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비

1 旅費

여행 비용.

2 黎斐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 생몰년도 미상.

257년에 사마소에 대항해 제갈탄이 수춘에서 봉기하면서 오나라에 투항을 청하자 오나라에서는 문흠, 당자, 전단, 전역 등 병사 3만을 보내 구원했는데, 주이도 3만을 인솔해 공격했으나 패했다. 이 때 손침이 대규모로 부대를 출동시키고 주이를 보내서 여비는 정봉과 함께 5만 명을 인솔해 위나라를 공격했다.

삼국지집해에는 주이, 당자 등을 파견해서 구원하게 하고 여비는 정봉과 함께 포위를 풀도록 했으며, 정봉이 먼저 올라가 여장에 주둔해 힘써 싸워 공을 세워서 좌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왕명성과 후강이 주장하는 바가 있지만 여비에 대한 것을 왕명성이 주장하는데, 각각의 본에서 태평 2년 아래에 위가 그를 크게 포위했다라고 써서 포위된 자는 정봉인 듯 하지만 아랫글에서는 다시 정봉에게 포위를 풀게 했다는 모순을 지적하면서 사서를 지은 이가 여비가 열전이 없었기에 정봉전 안에 여비의 일을 붙여 서술한 것일 뿐이라 했다.

3 麗妃

한영정의 딸. 한확의 누이. 영락제의 후궁으로 여비에 봉해졌다.

1417년, 공녀로 뽑혀 명나라에 갔다. 영락제는 그녀를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며 함께 공녀로 보내진 황씨가 처녀가 아님이 밝혀지자[1] 이를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시키려던 영락제를 달래 겨우 무마시켰다.

어여의 난[2] 당시 감금되었으나 지키던 내시가 가엾게 여겨 음식을 몰래 주어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자 유모 김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달라 청한 뒤 목이 졸려 숨진 뒤 순장되었다. 이때 유모에게 통곡하며 '유모, 나는 갑니다!' 하고 마지막 말을 하려 했으나 형을 집행하던 환관이 발디딤 평상을 빼버리는 바람에 유언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홍희제가 그녀의 청을 분명히 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흑은 궁의 기밀을 너무 알고 있다는 이유로 명나라에 묶여있다가 10년 뒤 태황태후에게 간청해 다른 조선 여인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동생 역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그녀는 언니의 비극을 알았기에 이를 회피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빠인 한확의 강요에 끌려가다시피 했다. 결국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누이 팔아먹어 부귀영화를 누리더니 이제 남은 누이까지 팔아먹는구나!" 하고 오빠를 디스하곤 비단이불을 칼로 찢어버리고 혼수감을 죄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갔다고. 그나마 다행히 이 여동생은 후에 정통제의 황태자를 죽을 위기에서 보호한 공으로 공신태비(恭愼太妃)라는 존칭까지 받고 궁내 일을 잘 알아 여사(女師)라고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1. 가는 도중 배를 앓더니 유산을 했다.
  2. 중국인 후궁 여씨가 조선인 여씨에게 원한을 품고 그녀가 같은 공녀 출신인 현인비 권씨를 독살했다고 무고, 여씨를 포함한 수백 명이 죽은 사건. 후에 어씨와 여씨가 내시와 간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처리하는 과정에서 현인비가 사실은 중국인 여씨에게 독살당했다는 사실도 폭로되어 대대적인 국문으로 번졌다.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궁인이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