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눈물을 마시는 새)

눈물을 마시는 새 / 피를 마시는 새 세계관의 종족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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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종족
두억시니
(유해의 폭포)
하늘치대호
스포일러
판타지 소설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에서 등장하는 기묘한 생물. 동물처럼 움직이는 식물이자 식물처럼 자라나는 동물이다. 키탈저 사냥어로는 드라카라고 한다. 다른 판타지 작품을 뒤져봐도 이렇게 특이한 형태의 용은 거의 없다.

모순을 좋아하고 숭배하는 키탈저 사냥꾼들에게는 '식물로 태어나지만 자라면 식물을 위협하는 생물이 된다'는 점이 갭 모에매력적이었는지 용을 그들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이라곤 하지만 아스화리탈의 묘사를 볼 경우 용보다는 드래곤에 가까우나 용은 어떤 형태로도 자라날 수 있기에 둘중 어느쪽에 가깝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특이하게도 동물과 식물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선민종족급으로 현명하다.[1] 포자 형태로 땅에 뿌려지고 난 다음 주변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용화로 발화하고[2][3] 식물의 뿌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용근이 생기며, 이것이 자라면 용이 된다. 이 용근을 먹은 자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인, 용인이 될 수 있다. 용은 현명하기 때문에 자신이 자라나게 하는 자나 자신을 지켜준 자를 따른다.

아스화리탈의 경우 식물이기에 입이 없지만 차가운 발화 가스를 뿜는 턱,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함수초 같은 날개, 가스를 발화시키는 꼬리를 가지고 있다. 이후 성장한 뒤에는 가스를 발화시키는 기관이 뺨으로 옮겨가 숨결만으로도 불길을 일으키기도 했다.

더욱이 용은 소유주의 육성방식이나 자연환경에 의하여 완벽히 적응하여 자랄 수 있다. 예를 들면 땅에서 들과 키운다면 불을 뿜는 말이 되고, 바다에서 키운다면 용의 팔과 다리에 물갈퀴가 생겨날 것이다. 즉 능력만 된다면 그 어떤 형태로도 자라날 수 있다. 사람의 형상대로 키운다면 키잡도 실행 가능하다.[4]

불을 뿜어 숲을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가들은 용을 도깨비급으로 싫어한다. 대확장 전쟁 이후 나가 정찰대의 손에 남부의 모든 용근들이 파괴되었고, 용이 피어나기 힘든 북부에서 간신히 피어난 용근은 용인들이나 용인이 되고 싶은 인간들이 모두 파먹었기 때문에 용은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5] 하지만 륜 페이가 아스화리탈의 용화를 피워내어 수백 년만에 용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고 아스화리탈로부터 새로운 용들이 탄생한다. 이렇게 탄생한 용은 작중에서 둘이 나오지만 딱히 둘만 피어났다는 언급은 없는지라+산맥 너머에서 새로운 땅이 발견되었다는 말이 나오는지라 새로운 시리즈가 나온다면 아스화리탈의 후손들까지 합쳐서 더 많은 용이 등장할지도.

이영도 세계관의 용 아니랄까봐 이름이 알려진 개체들 모두 한글로 다섯글자 이름을 쓴다.

작중에서 등장한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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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민종족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금방 구분하고 전자에 헌신한다. 그리고 용의 그 특성상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게 키우면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선민종족의 모습을 하고 선민종족의 언어를 쓰는 용이 피마새 작중에 나온다.
  2. 용의 현명함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 선민종족으로 치자면 아직 태내에 있는 태아와 다를 바가 없는데, 이 상황에서도 이미 주변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발아를 미룰 수 있다는 것.
  3. 또는 용근으로 먹히는 것을 수락하고 발아하기도 한다고 한다.
  4. 취소선이 그어 있지만, 이거 진짜다! 작중에서 실행한 사람만 없었지 일단 맘만 먹으면 이론상으로나 실제로나 가능했을 것이다.
  5. 케이건 드라카의 이름 중 '드라카'는 나가들에게 멸종당한 용을 가리키는데, 그는 나가들에게 멸종당한 것들의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임으로써 그 증오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