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

1 중국의 인물 程喜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신백(申伯).

조예 때 청주자사로 임명되었고 전예가 여남태수로 임명되어 청주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자 정희는 전예에게 복종하지 않아 군사를 의논할 때 서로 어긋나는 일이 많았으며, 조예가 좋은 진주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에 전예에 대해서 전공이 있지만 금령이 느슨해 노획한 것들이 많았지만 모두 군사들에게 주고 관에 납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로 인해 전예가 공을 세웠음에도 열거되지 않았다.

관녕에 대해 고결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또는 늙고 병들어 쇠약해져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라는 조서가 오자 관녕이 스스로 힘쓰려고 애쓰기 때문에 부축은 필요없지만 세상을 피한 환경에서 자라서 관직에 익숙치 않으며, 나이가 많고 지력이 쇠해 관리가 되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사양한 것으로 관녕이 만년에 자신의 심지와 행위를 보존하려 한 것으로 고상함을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조방 때 정희는 정북장군이 되어 땅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두서가 유주자사, 건위장군, 사지절 호오환교위에 임명되자 원간이 정희와 전예의 일을 들어 두서에게 정희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는데, 두서가 이 일을 듣지 않다. 결국 1년 후에 선비족 대인의 아들이 관소를 지나지 않고 기병 수십 명을 인솔해 유주성으로 오자 대인의 아들을 따라온 한 소년을 보고하지 않고 멋대로 참수하자 정희가 이에 대해 상주해 탄핵했다.

정동장군을 지낼 때 주건평이 정희에 대해 예언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왕창, 왕숙에게 한 예언과 함께 맞지 않았다고 한다.

2 중국의 인물 鄭煕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현도군 고현현의 현장을 지내다가 257년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릴 때 왕간을 칭찬하면서 관직에 임명할 때 정희가 관리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살해되자 이에 대해 왕간이 그의 시체를 등에 업고 정희의 고향까지 운반했다고 언급된다.

해동역사의 제5권인 세기의 사군사실과 제67권인 인물고에서 사군 이전의 인물을 열거한 것에서 나오는데, 한사군의 시기가 전한의 한무제 시기인 것을 고려하면 이는 맞지 않은 것으로 사군 이전의 인물에서 나온 왕간에 대한 설명에서도 정사 삼국지에 나온 내용에 따라 서술되었다.

이 때 기록에서 세기의 사군사실에는 정희가 죽었다는 내용만 나오며, 인물고의 사군 이전의 인물에서는 정희가 죽고 왕간이 시체를 옮겼다는 내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