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중동전쟁

Yom Kippur War

1 개요

전쟁이 발발한 당일이 '욤 키푸르'라는 유대교 전통의 속죄일[1]이었기 때문에, 흔히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10월 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기간은 1973년 10월 6일 ~ 1973년 10월 26일.

2 대(大)복수극의 시작

1970년 나세르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도 보였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주변국들과의 공조를 강화하여 결국 시리아는 또 이집트와 손을 잡는다.

사다트는 군대의 체질과 훈련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고,[2] 이전의 전훈(戰勳)을 연구하여 대응 방법을 연구하고, 최신예 병기들을 대거 도입하고 철저한 훈련과 함께 군조직의 개편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장교단의 경우, 병사/수병/부사관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이전의 귀족적 악습을 타파하고, 젊은 대학생들을 장교로 선출시키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 6일전쟁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맞고 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모사드는 사전에 이런 움직임을 감지했기에, 일단은 전쟁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골다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는 지금까지의 연승에서 비롯된 긴장감 상실과 아랍군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당시 이집트는 진짜 전쟁준비를 숨기기 위해 몇 차례씩 허울뿐인 동원령을 발령했는데, 이스라엘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똑같이 동원령을 내리려면 동원령에 소집된 국민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집트의 동원령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무리였다. 전쟁 개시 직전에 서로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결정적 정보들을 확인한 뒤에도, 후술할 외교적 이유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결정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골다 메이어 수상과 모세 다얀 국방상이 있는 노동당 내각의 발목을 붙잡고 만다.

한편 사다트는 공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 반대로 공격할 생각을 숨기고 이스라엘이 긴장을 풀게 만드는 술책을 썼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몇개월에 한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협박을 날렸던 것이다. 처음에야 여기에 잔뜩 쫄았던 이스라엘이었으나 이집트 측이 실제로는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를 일종의 정치적 제스쳐로 파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공갈 협박만 날리는 상황이 사다트 집권 후 몇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이스라엘 측은 안와르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된다. 심지어 시다트가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전쟁협박에도 어디서 구라야?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그리고 마침내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고[3],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의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되었다.

3 전쟁 경과

1973년 10월 6일 ~ 10월 15일: 시나이 반도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초반에 큰 피해를 보게 된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진지로 구성된 바레브 선을 돌파하기 위해 8천이 넘는 특수부대를 사전에 도하시켜 미리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격준비사격 뒤 운하 도하를 개시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뚫어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요새 철거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레브 선을 단 9시간 만에 돌파해버렸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병사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다. 이집트는 이러한 바레브 선의 약점을 꿰뚫었고, 이집트는 사전에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다. 이 돌파작전에서 이집트군의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외의 대성공에 좋아서 날뛰었다고 한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252기갑사단 예하 전차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對)전차 방어전을 구사한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진지에서 대전차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이집트군은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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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 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대수의 10%가 넘는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었던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앞으로도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고,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러시아제 SA-6 지대공 미사일과 23밀리 4연장 기관포를 탑재한 '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컷던 것이다.

10월 8일에는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대전차 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가장 큰 것은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 때문이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다. 당시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교전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RPG보다 더 강한 소련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킨다.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를 쏘고 숨는다.[4]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부순다.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페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요리한다.

물론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새거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다. 앞서 2일 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고원까지 하면 8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 물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측의 T-55, T-62 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보유수가 더 늘어났다. 하지만 노련한 전차병들의 피해는 복구가 불가능한데다가 전차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對)전차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고,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 원래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善戰)을 펼쳤던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원래 소련식 군사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 6.25 때에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된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죽은 제갈량에게 쫓겨 가던 사마중달의 중동판?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리멸렬해서 상급 지도부가 공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도 여유를 얻어 일부 동원병력을 먼저 시리아 전선에 돌리는 도박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나이 전선에서 우세를 차지한 이집트군은 예상되는 역습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시간만에 점령하고,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數的) 우위로 돌파하며 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강 요단강가까이에 이르렀다.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를 제물(祭物)로 바치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용병력을 대부분 골란고원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골란고원의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현역 부대인 제7기갑여단, 그 중에서도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 하에서도,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하면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벌었다.

