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 민씨

驪興 閔氏

1 개요

한국의 성씨 집단. 고대 중국 공문십철의 하나인 민자건의 후손 민칭도가 고려 때 귀화하여 여흥(지금의 여주시)에 정착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2000년 기준으로 인구수는 142,572명. 고려의 재상 민지를 시조로 하는 문인공파와 조선에서 대제학을 지낸 민적을 시조로 하는 문정공파로 나뉜다.

2 고려

이미 고려시대에 민칭도의 증손 민영모(閔令謨)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그 후손들도 높은 벼슬에 올랐을 만큼 문벌귀족, 권문세족으로서 명성을 누렸다. 고려말에는 민제가 한 신흥 무인가문에 셋째 딸을 시집보냈는데 이때 시집보낸 딸이 후일 원경왕후, 사위가 후일 조선의 3대 국왕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었다.

3 조선

중전마마를 전문적으로 배출한 희대의 명문가.

어쨌거나 조선이 들어선 이후 이방원은 당대의 명문가인 처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수 있었으나 이후 태종의 외척 정리의 과정에서 원경왕후는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의 명문가로 자리잡아 조선 왕실과 여러 차례 혼인 관계를 맺었고, 많은 문과 과거 합격자와 대신들을 냈다. 당파로는 서인 노론에 속했다. 인현왕후가 이 여흥 민씨 가문 사람이다.

조선말에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명성황후 민씨, 순명효황후를 배출한 외척가문으로서 세도정치를 폈다. 애초에 흥선대원군이나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부터 여흥 민씨와 결혼을 했었다. 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순종까지 여흥민씨는 처가이자 외가이자 사돈이다. 이때의 여흥 민씨는 안동 김씨(장동 김씨)나 풍양 조씨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극심한 민폐를 끼치며 탐관오리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훗날 을사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도 당대엔 탐관오리 중 한명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니... 민영환은 실제로 탐관오리라고 보기엔 힘들긴 하지만 국가가 망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은 결국 왕조국가에서 최정점인 국왕으로 향하게 되는데, 정작 왕을 까지는 못하니까 대신에 주변 대신들을 돌려치는게 조선시대의 여론형성 과정이었다. 세도 정치 시기이니 자연스럽게 외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풍문들을 기록한 야담집에서는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되게 된다. 특히 황현이 서술한 매천야록에서는 작심하고 명성황후를 공격하고 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황현의 입장에서 당시에는 이미 죽었지만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온건개화파는 그 누구보다 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급진개화파들의 제1 목표는, 대놓고 개화를 반대하던 이들이 아니라 급진개화파였다가 온건개화파로 노선을 변경한 민영익 같은 사람이었다. 내부 노선 선명성 대립이야말로 인정사정 없기 마련

어쨌든 고종을 비판할 수 없으니 돌려친다고 쳐도 결국 고종이 만악의 근원인 건 변함이 없다 하겠다.

4 친일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708명 중에 38명, 즉 17명 중 1명 정도가 민씨 집안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씨 일가는 러시아에게 들이댔다가 나중에 거의 대부분이 나라를 망치고 매국을 하고 결국 친일까지 했다. 가히 이 가문의 흑역사 중에서도 최고 흑역사라 할 수 있으며 현대 대한민국에선 고려부터 조선까지 내려오던 명문가로서 기억되기보단 대표적인 친일파, 매국노 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등재된 인물 대다수가 친일파, 매국노인 가문이기도 하다. 황실 종친인 전주 이씨와 외척인 여흥 민씨는 일본의 대표적인 회유대상이었고, 여기에 잘도 넘어갔다. 죽도록 저항하다가 상해로 망명한 민영익이나, 역시 상해임시정부 망명 시도를 했던 의친왕 같은 인물은 무척이나 희귀한 사례이다. 자세한 얘기는 이 항목을 참조하자. 덕분에 여흥 민씨들은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 김씨들처럼 국사를 배울 때마다 씁쓸해한다. 우봉 이씨들도.

그렇지만 항일운동한 사람이 안 나온 것도 아니다. 의병장으로 활동한 민종식이나 민긍호[1]같은 인물도 있고, 갑신정변 반대파라고 죽도록 까이는 민영익 같은 인물도 재평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또한 민영환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하기도 했다. 다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씨 척족(戚族)의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 강해서 묻히는 감이 있다.

5 기타

국사 등에서 많이 봐서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성씨다. 한국 본관 성씨 순위에서 대략 40~50위 사이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성의 어감이 특이해서 그런지 창작물 속 인물의 이름에는 자주 쓰이곤 한다.
  1. 다만 이 분은 명성황후와는 가까운 친척이 아니기 때문에 외척과는 거리가 좀 있는 분이다. 벼슬을 하긴 했지만 서울이 아닌 지방직으로만 있었고 그나마도 외척 버프 없이 본인 힘으로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