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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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26대 영양왕 고대원27대 영류왕 고건무28대 보장왕 고보장
시호영류왕(榮留王)
고(高)
건무(建武) / 성(成)
생몰년도음력555? ~ 642년 10월
재위기간음력618년 9월 ~ 642년 10월 (24년 1개월)

1 개요

고구려의 제27대 . 고구려판 광해군이라고도 불리고 고구려판 네빌 체임벌린이라고도 불린다.

2 고수전쟁에서의 맹활약

영양왕의 이복동생. 수양제의 대대적인 침공에서는 직접 전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싸워 활약을 보인 인물이다. 그것도 보통 활약을 한 게 아니라 수서에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군 장수로는 유이하게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평양성 전투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해 내호아가 이끄는 별동대인 수나라 수군[1] 4만 명을 격파했다.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 밖에서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평양성 외성의 성문을 열고 외성을 무인지경으로 비워두어 그냥 수나라 군대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내호아의 군사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막지 않자 고구려인들이 모조리 도망갔다고 여기고 신나게 약탈에 몰두했고, 고건무가 지휘하는 500기는 이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치고나가 당황하는 수나라 군대를 일거에 섬멸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에서 수나라 수군이 격파되지 않았더라면 살수대첩도 없었을 것[2]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고-수전쟁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명장 중 하나다.

그러나 이때 당시의 나라의 대군을 상대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중국과 고구려간의 엄청난 국력차와 평화의 필요성이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제국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한 고구려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지만, 문제는 고구려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깊숙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 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그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3 친당정책에 대한 비판

결국 고건무는 즉위하고 난 다음 태도를 수를 멸망시킨 과의 화친정책을 폈지만 당나라의 지나친 요구를 들어주면서 전승기념관에 해당하는 경관을 허무는가 하면 이전 시대에 비해 당나라 사신의 간첩 행위를 방조했으며 그럼에도 주변 세력 단속에는 무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전에 비해 주도권이 없는 외교를 하게 된다.

영류왕의 정책은 다음의 특징을 갖고 있다.

  • 직방낭중급에게 대대로가 쩔쩔맴, 임금에게 인사도 안 함
  • 우리쪽 사절은 태자
  • 승전기념물인 경관 철거
  • 당나라 사신의 군사기밀 정탐을 방조
  • 거란, 말갈 이탈시킴
  • 백제 신라는 적대
  • 당은 고구려는 본래 한사군 땅이라고 주장

결론적으로 영류왕의 대당정책은 결국 당나라에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굽신대면서 결국 정권이 붕괴되고, 영류왕 본인은 비명횡사를 하고 말았다. 고수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고구려로서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펼칠 필요는 없고 다시 국력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런 와중에서 내실을 다지거나, 나름의 대비를 하거나, 이외의 것들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기 당에 포로교환이나 포로반환은 성의표시이거나 어차피 쓸모없는 나이가 든 포로들과의 교환이었을 가능성과 책봉이나 봉역도 문제도 국제적 상호인정과 국경을 명확히하자는 입장이 담겨져 있다고 해석할수 있는 여지의 상호 교류와 평화목적의 전개로서 해석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내부체제를 어떻게 개혁하고 국력을 신장하고 주변을 안정시킬것인지는 전혀 방안이 없었다는 점이다.[3]

