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1세

역대 잉글랜드 국왕
웨식스 왕조노르만 왕조노르만 왕조
해럴드 2세윌리엄 1세윌리엄 2세
왕호윌리엄 1세
(William I)
별칭정복왕 윌리엄
(William the Conqueror)
부친로베르 1세
모친에를로바
생몰년도1028년 ~ 1087년 9월 9일(58세)
노르망디 공작1035년 7월 3일 ~ 1087년 9월 9일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국왕)
1066년 12월 25일 ~ 1087년 9월 9일
대관식1066년 12월 25일

유럽에서 바다를 건너 영국을 정복한 최후의[1]정복자.

1 소개

원래는 노르망디 공국공작이었으나, 노르만 정복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이 된 인물로 노르만 왕조의 창시자이다. 이후부터 몇 차례 왕조가 바뀌는 등 변화는 있었지만 현재까지 영국의 왕은 미약하게나마[2] 이 사람의 피가 흐른다. 실제 살아있을 때 불렸던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는 기욤 2세였다. 보통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생아이라는 별명도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와 그의 정부였던 평민 출신의 에를르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생아였고 따라서 사생아왕[3]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에를르바는 출신마저 미천했고[4] 기본적으로 사생아에 대해 굉장히 엄격했던 시대에 로베르 1세가 이런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로베르 1세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베르 1세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귀환하는 도중에 갑자기 병을 얻어 죽게 되자 7살의 나이로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기 전에 사생아였던 윌리엄을 후계자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에 공작을 계승할 수 있었으나, 사생아라는 지위 때문에 끊임없이 친척들의 견제와 맞서야 했다. 로베르 1세는 생전 봉신들에게 윌리엄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했지만 사후 그의 친척들에 의한 단순한 조롱에서 암살 시도까지 괴롭힘은 그치지 않았다. 한 번은 그에게 대항하는 성을 포위했을 때 성벽에 무두질할 가죽이 내걸려 그의 출신을 비웃는 일도 있었다.그 성이 함락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모두들 잘 알 것이다[5] 그래도 어머니의 보호와 헌신으로 초기 위기를 극복했고 이는 그에게 강한 의지력을 심어 주었다.

15살에 기사로 인정받은 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그는 플랑드르의 공녀 마틸다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녀 역시 그를 천한 혈통의 사생아라고 놀려대자 화가 치민 그는 말을 달려 마틸다의 집에 혼자 쳐들어가서는 그녀를 다짜고짜 채찍으로 때려눕히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 행동이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4년 뒤에 결혼하게 된다(...). 혹시 M? 윌리엄은 평생 성실한 남편 노릇을 했지만 이 결혼에도 쑥덕거림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사실 모계 쪽으로 먼 친척뻘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설수를 무마하고자 이들 부부는 교회 두 채를 지어 헌납했다.

2.2 젊은 노르망디 공작, 영국침공

주변이 적이 많던 윌리엄은 프랑스앙리 1세의 후원 덕분에 노르망디 공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앙리 1세는 1054년과 10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실패했다. 젊은 윌리엄은 다혈질에 잔혹했지만 앙리 1세가 침공할 무렵에는 이미 노르망디의 반란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앙리 1세의 침공에도 무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메인 지역을 병합했다. 앙리 1세는 노르망디가 프랑스의 왕위까지 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했는데 윌리엄이 실제 노렸던 것은 잉글랜드의 왕위였다. 1066년 윌리엄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을 겪었던 영국 왕위에 개입했다. 당시 즉위한 해럴드 2세는 선대 왕 에드워드처남이라 견제하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의회를 통해 적법한 절차로 선출된 왕이었다. 문제는 이 해럴드 2세가 예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포로가 됐으며 풀려나려고 한동안 봉신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걸 빌미로 삼아 윌리엄 1세는 해럴드 2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서했고 죽은 에드워드 왕도 생전에 왕위를 약속했다는 주장하면서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내부로는 노르만 계열과 앵글로색슨 계열 간 대결 구도가 확연했고 외부로는 교황에게 견제받으면서 노르웨이에 침공받기까지 하던 상황이라 그야말로 최악의 카운터를 맞은 셈이었는데 윌리엄은 자신을 적대하던 앙리 1세가 1060년 죽고 친분이 있었던 필리프 1세가 뒤를 이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2세도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대립하면서 윌리엄을 적극 후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용병을 모으고 함대를 건조하여 막 침공하려 하자 심한 북풍이 불어 배가 뜰 수 없었는데 그 사이에 노르웨이가 먼저 잉글랜드를 침공하고 해럴드 2세가 이를 물리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저절로 줄고 주적은 힘이 빠져 버리는 행운으로 드러났다. 더 극적인 것은 해럴드 2세가 싸움을 마치자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바뀌었고 윌리엄은 사흘 만에 잉글랜드에 간단히 상륙할 수 있었다.

