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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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정세영(鄭世永)
출생1928년 8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사망2005년 5월 21일
본관하동 정씨
학력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가족정주영, 슬하 1남 2녀(아들 정몽규)

현대자동차의 창업주.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鄭周永)의 넷째 동생이다. 정인영, 정순영은 그의 형이고, 정상영은 그의 동생이다. 1928년 8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1]마을에서 태어나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1953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영어 실력이 좋은 편이다.[2]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3] 1965년 태국 파라티-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였다[4].

1967년 현대자동차(현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계열사)를 설립하고 사장을 맡았다. 이듬해 첫 자동차 코티나를 생산하였다. 하지만 코티나는 악평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974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산 모델 자동차인 현대 포니를 생산하였다. 포니 자동차는 평가가 긍정적이었다. 1976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포니를 수출하였다. 이 때부터 포니 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는지 탈모가 진행되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현대그룹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낸 뒤, 아들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 된다. 현대자동차의 개인 주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30년간 현대자동차를 직접 일구어 온 것을 생각한다면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정주영의 아들들 입장에서는 그룹의 알짜배기인 현대자동차를 숙부에게 넘겨줄 리 없었다. 그래서 정세영은 현대자동차의 덩치가 너무 커지면 오히려 자신에게 경영권이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기아자동차를 인수하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1998년 12월, 결국 정몽구가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하고 정몽규는 부회장으로 밀려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영은 우호 지분을 끌어모아 주주총회에서 정몽구 측 인사들의 이사 선임을 저지하는 등 끝까지 현대자동차를 놓지 않으려 했으나...

정주영의 한마디[5]에 포기하고 만다. 1999년 3월 5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몽구의 현대산업개발 지분과 정세영-정몽규 부자의 현대자동차 지분을 맞바꾸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32년 만에 자동차 업계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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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정세영 회장은 현대자동차 회장 이임식에서 회사 사가(社歌)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만큼 억울했던 모양.[6]

만약 정세영이 현대자동차를 조카에게 넘기는 데 계속 반발했다면 현대그룹은 한바탕 홍역을 치뤘을 판이었다. 실제로 그 다음해인 2000년 세칭 '왕자의 난'이라 불린, 정몽구-정몽헌 사이의 그룹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던 것, 2001년에 정주영이 별세한 것을 고려한다면 그룹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었다.

이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있다가 2005년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 정주영의 호 아산은 이 마을 이름에서 따 왔다.
  2. 정세영회장의 영어 인터뷰. 영상은 당시 포니의 개발수장으로 영국에서 '모셔 온' 조지 턴블의 다큐멘터리이다.
  3. 앞서 언급했듯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인연 때문에 미8군이 의뢰하는 공사를 현대건설이 쉽게 다 따낼 수 있었다고 한다.
  4. 이 공사 현장에 신입사원 이명박이 파견나갔다.
  5.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 라고 말했다고. 이 말은 정세영의 자서전에도 나온다. 당시 세간에서는, 정세영 회장도 결국 전문경영인에 불과했다고 평했다.
  6. 그러나 큰 형인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는 냉혹했지만 형으로서는 좋은 형이었는지 이후 정주영 회장에 대해 여전히 '존경하는 분'이라고 했다. 실제로 2001년 정주영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크게 대성통곡했던 사람이 정세영 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