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베를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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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Berliner (또는 Emile Berliner), 1851.5.20~1929.8.3

독일 출신의 미국 발명가. 횡진동 방식의 음반SP의 발명과 개량에 기여한 인물로 유명하다.

1 생애

하노버에서 유대인 상점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가업을 잇기 위해 도제식으로 상업을 배웠고, 인쇄공과 넥타이 상점 점원으로도 일하면서 집안 살림에 보태기도 했다. 하지만 틈틈이 발명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 이것이 본업이 되었다.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는데, 사실상 무일푼이었던 탓에 워싱턴 DC에서 아버지의 친구가 경영하던 재봉용품점에서 3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는 안습 상황이었다. 이후 뉴욕으로 옮겼지만, 여기서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뉴욕에서도 동향인인 화학자 콘스탄틴 팔베르크의 실험실에서 조수 겸 잡역부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화학을 배웠고, 밤에는 쿠퍼 유니언 연구소에서 물리학을 배우는 등 주경야독으로 발명에 필요한 과학 지식을 습득했다. 이후 자신의 발명품 특허를 따기 위해 영국캐나다, 독일을 돌아다니며 홍보 활동을 하기도 했다.

1877년에는 전화기의 송화기에 탄소 알갱이를 채워넣어 소리의 감도와 명료도를 향상시키는 특허를 따냈는데, 이 특허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설립한 벨 전화 연구소에서 사가면서 발명계에서 유명해졌다.[1] 베를리너는 같은 해 보스턴의 벨 연구소에 들어가 1883년까지 전화기의 개량 연구에 종사했고, 1881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벨 연구소와 계약이 끝난 뒤에는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와 개인 연구소를 차렸고, 1880년대 중반 부터 음반의 개량에 몰두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미 발명계의 본좌였던 토머스 에디슨이 만든 포노그래프(Phonograph)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지만, 깡통 속에 홈을 파고 재생하는 종진동 방식이라 대량 생산에 불리하고 마모가 심하다는 문제 때문에 영 좋지 않은 판매 실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베를리너는 종진동 방식 대신 둥글넓적한 원판에 소리홈을 새기고, 이것을 틀로 삼아 음반을 찍어내 재생하는 횡진동 방식의 음반을 제작했는데, 이 음반과 재생기는 그라모폰(Gramophone)이라는 이름으로 1887년에 특허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첫 시제품이 나와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에서 공개 실험이 이루어졌고, 1889년에는 베를린의 공업박람회에서도 포노그래프와 비교하는 공개 실험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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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모폰 레코드의 개량 연구중인 베를리너)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은 에디슨의 것과 달리 내마모성이 강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했지만, 아직 재생 방식과 음반의 품질은 포노그래프에 비할 바가 못되어서 든든한 사업 파트너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1890년에 독일의 켐머 운트 라인하르트라는 기업이 그라모폰의 첫 파트너가 되었는데, 다만 이 업체는 음반 생산이 아닌 장난감 제조가 전문인 회사였다(...). 실제로 이 당시 레코드는 직경이 불과 5인치(12.5cm)에 불과했고, 재생기도 사람이 직접 자전거 페달 돌리듯이 손으로 돌려야 했다.

그래도 이 초기 그라모폰은 값이 에디슨 포노그래프보다는 훨씬 쌌고, 나름대로 소리가 나오는 물건이라 3년 정도는 그럭저럭 팔렸다.[2] 베를리너도 그 동안 손가락 빨고 있지는 않았고, 계속 레코드와 재생기의 품질 개선에 몰두했다. 이 와중에 훗날 녹음 역사상 최초의 전업 프로듀서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동향인 프레드 가이스버그와 유능한 기술자인 엘드리지 존슨이라는 두 사업 파트너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상업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베를리너는 1895년에 가이스버그, 엘드리지 등과 공동으로 미국 그라모폰 컴퍼니를 창립해 본격적으로 에디슨 포노그래프 등과 경쟁을 시작했다. 이 회사는 1899년에 동업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랭크 시맨이 독단으로 자기 몫의 지분을 빼내서 유니버설 토킹 머신을 창립하고 그라모폰 짝퉁인 조노폰(Zonophone)을 찍어내는 바람에 소송드립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후 에디슨을 비롯한 종진동 방식의 음반 사업을 완전히 발라버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3]

