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츠하크 라빈

199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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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1992
피스메이커(평화이식자)[1]
1993
요한 바오로 2세
1994
< 199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93 -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야세르 아라파트
시몬 페레스
1995 -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역대 이스라엘 총리
1대2대3대-4대5대6대7대
벤구리온샤렛에쉬콜알론메이어라빈베긴샤미르
8대9대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
페레스네타냐후바라크샤론올메르트네타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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יצחק רבין
Yitzhak Rabin
(1922년 3월 1일 ~ 1995년 11월 4일)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었던 인물

1 소개

이스라엘의 군인, 정치가. 제 6대 총리(1974년 6월 3일 ~ 1977년 4월 22일)와 제 11대 총리(1992년 7월 13일 ~ 1995년 11월 4일)를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922년 3월1일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카두리 농업학교를 졸업했다. 모세 다얀이 이끄는 하가나에 들어간 그는 1941년 팔마하 특공대의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했다. 소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1945년 아틀리트 수용소에서 200명의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해 낼 때 부책임자로 작전에 참가했다. 이듬해 6월 그는 이른바 검은 토요일사건에서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에 10월 라빈은 팔마하의 부사령관이 되어 알론 바로 밑에서 일했다. 1948년 봄 그는 하렐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길을 뚫는 나손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과 세이크야라를 해방시켰다. 알론의 지휘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전선 작전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시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1946년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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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일 전쟁의 승리 직후 점령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츠하크 라빈 참모총장(오른쪽). 가운데 안대를 낀 인물이 당시 국방장관 모세 다얀 출처

그 후 라빈은 1953년 영국의 참모대학을 졸업했고. 1954∼1956년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되었고, 1956∼1959년에는 북부지구 사령관으로, 1959∼1960년에는 작전사령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61년 참모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1일 제7대 이스라엘 국방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6일 전쟁 때 라빈은 참모총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1968년 1월1일 전역과 동시에 주미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간 근무했다. 1973년 봄 라빈은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노동당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973년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 때 노동장관에 임명되었다.

2.2 정치인 생활

2.2.1 총리 1기

1974년에 골다 메이어 총리가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 본토 태생으로는 최초로 총리가 되었으며, 노동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시나이 반도의 이스라엘군 철수를 지지했고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약의 대가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고 그 대신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이스라엘 상품 통과를 허용했다. 1977년에 여러 문제로 총리직을 사임하고 시몬 페레스에게 넘겨주었다.

2.2.2 총리 2기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7월, 라빈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25대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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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평화를 염원하다
1993년 9월13일 백악관 정원에서 열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기본원칙 선언 서명식
그러나 이 조약이 평화를 가져오는 일은 없었다.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중재자로 하여,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평화협정을 개시했다. 1994년 10월 오슬로 협정을 맺었다.[2] 이 협정으로 PLO를 모태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구성되었고, 예루살렘 일부를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이집트와 마주한 가자 지구가 위 자치정부의 영토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 사이의 회담이 열려, 양국 분쟁(물리적 충돌은 끝났지만, 종전된 상태는 아니었다)을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문제가 영구 종식될 줄 알았는데...

3 사망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중동평화회담 지지집회 연설 후 차에 타려던 중 유대인 극우파 청년 이갈 아미르의 총을 맞고 암살당하였다.[3] 네이버 옛날 신문기사

사실 이전부터 강경 극우파들이 총리를 노린다고 우려하던 염려에 라빈은 같은 유태인을 믿는다라고 넘겼지만 그만 그 염려가 딱 들어맞았다.

현재 종신형을 살고 있는 이갈 아미르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며, 심지어 법적으로만 결혼한 자신의 부인(수감자도 아니다)과 옥중에서 합방해 성관계까지 가졌다. 그런 주제에 독방 처벌이 가혹하다느니, 팔레스타인 수감자도 이렇게 생활하지는 않는다고 징징거렸다.[4] # 게다가 하레디에서 넣어주는 사식도 받아먹고 일절 생활에 불편도 없으며 하레디들이 배신자 죽인 애국자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것 보고 이스라엘 보수파조차도 기가 막혀 국가원수를 죽이고 애국자라니 이게 대체...하는 지경이니 말 다했다. 이집트에서 안와르 사다트암살당하던 걸 보고 자기네 대통령을 암살하다니 비웃던 이스라엘이었으니 아랍 여론에게도 웃기는 유태인놈들 이라고 셀프디스당한 셈. 게다가 이갈은 20년넘게 버젓이 살아있다.

국내에서 라빈의 무덤을 참배하던 히잡을 쓴 팔레스타인 여성이 슬피 울며 안타까워하는 사진이 보도된 바 있을 정도로, 팔레스타인 측에서도 오슬로 평화협정을 환영했고 과거 죽일 놈이었던 이스라엘 군인 출신 라빈의 사망을 안타까워했다. 야세르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 정치인들도 그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해서 애도했다.

사망하기 직전에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게 라빈 총리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되었다.

  1. 분란의 땅에 평화를 이식한 협약의 체결자들을 말한다. 93년, 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야세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총리, 남아공 대통령 클레르크가 공동 선정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협약들이 같은 해에 체결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둘 다 다른 의미의 헬게이트를 불러왔지만
  2. 이 공으로 아라파트 의장과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3.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죽인 그 남자에게 결혼신청이 쇄도하는 웃지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4. 진짜 개소리다.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은 온갖 고문에 별별 탄압으로 악명높은 수감생활이 기다리고 있거늘... 그저 독방생활한다고 징징거리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