이는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 즉 주변 말갈-거란-실위의 이민족들의 영향력하게 두고 한반도 역시 언제든지 영향력 행사와 팽창을 할수 있는 입장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강대국이라는 입장에서 또 다른 강대국이라는 당과의 외교문제를 볼때 지나친 소극주의 결과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의 이탈과 분열 그리고 내부갈등은 고구려의 멸망을 부추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민족 분열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1차 고당전쟁때에는 퇴각하는 상황에서도 요서에서 거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당태종의 사례나 2차 고당전쟁당시 완전한 거란의 이탈은 고구려로서 방어영역의 축소를 가져옴으로서 수세에 몰리는 원동력이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도 결국 국가안보라는 측면과 자존감의 문제를 두고 갈등이 나옴으로서 결국 한쪽이 일방주의가 전개되었을때 감당할수 없는 내부이탈의 불씨까지 제공하게 된다. 이 불씨 터져서 가장 극대화된 시점이 바로 연개소문 사후의 고구려 모습이라 하겠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 등에 대한 강경책은 강력한 당이라는 적을 앞두고 우선 후방을 안정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을지 모르나 여느 시대에 의례적으로 있는 교전을 제외하고는 딱히 적극적인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영양왕, 영류왕 시대까지 신라에게 야금야금 영토를 빼앗기거나 약간의 수복등으로 사실상 무의미한 소모전 형태를 치루는 상황이었던 것을 백제를 끌어들이고 남방 전선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그것을 되찾아나간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영류왕 당시 칠중성 공격 정도가 남방 전선에서의 전투로 이것만으로 영류왕이 남방 정책에 적극적었다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신라가 전쟁에서 중앙 인사를 내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고구려 역시 단순한 국지전으로 남방 정리가 안된다는 것은 이미 고구려 최전성기 이래 증명된 일이다. 연개소문처럼 백제, 왜, 말갈을 활용한 포위공격도 아니고 장수왕처럼 내정간섭을 통한 점진병합이나 전면전으로 나간 것도 아닌 오히려 국지적인 전쟁을 통한 현상유지에 가까운 정책. 게다가 이 소모전에 가까운 국지전은 엄밀하게 말해서 신라가 고구려를 적대하는 입장이 더 명확하게 하는 밑바탕까지 되었다.

단순 영류왕의 친당정책이 전쟁을 막은 것은 아니다. 당태종은 쿠데타로 왕이 되었고, 후계자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특히 당태종의 최측근이자 재상인 위징이 전쟁의 반대하였고 수나라가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는등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영류왕은 이런 분위기를 읽고 전쟁에 반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나온 당고조와는 달리 당태종은 전쟁을 억제할 장해물들을 하나둘씩 치워내갔고 주변국가들도 정리함으로서 고구려로 갈 준비를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당태종은 고구려의 정복을 수나라때의 아픔상처를 씻으려고 한게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류왕의 친당정책 그것도 당태종이 침공을 위한 명분쌓기용의 무리한 요구조건들을 수용해왔던 것은 결국 무의미했다.

4 옹호론

영류왕이 초기 노선을 소극적 입장을 취한 것은 기본적으로 다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고수전쟁이 대규모로 4차에 걸쳐 무려 16년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최대 격전이었던 2차 고수전쟁에서는 그야말로 고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군대를 맞아 국운을 걸고 싸웠다. 비록 고구려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고구려의 기본 전략인 청야전술의 가장 큰 치명적 단점이 바로 전후 기반을 닦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침공군이 운영할수 있는 모든 걸 파괴하는 작전이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국력 손실이 클 수 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고구려의 주요 인구+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 중 하나인 요동과 평양 일대에서의 격전은 분명히 고구려의 경제에 타격을 줄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로서도 국력차이가 5배 이상은 차이가 나는 중국의 통일 왕조를 상대로 힘든 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기에 국력적 한계 역시 충분히 절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영류왕이 초기에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자 동시에 꽤 현명한 판단이었다. 더욱이 은 내부적으로 반란의 연속과 돌궐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 입장을 보인건 결국 상대적으로 고수전쟁에 대한 상호 적대심이 강한 상황에서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수 있는 기반이었다. 더욱이 떨어진 국력에 대비하여 돌궐 세력의 성장은 위협으로 고구려에게도 비추어졌기 때문에 을 이용하여 돌궐을 견제하면서 고구려의 힘은 들이지 않는 전략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 고조역시 국내 사정과 국외적 입장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점이 결국 각자의 이익에 서로 부합하여 충분히 상호 온건노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로서는 당을 적대하여 다시 자국 영토와 간접 지배 지역을 포함한 영향력 지역에서 일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간혹 서토공격을 할수 있었던 시기 운운하지만 고구려에게 난하 서쪽은 그저 고구려의 천하관과는 무관한 다른 천하관과 문화가 존재하는 서쪽 땅 일뿐이었고 으로서도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여 서북~동북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고립되고 내부적으로는 혼란의 연속에 따르는 국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동양의 고대 국제 정치학적인 입장의 책봉과 조공 문제는 별 탈이 없었고 포로 교환이나 반환 역시 그렇게 무리될 것이 아니었다. 영류왕이 보낸 포로들만 하더라도 순차적으로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내부 복구에 그들을 투입하면서 노비로 활용할 것은 활용하고 쓸모없는 포로들 위주로 보냈을 확률이 높다.