베를리너 그라모폰은 영국(1897)과 독일(1898)에도 지사를 세웠고, 시맨이 삽질하다가 날려먹은 유니버설 토킹 머신 지사들도 대부분 재흡수했다. 1901년에는 시맨의 진상짓에 빡친 엘드리지 존슨이 잠시 독립해 세운 컨설리데이티드 토킹 머신(이후 빅터 토킹 머신)과도 관계를 회복했고, 원판 공유 등으로 한동안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며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시장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뛰어넘어 아시아아프리카에까지 닿아 있었다.

1900년대 중반에 음반 사업이 안정화되자 베를리너는 다른 분야의 발명에도 손을 댔고, 직물의 대량 생산을 위한 자동 재봉틀과 초기 헬리콥터의 생산과 개량에도 업적을 남겼다. 헬리콥터 개량 사업은 이후 베를리너의 6남이었던 헨리에게 넘어가 베를리너-조이스 항공사의 설립까지 이어졌다.

1914년에는 잠시 신경쇠약으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고, 회복한 뒤에는 투병 경험을 살려 보건위생 분야의 상품 개량에 몰두하기도 했다. 1929년에 워싱턴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록 크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수상 경력

  • 프랭클린 연구소 존 스콧 메달 (1897)
  • 프랭클린 연구소 엘리엇 크레슨 메달 (1913)
  • 프랭클린 메달 (1929)

3 사후의 영향력

전화기와 헬리콥터 개량에도 나름대로 큰 몫을 하기는 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주로 음반 발명과 개량에 대한 업적을 높이 사고 있다. 특히 베를리너의 횡진동 방식은 그가 개발한 레코드인 SP 뿐 아니라 그 개량형인 LP, EP 등에서도 큰 변화없이 계승되었다. 그 이후의 매체들인 CDLD, DVD, 블루레이도 바늘이 직접 홈을 긁지 않을 뿐이지 재생기에서 횡으로 돌아가는 매체 표면에 레이저를 쏘아 정보를 읽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베를리너의 횡진동 재생 아이디어는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디슨의 종진동 레코드로 시작한 음반사를 제외하면 20세기 초중반 나타난 수많은 음반사들은 모두 베를리너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었고, 특히 영국의 HMV(훗날 EMI)와 독일의 도이체 그라모폰은 베를리너의 직계 회사라는 점에서 창업사에 반드시 빼먹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4] 존슨이 만든 방계 회사인 빅터(훗날 RCA)도 마찬가지.

특히 도이체 그라모폰은 1996년 베를리너의 고향이었던 하노버에 녹음 기술 연구와 예전 녹음의 복각, 베를리너 관련 자료의 수집과 보관을 목적으로 하는 에밀 베를리너 하우스를 설립하는 등 유달리 하악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MI도 1997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창업주인 베를리너가 실험적으로 남긴 녹음들을 창립 기념 선집에 포함시키는 등 저마다 베를리너의 뒤를 잇고 있다는 정통성 주장에 이용했다. 다만 EMI는 이후 경영 상태가 완전 시망이 되어 2013년에 워너뮤직에 팔려가면서 사라졌다
  1. 다만 이 특허는 1901년에 벨 전화 연구소가 특허권과 경영권 문제로 막장이 되면서 졸지에 무효 처리를 당하기도 했다.
  2. 참고로 에디슨 포노그래프는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1년 남짓 팔리다 망했다(...).
  3. 베를리너 생전에는 에디슨의 종진동 방식이 음질 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양산에 불리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끝내 극복하지 못해 결국 에디슨이 GG쳐야 했다.
  4. 다만 도이체 그라모폰의 경우, 반유대주의가 극성이었던 나치 시대에는 코세지가 두려워서였는지 공적으로는 창업자의 이름을 일체 언급하지 못했던 흑역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