2.3 영국의 왕, 윌리엄 1세

결국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는 전사하고 윌리엄이 승리하면서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 때부터 영국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의 신하가 되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봉건제도의 특성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위는 잉글랜드 왕위와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된 것이다. 즉, 평소에는 독립 왕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지만 노르망디 공국과 관련된 것으로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봉신이었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은 영국을 통치하려고 토지를 조사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토지 조사 문서가 둠즈데이 북이다.

1087년 루앙에서 사망한 뒤 캉에 있는 생테티엔 성당에 묻혔다. 그를 성당에 안장시키려고 할 때 선약자가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60실링을 지불한 후에야 매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윌리엄 1세는 말년에 대단히 뚱뚱해져 있었고 매장이 늦어져 그의 시신은 부패되고 부풀어올랐다. 그렇잖아도 뚱뚱한 그의 시신은 부풀어올라 도저히 석관에 들어가지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용을 써서 결국 석관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이 터져 악취가 진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16세기 종교전쟁 때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때 약탈되어 지금은 관 속에 넓적다리뼈 하나만 남아있다.

2.4 가족관계

윌리엄 1세는 4남 5녀가 있었으며 봉건제도의 관습에 따라 장남 로베르에게는 상속지인 노르망디 공국[6], 삼남 윌리엄 2세에게는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차남 리사르는 윌리엄보다 일찍 죽었고, 막내아들인 헨리는 영지를 살 돈을 받았는데 윌리엄 1세 사후의 형제들 간의 계승권분쟁 이후에 헨리 1세가 된다. 또한 장녀 아델라의 아들이자 외손자였던 스티븐은 헨리 1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이 된다.

3 트리비아

윌리엄 1세가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영토 중에서 지금도 남아 있는 영토가 딱 한 곳 있는데 바로 채널 제도이다. 하지만 채널 제도를 제외한 다른 영토는 1204년 존 왕 때 프랑스 필리프 2세의 공격으로 모두 잃었다가 백년전쟁 때 잠시 탈환했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상실했다.

재산이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가치로 2295억달러를 가지고 있었고 이건 인류역사상 7위에 해당하는 재산기록이다.

아내 마틸다(1031~1083)와의 결혼 과정이 상당히 흠좀무하다. 노르망디 공작 시절 마틸다에게 청혼을 넣었던 윌리엄은 마틸다가 "너님 같은 사생아랑 나랑 격이 맞는다고 생각함? 꿈 깨셔."라고 대답하자 딥빡쳐서 플랑드르로 달려갔다. 여기서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교회에 가던 마틸다를 만났다는 설과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갔다는 것. 진실이 어느 쪽인지는 크게 상관없다. 어쨌든 열받은 윌리엄이 마틸다를 보자마자 머리채를 잡아다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두들겨팼다는 점은 변치 않으니까. 여기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는데 그 광경을 본 마틸다의 아버지 보두앵이 빡쳐서 칼을 뽑으려 하자 마틸다가 아버지의 앞을 막으며 "나 이 사람 아니면 결혼 안함!"이라고 버틴 것. 좋은 SM이다 여튼 두 사람은 아버지와 교황의 반대[7]에도 결혼을 강행했고 결국 교황의 승인도 받아냈다. 아들 네 명과 최소 다섯 이상의 딸을 두었다니 금슬은 굉장히 좋았던 모양이다. 윌리엄에게 혼외자식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는 점도 금슬이 좋았음을 의미하고, 딱히 추문같은 것이 전해져 내려오지도 않는다. S와 M이 만나서 죽이 잘 맞았나보다 진짜일 가능성도 있다... 현세에 강림한 다크니스
  1. 보통 노르만 정복이 최후의 영국 정복으로 알려져 있으나 엄밀하게 최후의 영국 정복은 명예혁명이라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 역대 왕조마다 왕위 계승자가 없으면 모계 계승 등으로 대대로 이어왔다.
  3. 영어로 번역시에, William the bastard라 번역이 되는데 bastard는 영어권에서 개x끼 정도의 어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개새끼 윌리엄 혹은 윌리엄 개새끼 사실 이는 현대 영어로 현대에 서자가 나올 일이 거의 없어서 욕설로 굳어졌을 뿐 그 전까지는 사생아, 혼종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 그래도 어쨌든 좋은 뜻은 전혀 아니었지만.
  4. 그녀의 아버지는 흔히 무두장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재단사 또는 장의사였다는 설도 있으며 로베르 1세의 시종을 지냈다고도 한다. 다만 시종의 경우는 윌리엄이 태어남으로써 받은 직위였다는 추정도 있다.
  5. 시민들(전부였다고도, 혹은 지도 계층의 시민 40명도 한다)의 손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6. 색슨족이 득실대고 우중충한 잉글랜드보단 날씨도 좋고 보다 풍요로운 노르망디가 더 좋았으리라. 그래서 로베르는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가 된다. 로베르 1세는 윌리엄 1세의 아버지이자 본인의 할아버지 였기 때문이다.
  7. 상술했다시피 모계로 먼 친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