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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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인 페트로프.
페트로프의 현역 군인 시절의 사진.
컴퓨터의 오류인 듯하다

-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1 개요

진정한 의미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소비에트만이 아닌 전세계의 영웅이자 문자 그대로 잿더미가 될 뻔한 세상을 구한 사람.

Станислав Евграфович Петров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1939년생. 前 소련 방공군 장교이며, 최종 계급중령.

1983년 당시 우발적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려 인류를 단숨에 석기시대로 돌아가게 만들지도 모를 최악의 사태를 막아낸 영웅이다. 그의 판단이 아니었다면, 인류역사는 1983년 9월부로 정지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픽션 속 이야기들이 현실로 나타났을 것이다.리얼 폴아웃?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 사람에게 한 번 목숨을 빚진 셈이다.

2 인류를 구한 판단

1983년 9월 26일 0시, 갑자기 소련의 핵전쟁 관제센터에서 비상경보가 울렸다. 인공위성으로부터 "미국ICBM 1발을 소련으로 발사했다"는 경보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발사한 ICBM의 숫자는 5발로 늘어났다.

그 때 당시는 당장 핵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EE이라고 비판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9월 1일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했으며, 소련은 자국이 격추시킨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미 공군의 전략정찰기로 의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NATO는 1983년 11월 2일부터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을 골자로 하는 '에이블 아처 83(Able Archer 83)'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대규모 군사훈련을 핑계로 서방 측이 대대적인 기습 선제 핵공격을 펼 가능성은 충분했고, 소련은 그럴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며 맞대응하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지병으로 오늘내일 하고 있던 시점[1]이라 지휘권의 공백 문제 때문에 소련 지도부의 신경은 더 날카로웠다. 그해 여름 훈훈한 무드 아래서 진행됐던 미국인 소녀 서맨사 스미스의 소련 방문이 무색했다. 서맨사의 방소로 훈훈했던 분위기는 유리 안드로포프의 건강 악화 및 KAL기 사건으로 극히 심각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핵미사일 발사 경보까지 나오자 관제센터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소련의 모든 핵미사일 사일로와 이동식 발사대에 경보가 걸렸고, 당시 관제센터의 당직이었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핵전쟁의 모든 권한을 졸지에 떠안게 되었다. 당시 크렘린과의 통신라인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지구 최후의 날 기계가 아직 페트로프에게 발사 권한까지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체판단 하에 직접 발사 개시 명령을 내리거나, 서기장에게 따로 지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적국의 핵미사일 발사 여부를 감시하는 소련의 최신식 탐지용 인공위성을 담당하고 있었다. 반격에 관한 상세한 고찰을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겨우 몇 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핵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상부는 전적으로 그의 판단을 믿었을 가능성이 컸다.

경보는 울리고 있었고, 그의 눈앞에서는 핵전쟁 개시 버튼이 깜박거렸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판단력으로 만약 미국이 정말로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모든 ICBM을 함께 발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는 겨우 5개의 ICBM만 잡아냈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 컴퓨터의 오류이거나 탐지용 인공위성의 판단오류일 것이라 결론짓고 핵전쟁 취소코드를 입력한 다음,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컴퓨터의 오류인 듯하다."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한 줄의 문장이 전 인류의 생명을 구했다.

몇 시간 동안 긴장감에 감싸인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핵미사일 발사 경보는 인공위성이 햇빛을 ICBM의 발사 섬광으로 잘못 인식해서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직후 페트로프는 영웅으로 칭송받아야 마땅했으나 소련 군부는 그것을 1급 비밀로 분류하고 그를 한직으로 내쫓았다. 왜냐하면 시스템의 결함은 곧 소련 체제에 대한 모욕이므로 그걸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내린 판단이 얼마나 도박성이 짙었는지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인공위성이 핵미사일을 탐지했던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하나의 미사일이 탐지되자 소련 관제센터에서 이 경보가 오류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다. 고작 미사일 하나가 날아온다고 해서 핵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신중히 움직여야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네 발의 미사일이 추가로 탐지되었다. 지상 레이더는 지평선 너머까지 탐지를 못하니 지상 레이더가 다음 미사일을 탐지할 때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미국이 전면 핵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 확실한지 알아내기 위해 다음 핵미사일이 탐지되는 것만 기다리다가, 자칫 먼저 날아온 진짜 핵미사일이 자국 영토에서 폭발한다면 소련군은 그대로 큰 피해를 입은 채 핵전쟁에 돌입하기 때문이었다. 레이더에 탐지되는 미사일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런 판단을 하려면 어렵다.

오히려 소규모의 선제 핵공격 도중에 적국의 고고도 상공에서 핵폭발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EMP 효과가 적의 통신망 및 레이더망을 마비시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소위 '블랙아웃' 작전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페트로프는 핵미사일 탐지 시스템의 안정성 문제가 이미 제기된 적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2가지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소련은 이 시기에 이미 지구 최후의 날 기계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중앙과의 교신이 어떤 이유로건 두절하고 일정 기간 내에 복구하지 않으면 그 때부터 전쟁은 컴퓨터가 알아서 수행하게 만들었다.

3 근황

제대 후 그는 모스크바 근방에서 군인연금을 받으면서 생활 중이지만, 소련이 사라진 뒤에도 일급비밀로 취급받던 해당 사실이 1998년에 드러나면서 전세계에서 그를 칭송하고 고마워했으며, 그는 세계 시민상과 유엔의 표창장을, 2012년에는 드레스덴 상[2]을 수상했다.

페트로프는 2004년에 모스크바 뉴스를 통해 밝힌 회고에서 1983년에 자신이 한 일이 영웅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나의 일이었고,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세계를 구한 업적을 세우고도 겸손한 그는 진정 영웅이 틀림없다.

4 기타

그에 대한 다큐가 2015 EBS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다.# 분류상 다큐멘터리지만 83년 당시 통제실 상황을 재연하여 이야기의 한 축으로 구성, 당시 상황을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고 있다.
  1. 그 다음해 2월에 사망했다.
  2. '독일 드레스덴 우호협회'가 분쟁 및 폭력 해결을 위해 노력한 사람을 기념하려고 2010년부터 주는 상으로, 초대 수상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다. 상금은 25,000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