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궁

仁慶宮

1 개요

광해군 때 지었으나 공사가 마무리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조반정이 일어나 그 이후엔 왕은 사용하지도[1] 못한 궁궐. 그 크기는 경복궁보다도 컸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2 역사

조선의 제 15대 왕 광해군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궁궐에 집착하였다.[2] 임진왜란 떄 불탄 궁궐들인 창덕궁, 창경궁을 재건 한 것은 당연하다손 쳐도 굳이 새롭게 두 개의 궁궐을 지은 것은 집착이라고 봐야한다. 이 두 개의 궁궐 중 하나가 바로 인경궁이다.[3]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정초본) 111권, 광해 9년(1617년) 음력 1월 18일 3번째 기사를 보면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비망기로 ‘현재 쓰고 있는 법궁(法宮)에 혹 사고가 있을 경우 옮겨갈 곳을 미리 강정해 두는 것이 옳다. 경복궁(景福宮)은 공사가 아주 커서 오늘날의 물력을 가지고는 결단코 쉽사리 조성을 의논하기가 어렵다.[4] 그러니 인왕산(仁王山) 아래에다 잘 요리해서 지나치게 높고 크게 하지 말고 시원하고 깔끔하게 짓는다면 편리할 듯하다. 속히 긴 담장을 쌓고 남아 있는 재목을 가지고 조하(朝賀)를 받을 정전(正殿)을 짓기만 한 다음 다시 형세를 살펴서 다 짓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선수 도감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서 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도감의 제조인 호조 판서 이충, 예조 판서 심돈, 병조 참판 이병이 모두 정고(呈告) 중에 있어서 좌기(坐起)할 수가 없습니다. 제조인 이충·심돈·이병을 명초(命招)하여 출사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광해군이 윤허했다."

라고 적혀있는데 이것이 인경궁 공사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당초에는 단지 이궁(離宮)으로만 짓는 것이었는데 공사가 진행되면서 당시 법궁이던 창덕궁은 물론 예전의 경복궁보다도 크게 짓게 되었다.[5] 궁궐의 대부분 건물들에는 청기와를 올릴 정도였다.[6]

계속 공사를 하던 도중 인조반정이 일어나 공사가 중단되게 된다. 그후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창덕궁, 창경궁의 여러 건물들이 불타 이를 복구하기 위해 인경궁의 많은 전각들이 옮겨가 두 궁궐을 짓는데에 사용되었고 또 궁궐 공사 뿐 아닌 병자호란 뒤 1648년(인조 26)에 청나라의 요구로 홍제원에 역참을 만들 때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 등의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서도 몇몇 건물들이 옮겨갔다. 물론 그냥 없어진 건물들도 많았다. 이렇게 여러 군데로 전각들이 이건(移建)되고 철거되면서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진짜 오리지널 인경궁 전각은 편전인 광정전 밖에 남아있지 않다.[7]

3 주요 전각

  • 명화문(明化門) : 인경궁의 정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중층으로 되어있었다. 창덕궁 돈화문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 홍정전(弘政殿) : 인경궁의 정전. 청기와 건물이다. 인조 이후 골격에 심한 변형이 가해진 상태로 창덕궁으로 옮겨져 내전의 경훈각(2층은 징광루) 건물이 되었다가[8]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로 소실되었다.
  • 광정전(光政殿) : 인경궁의 편전. 현재는 창덕궁의 선정전으로 사용하고있다. 그래서 유일하게 궁궐 전각중 청기와를 하고있다. 현재 하나 밖에 안 남은 인경궁 전각이기도 하다.
  • 경수전(慶壽殿) : 왕의 침전이다. 1647년 창덕궁 중건 때 헐려가 대조전 건물이 되었으며 1833년(순조 33년)에 불타 인경궁 시절의 건물은 없어졌다. 다음 해에 대조전은 옛 경수전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지만 1917년 창덕궁 침전 화재 이후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 대조전을 지으면서
경수전의 모습은 완전히 볼 수 없게 되었다.
  • 흠명전(欽明殿) : 대비의 침전으로 1632년 8월 13일(양) 선조 계비 인목왕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 함인당(函仁堂) : 내전 건물 중 하나로 확실한 용도는 모르지만 아마 경복궁의 경성전, 연생전 같이 침전의 부속건물이었던 듯 하다.
역시 1647년 헐려 창경궁으로 이전했는데 옮긴 후 어떤 건물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편이다.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설은 창경궁의 함인정(函仁亭)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1652년(효종 3년) 창덕궁과 창경궁의 수리 과정을 기록한 책인 『창경궁 수리소 의궤』에 의하면 함인정의 9칸 중 5칸은 인경궁 경수전(慶壽殿)의 후행각을 옮겨 지은 것이고 나머지 4칸은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하여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인경궁 함인당이 창경궁 통명전[9]의 서책방(西冊房)과 동행각으로 옮겨 지었다고 했다.[10]
  1. 왜 굳이 이렇게 쓰냐면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 창경궁이 불탄 이후 인목왕후가 이 곳에서 기거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인조는 경덕궁에서 머뭄.
  2. 왕권 강화라는 말도 있으나 광해군 일기 - 광해군 14년(1622년)의 기사에 "훈련도감에서 도성 내의 군사가 3000도 채 안되고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들이 너무 힘들어하는데 이 상태에서 또 변경으로 보내면 궁성을 호위할 병력도 없어질 것" 이라고 광해군을 만류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즉 자신을 호위할 병력까지도 전쟁 대비랍시고 변경에 보내 배치시키는 것 으로 왕권 강화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3. 다른 하나는 경덕궁(경희궁)
  4. 인경궁의 공사가 더 컸으니 이는 말이 안되는 소리다. 경복궁 공사를 하지 않는 이유를 공사가 크다는 것으로 댄 건 핑계일 뿐, 실상은 경복궁이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말이 많아 심리적으로 불안해 했던 광해군이 꺼렸다는 의견이 정설이다.
  5. 10배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경복궁과 거의 비슷하거나 아니면 1.5배 정도 더 크다. 참고로 경복궁의 10배면 남북 축으로는 이미 한양도성을 넘어간다.(...)
  6. 청기와를 만드는 데 쓰이는 주 재료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이것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인데 광해군 시기엔 국방력 강화를 위해 그렇잖아도 백성들의 삶이 크게 고달팠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염초를 국방 강화와 궁궐 공사라는 대공사 두 군데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삶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7. 주요 전각 항목 참고
  8. 이런 전각을 옮길 경우엔 옮긴 후에도 원래 용도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창덕궁엔 이미 인정전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없어 건물의 골격을 바꾼 뒤 다른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
  9. 왕비의 침전이다.
  10.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