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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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蔡萬植), 1902년 7월 21일(음력 6월 17일) - 1950년 6월 11일)

1 개요

대한민국소설가. 호는 백릉(白菱), 혹은 채옹(采翁). 전라북도 군산[1] 출생. 태평천하 등으로 중고등학생에게도 잘 알려진 소설가이다.

2 생애

1902년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출생. 서울의 중앙고보를 고쳐 일본 와세다대학(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써 온 소설로 등단하였고, 곧 기자생활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동반자 작가[2]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풍자적인 성향의 작품을 발표,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텔리와 빈대떡>으로 입지를 굳혔다.

다작 작가로 유명하며 소설, 희곡[3] 동화, 수필, 평론 등 2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서동산이라는 가명으로 최초의 근대적 탐정소설인 염마를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더 대단한 것은 채만식은 평소에 글이 자신의 마음에 들때까지 고치는 경우가 많아서 원고지 한 장 분량의 초고를 쓸 때에도 10장은 기본으로 버리고 썼다는 사실이다.

잦은 검열 기준을 넘나드는[4] 풍자적 성향의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다가, 그 이후 독서회사건으로 인하여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인하여 어쩔수 없이 일제에게 굴복하였다.

3 친일행위와 그 이후

다른 친일파 문학가처럼 강연과 친일적 소설과 시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그 행적에 별로 튀는 행동도 거의 없었고, 적어도 채만식은 광복 이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자신의 친일을 시인한 소설을 써서, 변명이나 하고 때론 큰소리치는 다른 친일문학가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친일 행위를 한건 정당화될 수 없지만, 채만식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단 양심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김동인이나 이광수가 친일파라는 걸 애써 스스로 변명하던 걸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스터 방>이나 <논 이야기> 등으로 미군정 하의 남한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5]을 남기기도 하였다.한국전쟁정확히 2주(정확히는 6월 11일 사망)앞두고 낙향한 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사망했다.[6]

그가 죽기 두어달 전에 남긴 말은 이것이다.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지 20권만 보내 주소.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본 일이 없네. 이제 임종이 가깝다는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히 놓아 보고 싶은 걸세.[7] " 만약 그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면 다른 친일 문학가들처럼 납북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연세대학교 최유찬 교수는 자신의 저서 <문학의 모험>에서 채만식의 친일행위를 무조건 비판하기만 하는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또한 이광수나 최남선과 같이 친일하고도 그걸 변명하고 때론 큰소리치던 거와 달리 인정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돌베개 출판사에서 쓴 친일파 관련서적에선 이효석과 같이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인 평을 내리고 있다.

평소 육식을 매우 즐겨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도 밥상에는 꼭 고기 반찬을 올렸다고 한다. 하루는 지인이 채만식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밥상을 보고 이토록 고기를 즐기니 채(菜)만 식(食)이 아니라 '육만식(食)'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단다. 이런 습관에서 기인했는지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음식 및 식사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상세한 편이다..

결벽증이 심해서 항상 다른 집에 식사를 얻어먹으러 갈때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따로 챙겼으며 작품을 쓸때 원고지 수를 항상 확인하고 그래서 담당 기자가 엄청 까다로워했다고 한다.

4 대표작

그 외 다수

  1. 정확히는 현재 군산시의 일부인 옥구군, 그것도 구 임피군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이전 책에서는 군산 출생이 아니라 옥구 출생이라고 써 있다.
  2. 당시 유행하던 카프계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와 바슷한 경향의 소설을 쓴 일련의 작가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 동반자 작가의 대표적인 예로 이효석이 있다.
  3. 동반자 작가 시절에는 오히려 소설보다 희곡을 많이 썼다.
  4. 마르크스막걸리라고 돌려쓰는 등... 이런 경향은 치숙에서 잘 드러난다. 후기 소설을 보면 검열때문에 몇몇 고유명사는 복자처리해서 나오기도 한듯 하다. ex. 청산가리 -> ○○칼리
  5. 소설 속에 나오는 미 육군들의 모습도 그리 좋게 나오지 않는데, 거만한 상급자라는 투로 표현했다.
  6. 사인은 결핵이었다. 당시 결핵은 돈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치료가 가능했었지만 채만식은 그럴 돈조차 없었다. 게다가 당시 그의 하나뿐인 아들도 병에 걸려 자신의 병세 또한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병간호를 하느라 몸을 돌보지 못하였다.
  7. 평소 채만식은 결벽증이 좀 있어서 글이 자신의 마음에 들때까지 고치는 경우가 많아 원고지 한 장 분량의 초고를 쓸 때에도 10장은 기본으로 버리고 썼다고 한다. 또한 정장에 웃는 포즈로만 사진을 찍었고 남의 집에 갈 때에도 항상 자신의 개인 수저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8. 채만식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나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9. 광복 직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과 변명을 소설의 형식으로 써낸 작품이다. 역시 생전에는 단행본이 발간되지 않았다.
  10. 소설이 아닌 희곡 작품이다.
  11.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12. 193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3. 1948년에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