?ㄷㄷㄷ

3 국가대표


일본 대표팀이 공한증을 벗어나 거의 대등해진 1990년대 부터는 일본 국가대표팀의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전에서 후반 15분에 터진 미우라의 결승골로 일본은 9년 만에 한국을 꺾었다. 현재 중국보다 더한 공한증에 시달리던 일본은 이것으로 징크스를 확실히 깬 것이다(9년간 A매치는 2무 7패). 그래서 일본은 최초로 월드컵에 자력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한국은 거의 탈락을 예상하고 있었으나…한국이 북한전을 기대 이상으로 잘 뛰어 3점차 이상으로 이긴데다 일본이 종료 30초 전 이라크에게 골을 먹고 비기는 바람에 일본은 최종예선 3위로 탈락하고,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 2장은 한국과 사우디가 나눠가졌다. 당시 전성기였던 미우라에게는 이것이 천추의 한이 되는데, 그 이후 월드컵에는 한번도 출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도 활약하면서 일본대표팀의 사상 첫 본선행을 이끌었으나, 오카다 타케시 감독은 본선 엔트리에서는 미우라를 제외시켰다. 비록 미우라의 폼이 예전만 못했던 건 사실이었지만[3] 어쨌든 일본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의 본선 엔트리 탈락을 두고 일본 내에서는 너무했다는 얘기가 많았고, 한국에서도 미우라가 본선 엔트리에 빠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의견도 많았다.[4] 때문에 감독과의 불화설도 잠시 떠돌았었는데, 이유야 어쨌든 결국 일생일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도 '불러주기만 하면 반드시 참가한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50에 가까운 나이인지라 꿈이었던 월드컵 본선 출전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2012년에 열린 풋살 월드컵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면서 간접적이나마 소원 성취(…).
1993년 당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좌절시킬 뻔한 골의 주인공이었기에 한국 팬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으나, 세월이 많이 지난데다가 결과적으로 일본은 예선탈락하고 한국은 본선진출했기에 그러한 감정도 많이 희석되어 지금은 한일전을 장식했던 추억의 선수 중 한 명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오히려 50이 다 된 나이에 아직도 현역으로 뛰냐며 놀라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

도하의 비극이 일어나고 1년 후, 미우라는 대한민국과 다시 한 번 만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축구 8강전에서 선제 골을 넣으며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일본은 난타전 끝에 2골을 넣은 황선홍대한민국에 3:2로 패해 8강에서 탈락했다. 당시 일본은 미우라 카즈요시와 이하라 마사미가 골을 넣었다.

