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제

동진의 역대 황제
5대 중종 원황제 사마예6대 숙종 명황제 사마소7대 현종 성황제 사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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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숙종(肅宗)
시호명황제(明皇帝)
연호태령 (太寧, 323년 3월 ~ 326년 1월)
사마(司馬)
소(紹)
도기(道畿)
생몰기간299년 ~ 325년
재위기간323년 ~ 325년

사마의의 고손자로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사마의의 6남 사마주, 그의 할아버지는 사마근, 그의 아버지는 진원제 사마예이다. 진문제 사마소는 사마의의 차남이자 사마주의 이복 형이니 결국 진문제 사마소는 증조할아버지뻘에 해당한다.

원강 9년(299년)에 진원제와 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수염이 노란색이었다고 하는데, 어머니 순씨가 선비족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사마소는 자는 도기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박식했다. 사마소가 어릴 때 장안에서 온 황제의 칙사가 물었다.

칙사: "네가 보기에는 태양이 멀리 있겠느냐, 아니면 장안이 더 멀리 있겠느냐?"
진명제: "장안이 더 가깝습니다. 왜냐면은 태양이 있는 곳에서 사람이 왔다고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 대화를 몰래 듣고 있었던 진원제는 주연을 베풀어 문무백관을 불러 놓고 다시 사마소에게 물어봤다.

진명제: "태양이 가깝습니다."
진원제: "아까는 장안이 가깝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명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눈을 뜨면 태양을 볼 수 있지만 장안을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문무백관들은 감탄했는데 특히 진원제는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는 철이 들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지간에는 화목했으며 어진 사람과 유학자를 존경하고 장졸과 백성을 사랑했다. 또 문장, 서예, 학문, 병법 모두 뛰어나 신하들도 감탄했고 인심을 얻었다. 건흥 초기에 동중랑장이 되어 광릉을 지켰다. 건무 원년(317년), 세자가 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태자가 되었다. 대장군 왕돈은 자기가 찬탈하는데 진명제가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가 효성이 없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모함하여 여러 번 폐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영창 원년(322년) 11월, 황제에 즉위했다. 태녕 원년(323년) 4월, 왕돈은 군사를 고숙으로 이동시켰고 이듬해 정월에는 충신 주숭 등을 죽이고 회계를 습격했다. 왕돈은 이때 친정하러 온 진명제의 진채를 형 왕함이 기습하게 했는데 오히려 개발렸다. 이에 왕돈은 절망하여 "실로 형님은 계집애와 같은 늙은 영감이었다. 아아, 우리 집안이 드디어 망하는구나!"라며 앓아누웠다. 거기에 진명제가 이 틈을 타서 기습해서 또다시 대패하자 그대로 넘어가서 죽었다.

그는 왕돈을 부관참시하고 전봉, 심충 등을 주살하고 반란을 평정했다. 그러나 왕씨 일족들을 죽이지 않았으며 왕돈의 가솔이 그를 안장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담당 관원이 왕도, 왕빈 등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왕씨 일가라고 무조건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명제는 왕도가 왕돈의 사촌동생임에도 반란 토벌에 공을 세웠다면서 상을 내리고 더욱 중용했다.

능력좋고 사람도 좋아 명군 자질이 컸지만 불행하게도 태녕 3년(325년) 윤8월, 재위 2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건강 동당에서 사망하고 무평릉에 안장되었다.

승상 왕도와 국사를 논하다 사마씨가 나라를 어떻게 얻었는 지 문의했고, 이에 왕도의 얘기가 진문제 사마소가 조위의 황제 조모를 시해하고 천하를 장악한 대목에 이르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진나라가 오래가지 못한 게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하고 책에 얼굴을 파묻으며 몹시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실제로 개국 이래 이미 막장을 달리던 중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