4 미국의 장비 지원과 역전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지막 보루인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8일 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전술핵탄두 조립을 승인했다. 특급 비밀이어야 할 핵무기의 준비는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게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여차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에 쏴버리겠다는 협박이자,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것을 미국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계산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9일 오전 미국 외교부에 날아들었다. 미국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소식에 의외로 시큰둥하였다. 드디어 저 골칫덩어리가 간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는데 이스라엘이 대놓고 핵무기를 조립하면서 죽더라도 아랍놈들 다 끌어안고 죽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소련과 접촉, 저 미친 놈들을 막기 위해서라도 도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아무래도 미친거같아요!닉슨의 이러한 시큰둥한 반응 때문에 유대인 부호들이 열받아서 유대인 기자인 번스타인을 이용,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했다는 음모론에 제기되기도 했다.

시리아와 이집트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은 48시간 만에 이스라엘군 17개 여단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시리아-이집트 연합군의 기습으로 패전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 군부는 마지막 카드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스라엘 여성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면서[5] 비밀리에 미국 워싱턴으로 날아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외교 안보 보좌관에게 매달렸다. 키신저의 회고록 『위기Crisis』에 따르면 외교적 프로토콜을 무시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워싱턴에 나타난 메이어 총리는 1시간 동안 닉슨 대통령을 붙들고, 눈물로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신형 무기들을 이스라엘로 긴급 공수하고, 첩보위성기로 아랍군의 동태를 알려줘 전쟁의 흐름을 뒤집었다. 막판에 승리하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지불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아, 전사자가 2,500명[6], 부상병 7,500명에 이르렀다. (김재명,『오늘의 세계 분쟁』, 235쪽)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그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1을 포함한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막 배치가 시작된 스마트 폭탄을 비롯한 정밀유도 병기는 물론, 일설에는 핵무기까지 포함된 대규모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7]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8]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다. 무기를 줘도 운영못해 패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골란 고원 작전

미국의 지원에 더해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에 격퇴당해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와 요르단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다. 그러나 요르단군은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도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이스라엘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으며,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개관광 당하는 등 급박한 위기에 몸빵이 되어서 시리아군을 구원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사우디아라비아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기 참전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어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역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고, 16일 새벽 아리엘 샤론 소장(나중에 수상이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하해,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3군 병력을 포위하면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함대함미사일 가브리엘 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고속정 3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가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13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27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1973년 10월 15일 ~16일: 시나이 반도

이스라엘군이 막판에는 전쟁에 겨우 승리하긴 했지만, 이스라엘군이 자랑하던 정예 기갑부대는 이스라엘군의 자만심 때문에 대전차 보병대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특히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된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예비군을 위한 예비 장비와 물자는커녕 현역병을 위한 장비와 물자, 심지어 무기와 탄약도 태부족이라서, 미국이 대량원조하지 않았으면 포탄과 총알 같은 기초적인 탄약이 떨어져서라도 망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여론이 빗발쳐, 결국 이전까지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 다얀 국방장관은 하루아침에 매국노가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동의 지역강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졌으며, 언제든지 전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비교적 온건파인 노동당 내각을 무너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과격파들간의 난맥상을 낳게 된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善戰)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나름대로 당당했다. 일단 이집트는 이 전쟁을 자국이 이긴 전쟁으로 생각한다. 사실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스라엘군이 전투에서는 반격으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략적으로는 시나이 반도를 획득한 이집트군이 승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9] 시나이 반도는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7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년 워싱턴 협정으로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것으로 이스라엘 메나헴 베긴과 함께 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지만, 아랍의 배신자로 여긴 이들에 의해 1981년 암살당한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권좌에 앉아 30년 간 집권하게 된다.

이는 아직도 골란고원을 못 찾은 시리아와 비교되는데, 물론 골란고원의 전략적 가치는 단순한 완충지대인 시나이 반도와는 다른 성격이 있다. 골란고원을 차지하면 고지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요르단 강의 수원을 차단하여 이스라엘의 목을 죄는 게 가능하게 되기 때문. 단 요르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양보한것은 시나이 반도를 지키고 유지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인구 부족탓도 분명히 있었다. 한마디로 땅이 있어도 유지 관리할 인구가 너무나 부족했던 것이다.