즉 영류왕의 초기 온건 외교 노선은 고구려 스스로가 자국의 생존과 국력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물론 당 고조와 다르게 당 태종이 집권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 당도 내부적으로 안정되고 국력을 신장할 때였고 고구려 역시 왠만한 전후 복구를 다하고 국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 태종의 봉역도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것은 당 태종의 집권이후 고구려에 대한 당의 외 교노선이 변화한 것에 대해 고구려 역시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영토를 분명히 하여 당으로 하여금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 오지 말 것의 입장이 고구려에게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명분상 고구려가 당에게 자국의 영토를 바치는 모양새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주의에 빠져있는 중국 왕조들의 전형적인 자기 변호에 지나지 않다.

더욱이 당 태종의 이러한 문제로 고구려에서도 천리장성을 수축하는 형태를 작용하여 나름의 고구려로서는 서부전선인 당과의 전선을 정비하는 노력을 하였다. 이는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할때까지 고구려의 서부방벽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천리장성의 수축형태로 고수전쟁때와 다르게 당은 요동방어선에서 지상군이 번번히 돌파를 하지 못하고 묶여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당이 선택한 전략은 요동방어선은 우회하는 선택을 하였고 그 전략이 통용된게 바로 3차 고당전쟁때 이다. 따라서 영류왕의 방어전선 구축은 당태종의 이러한 호전적 성격과 고구려 내부의 나름을 방어전략을 구축하는 일이 되었다고 볼수 있다.

게다가 당태종과의 전쟁을 치루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의 요청을 거부한 것 역시 고구려로서는 돌궐 자체를 믿지 않았다. 고구려와 돌궐의 만남만 하더라도 전쟁으로 고구려가 돌궐을 격퇴하는 입장이었다. 평원왕 시절은 555년 돌궐은 유연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로 쳐들어왔고 이에 장수 고흘(高紇)을 보내어 격퇴하고 일부세력을 복속시켰다.게다가 고수전쟁때에는 돌궐이 고구려의 집단 예민(集團隷民)에 있던 거란을 치며 수나라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전례가 있는 돌궐을 과연 고구려가 쉽게 신뢰하여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세력이 고구려의 북방까지 넓히고 있는 돌궐을 당시 영류왕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을리도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로서도 당시에는 천리장성에 국력을 쏟아붓고 있었고 남방인 신라와의 전선에서의 국지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통일왕조인 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북방이민족들과의 균형외교는 하지를 못했다. 이는 동돌궐이 멸망하는것을 무조건 방조한 결과에서 북방 이민족들의 친고구려 성향의 이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관을 허문 것과 태자의 입조는 일단 당나라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으며, 진대덕의 경우엔 삼국사기 영류왕 본기에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쓰여 있어서 묵인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또한 신라와의 국지전 소모에 대한 입장도 고구려로서는 신라에게 빼앗긴 옛땅의 수복도 중요하지만 어느정도 방어전선의 안정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중국왕조들이 있는 요동과 요서에 해당하는 고구려에게는 서부전선의 방어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서부전선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안전하다 싶으면 그때서야 남부전선인 한반도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성과를 냈었고 이는 장수왕-문자명왕때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류왕 시기의 서부전선은 천리장성 수축이 필요하고 동시에 외교로서 최대한 교란이나 균형을 유지할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국은 사분오열된것이 아니라 통일왕조인 이 들어서면서 안정을 찾고 국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쉽게 남부전선에 투자할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는 천리장성의 구축만 16년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오랜시간 지속 했었던 점만 보더라도 알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한반도 전선의 신라의 방어선을 나름 구축하고 교두보 발판으로 칠죽성 공격과 같은 노력을 한건 결국 내려는 가겠지만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봐야한다.

이러한 외치문제를 제외하고도 내부적으로 고구려평원왕의 중흥이후로 영양왕과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강력한 왕권을 다시 세울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왕권의 강화와 귀족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중요했다. 특히 장수왕의 천도이후 평양에서 부흥한 신진귀족세력과 국내성을 중심으로의 전통귀족세력이나 북방의 귀족세력등의 여러가지로 얽혀있는 귀족세력들의 권력균형을 맞추어야하는 일을 영류왕도 한 것이다. 그런 정치술에서 연개소문의 가문이 활용되는 과정이었다고 봐야한다. 흔히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있었다고 하지만 정치라는게 그렇게 쉽게 편가름을 하기 어려운 점과 상호이익에 움직이는 점을 본다면 왕이 균형을 맞추고자한 것이고 영류왕은 그것을 24년동안 집권하면서 나름 수행한 것이라 봐야한다.

