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해전

이순신의 전투 목록
적진포 해전
(1592년 5월 8일)
사천 해전
(1592년 5월 29일)
당포 해전
(1592년 6월 2일)
5월 29일 맑음

(중략) 적의 무리는 두려워 물러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인지 그 수를 알 수 없고 그 가운데 많은 수를 목잘랐다. 군관 나대용이 총환에 맞았고, 나 역시 어깨를 관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사부와 격군중에서도 총환에 맞은 자가 많았지만, 적선 13척을 불사지르고 물러나 주둔했다.
ㅡ 《난중일기

사천 해전(1592년 5월 29일)
</br>돌격하라, 귀선이여
</br>피와 눈물의 전장에서
</br>조국을 수호하라
</br>고통을 전복시키고
</br>강한 승리를 일구기 위해
</br>ㅡ 불멸의 이순신 사천 해전 예고1, KBS

목숨이 지나간 자리
</br>피와 살이 허물어져도
</br>흐르지 않는 중심
</br>나를 일으키는 힘
</br>다른 길은 없다, 오직
</br>이겨야 한다, 지켜야 한다
</br>ㅡ 불멸의 이순신 사천 해전 예고2, KBS

파일:Attachment/64304451 2 99 20140616105503.jpg
일본의 책 <조선정벌기>에서 묘사된 사천 해전 때 부상을 당하는 이순신. 어깨에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한 태도였다는 징비록을 좇아 묘사된 그림이다.

사천 해전
날짜
1592년 음력 5월 29일 (양력 7월 8일)
장소
조선 경상도 사천 앞바다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쇼쿠호 일본
지휘관충무공 이순신
원균
권준
무의공 이순신
정운
이영남
송희립
나대용
어영담
김완
한백록
이언량
이기남
기효근
신호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유키
카메이 코레노리
병력거북선 2척,판옥선 26척전선 13척 병력 불명
피해 규모중상 3명, 충무공 이순신 부상전선 13척 격침
2,600명 전사
결과
조선 수군의 결정적 승리
일본군 전투의지 상실[1]

1 설명

이순신 함대가 두 번째로 출전해 치른 첫 해전이다.

전투로는 1592년(선조 25) 5월 7일부터 8일까지 치른 세 번의 해전에 이어 네 번째이다.같은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치러졌다. 함대 규모는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정예함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의 함대 3척(...) 등 총 26척이다.

이순신 함대에는 새로 창안된 전함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사천포 해전이 처음이다.

2 사천해전

1차 출동 당시 옥포 해전, 적진포 해전 등을 치른후 일본 수군은 이전에 치러진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이순신은 6월 3일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출동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적선 10척이 사천을 출발해 노량으로 향했다."라는 공문을 띄우면서 이순신은 이틀후인 5월 29일 노량(露梁)에 도착, 원균이 이끌고온 판옥선 3척(...)과 함께 연합해 사천으로 향했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중이었던 이순신과 원균 연합 함대는 사천 선창으로 도망치는 왜군 척후선 1척을 발견,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선창에는 왜군 대선 12척이 매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아군 함대는 작전상 후퇴하며 적군 일부를 먼 바다로 유인하였다. 왜선이 아군의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 따라오자, 이순신 함대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다시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이순신은 아군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들여보내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총통과 각종 함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에 놀란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해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조가 되었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포구에 도착한 판옥선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자, 왜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수많은 왜군이 죽고, 포구에 있던 왜선 가운데 10척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나머지 2척은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갈 때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 둔 채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함대를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로 옮겨 그 곳에서 밤을 지냈다.

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왜군 패잔병은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해전에서 왜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아군 측은 이순신의 군관인 나대용과 봉사벼슬을 했던 종군장수 이설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부상인원 세사람 모두 기함에 승선해 있던 지휘관들이다. 이는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사거리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사거리에 들어갔던 것은 임진왜란 전 해전중 사천해전을 제외하면 단 두차례.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뿐인데, 명량해전때는 조선수군이 절대적인 열세였었고, 노량해전때는 진린제독이 포위된 상태라 구하려고 돌격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참전했던 절대우세 상황이었다.

당포파왜병장(사천 해전에 관한일도 보고되어 있다.)에서는 '그 가운데는 간혹 우리나라 사람들도 저들과 섞여서 쏘았으므로 신은 더욱 분하여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대목이 있다. 그 외에도 거북선이 첫 출전이라 좀더 가까이서 지휘를 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음은 이순신이 1년 후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이다. 볼드체로 표시된 문구를 보아 이순신 자신도 당시를 몹시 후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살피지 못한 동안 기운은 어떠하십니까. 전일 두번이나 주신 글을 받고 나아가 뵙고 겸하여 적을 토멸할 계책도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접전할 때에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총알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흐르기 때문에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또는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실 날이 언제인지요. 나라일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는데 병이 이와 같아서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할 따름입니다. (후략)'

3 성과

사천해전은 이순신이 치른 다른 해전과 마찬가지로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해 그 성능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북선은 각종 함포로 무장한 최전방 돌격선으로서 적선 격침은 물론,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거북선은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상징하는 전선으로 위용을 떨치게 된다.

4 미디어에서의 모습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67회 후반 ~ 68회에서 나왔다. 대체로 실제 역사상의 기록과 대부분 비슷하게 나왔으며 충무공이 부상으로 물러나자 거북선단이 출격해서 왜군을 쓸어버린다. 전투가 끝나고 어깨에서 총알을 빼내는 고통을 참는 김명민의 연기가 매우 일품이다. 무엇보다도 만용을 부리던 원균을 이순신이 다쳐가면서까지 구해주면서 상찌질이 원균(...) 인증을 했다.

다만 실제 역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이순신이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는 오류가 나왔다. 실제 역사에서는 왼쪽 어깨에 총상을 당했다. 그리고 왜군들이 거북선 위로 도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분명한 것은 거북선 위에 무수한 쇠못들이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이게 뻔히 보였을 텐데도 그냥 뛰어들어 손과 배를 찔리는 건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기록에는 풀잎 등으로 못을 가렸다는 내용이 있지만, 여기선 대놓고 다 보였다.

임진왜란 1592에서는 첫회가 바로 이 사천해전.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타났던 도선 장면은 없고. 거북선의 활약과 장사진이 펼쳐진 이후 전투 양상을 잘 표현했다. 특히 최근 학설인 곡사 사격이 아닌 직사 사격으로 왜선을 요격했을 것이란 설을 적극 수용해 거북선이 돌격 후 장사진-사실상의 단종진-으로 적진을 횡단하면서 일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양상으로 표현했다.

5 참고 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임진장초(壬辰狀草)』
  • 『징비록(懲毖錄)』
  •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참모본부 9, 1924)
  1. 부산과 거제도로 도주하여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