4 여담

  • 유니폼의 이름은 클럽, 국대를 막론하고 KAZU라고 표시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골 세리모니 카즈댄스도 있는데 이건 브라질의 삼바댄스를 따라한 듯 하다.
  • 브라질에서 10년 가까이 지낸 덕에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브라질 영주권도 계속 가지고 있는데, 영주권 갱신을 위해 2년에 한 번씩 브라질을 방문한다고 한다.
  • 90년대 중반 SBS에서 방영하였던 애니메이션 태풍의 그라운드(원제 : 골 필드 헌터)는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팀은 시미즈 S펄스 소속으로 나온다. 저작권 개념이 엄격했던 일본이지만 J리그 출범 초창기라 홍보 차원에서 특별히 실제 팀 이름을 쓰는 것을 허가했다고 한다. 그 밖에 주요 인물들도 J리그 선수들을 모델로 만들었었다. 또한 미우라 카즈요시-야스토시(형) 형제가 아예 실명으로 등장하는 KAZU & YASU 영웅탄생(カズ アンド ヤス ヒーロー誕生)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 90년대 한일전이 한창 흥하던 시절 그와 라이벌리를 이루던 선수가 최영일(現 동아대학교 감독). 최영일이 만사 제쳐두고 미우라를 그림자처럼 맨마크하는 장면은[5] 당시 한일전의 재미 중 하나였다. 훗날 최영일은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현역으로 뛰는 미우라에게 찬사를 보냈고, 미우라 역시 악착같이 자신을 마크하는 최영일이 자신에게는 기량 향상을 위해 노력하게 해 주는 자극제 같은 존재였다며 코멘트하기도 했다.
  • 그가 교토 퍼플 상가에 있을 때 박지성이 입단, 짧은 시간이지만 같은 팀 동료로 뛴 적도 있었다. 박지성이 자서전 등에서 술회하길 처음엔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인 스트라이커고, 일본 내에서 축구 영웅으로 불리는 존재이기에 다가가기 쉽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친절하고 프로다운 태도 때문에 그런 편견은 금방 씻을 수 있었고, 덩달아 존경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박지성이 교토를 떠나 유럽으로 진출한 후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며, 미우라는 2011년 6월에 벌어진 박지성 자선 축구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반대로 미우라 본인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하는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후 거물급 선수가 된 박지성이 휴식차 한국에 들렀다는 소식을 들은 미우라가 전화해서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오히려 박지성이 반가워하며 그 다음날 선물을 싸들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온 것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고 한다.
  • 친형인 미우라 야스토시는 현재 J2리그의 카탈레 도야마의 감독을 맡고 있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동생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그도 불혹을 앞둔 나이까지 오랫동안 현역을 유지했던 자기관리가 뛰어난 선수였다. 한때 야스토시가 감독을 맡고 있던 도쿄 베르디로 동생 카즈요시의 이적설이 나돌 때, 형제가 한 팀에서 각각 감독-선수로 뛰는 전무후무한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는 장훈이 2부 리그의 개념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축구에서 2부 리그 소속 클럽들은 각자 팀 내 최정예 선수들을 구성하여 1부 리그 승격을 위해 사활을 건다. 그리고 이런 2부 리그 클럽들도 2군 팀은 따로 갖고 있다. 당장 대한민국 프로축구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1부 리그 클럽들과는 별개로 2군 팀과 유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J2리그도 마찬가지. 유럽으로 확대해보자면 잉글랜드 4부 리그 프로 클럽들도 각자 2군 팀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잉글랜드 풋볼 리그 챔피언십은 빡빡한 일정과 높은 수준으로 웬만한 국가 리그 1부를 넘어설 정도로 치열하다.
장훈의 발언으로 인해 일본 축구계는 격분했다. 이 발언은 축구를 넘어, 일본 프로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를 말도 안되는 논리로 비난한 것이며, 일본프로축구의 수준을 폄하한 것이기 때문. 나아가 일본 프로스포츠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아무리 일본에서 존경받는 야구원로라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 "당장 발언 취소하라'는 격한 반응이 일고 있다. 평소 J리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국내 축구팬들도 장훈이 도대체 누군데 망언을 하냐(...) 라며 미우라를 옹호했다.[6]
하지만 정작 미우라 본인은 장훈 같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더 열심히 하란 소리로 알겠다라며 센스있게 받아쳤다.[7] 나중에 장훈은 이런 미우라의 반응을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부상 없이 건강히 뛰길 바란다는 덕담을 남겼다.
  1. 풋살 클럽. 잠시 풋살선수로 뛸 때 소속됐었다.
  2. 현재 역대 최고령 현역이므로 시합에 출장할 때마다 기록 경신이 계속되고 있다.
  3. 사실 예선 초반에는 팀의 주공격수이자 주축으로 큰 역할을 했으나 도쿄대첩 당시 한국의 최영일이 담당마크한 이후 묘하게 폼이 확 죽어버렸다(...) 이와 관련해서 최영일과 그에 대한 여러가지 썰들이 한국 올드축구팬 사이에서는 잔잔히 화제가 됐었다.
  4. 심지어 "일본은 영웅을 가질 자격이 없다"라는 논설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참고로 월드컵 본선에서 일본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나선 건 나카야마 마사시와 조 쇼지였는데, 나카야마는 예선 마지막 경기인 자메이카전에서 골을 넣으며 일본 대표팀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조 쇼지의 경우 대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역시 미우라를 데려갔어야 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5. 미우라는 그림자처럼이 아니라 그림자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6. 사실 국내 축구팬들은 예전부터 일본인 선수더라도 미우라에겐 존경을 표해왔다.
  7. 참고로 미우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랜 팬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