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제

동진의 역대 황제
서진 4대 민황제 사마업5대 중종 원황제 사마예6대 숙종 명황제 사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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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중종(中宗)
시호원황제(元皇帝)
연호건무 (建武, 317년 3월 ~ 318년 3월)
대흥(大興, 318년 3월 ~ 321년)
영창(永昌, 322년 3월 ~ 323년 2월)
사마(司馬)
예(睿)
경문(景文)
생몰기간276년 ~ 323년
재위기간318년 ~ 323년

1 개요

司馬睿
(276 ~ 322)

시호는 원제(元帝). 즉위 이전의 봉작은 낭야왕(瑯瑘王)[1]. 당대의 서예가로 글씨를 잘 썼다.

함녕 2년(276년), 낙양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경문이다. 낭야공왕 사마근과 하후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사마예 어머니의 이름은 하후광희(夏候光姬)이고 는 동환(銅環)이다. 아버지는 하후장(夏候莊), 할아버지는 하후위(夏候威)이며 증조할아버지가 하후연이다. 그래서 사마예는 하후연의 외증손자가 되는 셈이다.[2]

2 생애

서진팔왕의 난으로 막장이었을 때, 사마예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양보를 잘하고 도량이 넓어서 명성이 높았다. 15세에 사마근의 뒤를 이어 낭야왕(瑯揶王)이 되었으며 원강 2년(292년), 원외산기상시가 되어 업성에 있었다. 그러나 건무 원년(304년) 8월, 그의 숙부였던 동안왕 사마요가 성도왕 사마영에게 피살되었다. 이걸로 사마요가 문앙에게 지은 중대한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뤘다. 사마영이 문앙의 원수를 갚아준 셈이 되었다. 이에 사마예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는데 사마영은 사마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남몰래 도망쳐 하양을 거쳐 낙양에 이르러 모친을 모시고 임지인 낭야로 돌아왔다.

이듬해 8월, 사공이었던 동해왕 사마월이 그를 평동장군으로 임명하여 서주를 감독하게 하고 하비를 지키게 했다. 이에 사마예는 자신의 친한 벗이었던 왕도를 사마에 임명하여 병무를 맡겼다. 영가 원년(307년) 7월, 회제 사마치는 사마예를 안동장군으로 임명하여 양주와 강남을 총관장하게 하고 건업을 지키게 했다. 영가 5년(311년) 5월에는 진동대장군이 되어 양주, 강주, 상주, 교주, 광주 등 5주의 업무도 맡았으며 건흥 원년(313년), 민제 사마업이 즉위하자 좌승상이 되었다.하지만 장안을 구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지 건흥 3년(315년)에는 승상이 되었고 건흥 4년(316년), 장안이 곧 유총에게 함락될 것을 예견한 사마업은 사마예에게 조정의 모든 권한을 맡기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이 조서는 길이 늦어 이듬해 2월에야 받을 수 있었고 3월, 진(晉)왕에 즉위했다.

결국 태흥 원년(318년), 사마업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마예는 건업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사마예는 건업(建業)의 이름이 서진 민제 사마업(鄴 또는 業)의 이름과 같다 하여 건업의 이름을 건강(建康)으로 바꿨다. 사마예는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는데 대신 서진을 멸망시킨 유총석륵은 이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사마예는 동진을 건국했으나, 초기에는 명성이 낮고 북쪽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라 강남 호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지방 풍속에 따르고 청렴한 정치와 은덕으로 보살피라는 왕도의 조언을 따르고 호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치니 차츰 호족들이 귀순해 왔다. 사마예는 왕도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의 사촌형 왕돈을 정남대장군에 봉했는데 장강 북부 일부 지방을 회복하여 강남이 안정되었다.

영가의 난에 휘말려 행방불명된(실은 전온에게 팔려가 노비가 된) 자신의 일족 임해공주가 우연히 건강에 들렀다가 사마예를 만났다. 임해공주는 전온의 딸이 자신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저지른 것을 사마예에게 알리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머리끝까지 빡친 사마예는 임해공주를 구출해줌과 아울러 임해공주에게 가혹행위로 일관한 전온의 딸과 그 아비 전온을 잡아들여 참수해버렸다. 이후 임해공주와 종정 조통[3]의 중매를 서준 후 그대로 조통에게 시집보냈다.

사마예는 왕도와 왕돈 등 낭야 지방 호족과 도움과 강남 호족의 연합으로 동진을 건국해 강남을 중원의 전화에서 지킨 것은 인정할 만 하다. 그러나 큰 뜻이 없었고 자질이 평범하여 강남에서 안주했다. 건흥 원년(313년), 사마업이 사마예에게 북벌을 명령했으나, 사마예는 강남의 안정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군자좨주 조적이 북벌을 건의했을 때는 마지못해 그를 예주자사로 봉하고 경구를 지키게 했다. 조적은 뛰어난 용병술로 장강을 건너 회음과 그 일대를 회복하고 남하하는 석륵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사마예의 무관심과 동진 조정의 지원 미비로 결국 철수해야 했고 화병을 앓다가 옹구의 진채에서 숨을 거뒀다. 봉조정 주숭은 북벌을 먼저 해서 중원을 수복하고 칭제할 것을 원했다가 분노한 사마예에게 죽을 뻔 했다.

무엇보다 사마예는 인재 선발을 부당하게 했다. 점차 왕도와 왕돈 형제를 멀리하고 남의 비위를 맞추어 환심을 사는데 뛰어난 유외, 술에 취하면 가 되는 조협을 심복으로 중용했다. 이에 일찍부터 반역의 뜻을 품은 왕돈은 불만을 가지고 상소했으나, 사마예는 그냥 씹었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왕돈은 유외와 조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창에서 군사를 일으켜 3월에 건강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예는 조협과 유외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들에게 말을 주어 각기 스스로 살 길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유외는 간신히 후조의 석륵에게 망명했지만[4] 조협은 연로해서 말을 못 타는 바람에 멀리 가지 못했다. 거기에 그는 인심을 잃어 결국 강승에서 사로잡혀 즉결처형당하고 머리는 건강의 왕돈에게 보내졌다.

왕돈은 승상이 되었으나, 교만하고 횡포함이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공물은 대부분 그에게 들어가고 심충, 전봉, 제갈요 등을 앞잡으로 세웠는데 이들은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남의 땅과 가옥을 멋대로 침입하고 빼앗고 대낮에도 약탈을 일삼았으며 옛 무덤을 도굴했다. 이로 인해 사마예는 분통이 터져 윤11월에 재위 6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듬해 2월에 건평릉에 안장되었다.
  1. 제갈량이 태어났던 그 서주의 낭야현 맞다.
  2. 사마근의 부장이었던 우금과 썸씽이 있어서 사마예는 사실 우금의 아들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진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3. 조운의 아들과는 동명이인.
  4. 그러나 유외는 이로부터 11년 후인 333년, 석호유요의 아들 유희와 전조의 잔당을 토벌하러 장안을 공격할 때 승상좌장사로 종군하다가 전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