물론 영류왕은 집권 중반 이후부터는 어느 왕도 마찬가지지만 한쪽으로 편승한 입장의 정치노선을 보이는 과정을 택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친위쿠데타이든지 아니면 정변이든지 어떤 방식으로의 무장봉기와 충돌을 발생시킨 것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그것은 영류왕의 균형정치가 실패한 것이자 다시 고구려의 정치체제가 왕권 중심이 아닌 귀족연합체 성격으로 다시 전환됨과 동시에 독재체제를 확립하게 한 것임에는 틀림은 없다.

추가적인 영류왕의 옹호론적인 재평가 문제는 이곳에서 확인해볼수 있다.

5 비참한 최후를 맞다

왕위에 오른지 24년이 지난 642년 10월, 고구려 정계내 권력 균형 문제로 너무 과도하게 힘을 키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연개소문쿠데타로 시해당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시체를 다섯갈래로 나눠 구덩이에 넣었다고 한다.이것이 나중에 전쟁의 명분이 된다. 하지만 이는 헛소문일 가능성도 있다. 영류산에 매장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영류라는 시호가 영류산에서 나온 것이다...

6 트리비아

아들로 태자 고환권(高桓權)이 있었는데, 영류왕 23년(640년) 2월의 기록 외에는 아무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신찬성씨록에서 고복덕이 영류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상반된 기록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7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행위를 호소하다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연개소문에서의 연기자는 최종환. 그입 다물라! 다물라! 다물라! 당과 화친정책을 펴는건 드라마에서도 나오지만 당과 맞서야 한다는 연개소문과는 달리 당과는 화친하면서 가장 큰 위험을 신라로 지목하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걸로 나온다. 결국 당에게 굽실거린다고 고구려의 장수들(강이식, 온사문)의 불만을 샀고,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독주를 마시고 자결한다.[4]

유현종의 소설 연개소문[5]에서는 당과의 평화정책을 펼치는것 외에도 가화[6]라는 첩에게 홀려 암군으로 전락하고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끔살 당한다. 이 소설에서는 연개소문이 고건무의 부하로 여수전쟁에 종군 했었고, 연개소문이 고건무를 굉장히 존경했었다는 설정.[7]

2013년 KBS 사극 칼과 꽃에서는 김영철이 연기. 본격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영류왕? 그런데 화천회 대장로가 관심법을 씹어먹어 역모를 막지 못할듯 당에 대해서 화친정책을 취하는등 고구려의 평화를 지키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당에대해 화친정책을 펼치는건 같으나, 만만한 신라를 공격하는 드라마 연개소문의 영류왕과는 달리 고구려의 평화 그 자체가 목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칼과 꽃 자체가 근래에 나온 사극중에 보기 드물게 연개소문을 악역으로 그리고 있는만큼 그 대척점에 서있는 영류왕을 선역으로 그리면서 생겨난 캐릭터인듯.
  1. 바다를 통해 산동반도에서 평양성을 직접 쳤다.
  2. 함대가 싣고 온 양식이 있으면 우중문의 군사들도 당장 철수할 필요가 없다.
  3. 다만 이는 기록이 부족해서 영류왕이 어떤 내치를 통해 국력을 회복시킬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섣부른 주장으로 보인다.
  4. 고건무는 연개소문의 재능을 높이 사며 연개소문과 함께 가기 위해 끝까지 연개소문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냈고,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5. 드라마의 원작이라고는 하는데... 드라마는 원작의 내용과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전개를 보여준다.
  6. 연개소문의 첫사랑이었으나 연개소문과 이뤄지지 못하고 고건무의 첩이 되고 이후 흑화하여 고구려판 달기, 장녹수가 되고 만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연개소문의 자비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이후 김춘추의 첩이 되어 김춘추를 도피 시킨다.
  7. 쿠데타 후 고건무를 죽일때 "내가 존경했던 고건무 장군은 어디갔소?" 라고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