5 영향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가지 일화를 만들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때의 오일쇼크로 이스라엘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서 1970년대 중후반에 두자릿수대, 1980년대 상반기에 세자릿수대 인플레이션을 기록할 정도의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고,[10]덕택에 1977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집권했음에도 어절수없이 시나이 반도를 내주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또한 이전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전차부대가 대전차미사일에 농락당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군사학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베트남전에서 이미 위력을 보여준 지대공미사일은 여기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미국에 자극을 주어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부활하는 데에 기폭제 역할을 한다.

당시 23살이었던 건축학도 아모스 기타이는 헬리콥터 구조대로 참전했다가, 전장을 8mm 카메라에 담았던 것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으며, 훗날 '키푸르'라는 제4차 중동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골란고원 전선의 붕괴를 막은 이스라엘군 제77전차대대장 카할라니의 수기 《골란고원의 영웅들》은 현대 전차전의 실상을 잘 기록한 수작으로 꼽힌다.

톰 클랜시의 소설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는, 시리아군의 초기 공세에 밀린 이스라엘군이 조립한 핵탄두가 행정 착오로 CAS 임무에 나가는 A-4 공격기에 장착됐다가 해당 항공기가 격추된 후, 20년 만에 테러리스트들이 이 핵탄두를 찾아내어 벌이는 핵 테러가 묘사된다.
  1. 유대교의 설날이라 할 수 있는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와 함께 일명 High Holidays라 불리는 유대교 달력의 주요 절기의 하나이며, 일년 중 가장 성스럽게 여겨지는 날이기도 하다.
  2. 다만 소련이 이스라엘을 몰아내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빡친 사다트는 개전 직전에 소련 고문과 기술자들을 모조리 내쫓아버렸다(…). 이후 사다트 대통령은 친미 노선을 밟게 되나 결국 그로 인해 죽음을 불러오게 된다.
  3.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거국적 공휴일이며, 이 기간에는 그 어떤 노동행위도 허용되지 않고 금식과 종교적 행사가 주를 이룬다. 심지어 유태인 출신 스포츠 선수들이 욤 키푸르를 이유로 경기를 거부한 경우도 있을 정도.
  4.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서포트를 해줄 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다.
  5. 별로 안 믿기지만, 골다 메이어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에 중도 좌파 출신에 속했다.
  6.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전사자가 2백 명도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초비상이었다. 이에 이집트군은 전사자 약 3,540여명, 부상병 8천여 명을 기록하여 피해는 조금 더 컸지만, 종전(從前)의 전쟁과 다른 피해를 이스라엘에게 안겨줬기에 크게 만족했다.
  7. 이스라엘 측은 아랍측이 전쟁발발 전까지 온갖 협박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선제공격을 옹호하려들지만, 국제법상 외교적 모욕이나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개전의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
  8. 원래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시나이 사막이 가로막는 이집트 방면을 제외하고는 작전 종심이 좁은 편인데다가, 적대적인 국가들로 3면이 포위되어 있고, 현대전에서는 동원령이 먼저 발령되는 쪽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당한 1차 중동전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의 기본전략은 선제공격으로 상대의 전력을 먼저 분쇄한다는 것이었다.
  9. 전쟁에서 승리라는 것은 전쟁 목적을 달성했느냐를 두고 따지지 피해 정도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피해 정도로 전쟁의 승패를 따지자면 임진왜란의 승자는 일본이고, 베트남 전쟁의 승자는 미국이다. 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의 전쟁 목표가 이스라엘의 멸절이 아니라 시나이 반도의 탈환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때문에 피해는 컸지만 전쟁 목표 달성을 이루었으므로 이집트의 승리라고 보는 것도 결코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다만, 시나이 반도의 탈환이 순수히 전쟁만으로 달성한게 아니라 협정을 통해서 달성했으므로 완전한 전쟁의 승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전쟁 전 협상 때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결국 전쟁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은 맞다.
  10. 특히 1984년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445%를 기록하여 기록적인 수준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