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정통론

蜀漢正統論

1 개요

촉한한나라를 정통으로 계승한 국가라는 주장을 말한다.

유교가 주요한 통치이념이었던 중국의 왕조들은 어떤 왕조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왕조는 그렇지 않은가를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보통 중원을 통일한 국가들은 그 정통성을 인정받아 왔으므로, 후한이 멸망된 후에는 삼국을 통일하였던 서진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여러가지 주장들과 근거들이 얽혀 삼국시대에 한나라의 정통을 어느 국가가 이었는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게 된 것인데, 촉한 정통론은 삼국시대가 끝나고 중국 대륙이 다시 나뉘고 통합되는 과정에 등장한 새로운 왕조들이 한나라와 서진 사이에서 촉나라가 한나라의 정통을 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주장이다.

촉한정통론의 정통성은 전왕조인 한을 기준으로 삼는다. 한 황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촉한을 건국했던만큼, 국가간의 세력보다는 전왕조와의 연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마찬가지로 동진과 바로 이어지는 남조 또한 북조에 비해 세력이 작고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조에서 나온 수에게 멸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논리가 있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 촉한정통론이 동진시기부터 부각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촉한정통론의 변천과정

2.1 당시의 맥락

역사적으로 촉한정통론은 후한말의 한실부흥이라는 명분론에 맥이 닿아 있다. 이렇게 한실부흥에 집착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한나라의 독특한 역사적 위상 때문이다. 전설적인 은, 주를 제외하고 매우 잠깐 존재했던 통일 진나라를 제외하면, 한나라는 역사상 중국인들이 경험한 실제적인 첫번째 통일왕조였으며, 그 건국과정도 매우 신화적이고 상징적이었다. 오죽하면 현대까지도 그 겨레를 '한족(汉族/漢族)'이라 부르고, 중국어를 '한어(汉语/漢語)'라 일컫겠는가. 한실은 전한과 후한을 모두 합쳐 400여년간 지속되었으며, 초한대전으로 상징되는 건국신화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유씨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신념을 만들었다. 때문에 전한과 후한이 가까스로 이어졌듯이, 촉한도 후한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삼국지연의에서도 촉한의 사신 진밀 대신 장온의 논쟁[1]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위와 진과 병립하던 왕조는 물론 손씨의 오나라도 존재했으나, 오나라는 한나라와 연계되는 연결고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고작해야 남북조시대 왕조(오-동진-송-제-양-진, 소위 육조)의 정통으로 보는 일부 견해 외에는 철저히 외면 받은데 비해 촉한은 왕조를 창립한 유비가 유승의 후예로서 고조 유방과 한나라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명분을 갖추었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생각들이 다음 시대로 전해지며 자연스레 촉한정통론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2.2 위진남북조시대의 정통론

처음으로 삼국시대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인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는 차별을 명확히 하고자 위나라 군주만을 황제로 칭하여 그들의 연호를 연도 기준으로 삼았고, 촉한의 군주인 유비유선은 각각 선주와 후주로, 동오의 군주는 이름으로 호칭하여 위-진을 정통으로 여겼다. 이후 삼국 중에서 조조의 위를 정통으로 여기는 주장이 상당히 우세했다. 고려의 금석문은 고려의 태조 왕건의 업적을 조조의 그것에 비유하며 '원흉을 없앴다'라고 언급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위를 정통으로 여기는 사관은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듯하다.

다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위를 계승한 진 시대에 나온 서적이였기 때문에 조조와 위나라를 정통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정도는 감안하여야 한다. 위의 행적들에서 언급되었듯이, 후한 말에 조조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진의 창립자였던 사마염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고, 황제뿐 아니라 그 밑의 신하들인 석숭이나 왕개 역시 횡포가 심하여 시간이 갈수록 민심을 잃고 있던 상태였는데, 결국 팔왕의 난과 같은 사화들이 발생한 이후 중원은 장성을 넘어 남하한 이민족들이 차지하였고, 서진의 왕조들은 장강 이남으로 도망쳐 동진을 건국하였다. 바야흐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정치계인사들의 부조리함으로 인하여 동진은 이민족 왕조에 비해 국력에서 열세에 있었고, 더욱이 권신이었던 환온-환현 부자가 국정을 전횡하며 선양까지 노리는 상황이었다.[2]

이러한 분위기에서 환현이 한-위-진의 전례에 따라 선양을 받으려는 계획을 부정하기 위해 등장한 논리가 촉한정통론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나라 헌제조비한테 선양해준 것은 정통성을 부여한 게 아니다. 왜냐면 한나라 황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파촉에서 촉한을 건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진이 정통성을 이어받은 연유는 사마염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 사마소촉한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다.[3] 그러니까 환현이 한-위 선양을 본받아서 황제가 되려는 것은 헛일이라는 논리이다. 그리고 후에 동진으로부터 선양받은 유송의 성이 유씨라는 점을 내세워 촉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촉한정통론이 처음으로 등장한 사서는 습착치가 지은 한진춘추였다. 습작치는 후한의 정통성에 대해 이를 촉한이 이었고, 그 촉한의 항복을 받은 서진이야말로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여겼다. 그가 '위진춘추'가 아닌 '한진춘추'를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에는 이러한 까닭이 있었다.

한편 북조에서는 진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쫓아낸 흉노 출신 유연이 한왕조의 후계자를 자칭하여 나라 이름도 한으로 지었고[4] 유선에게 새로 시호를 지어올리고, 유비를 한고제 유방과 광무제 유수와 동격으로 삼아 제사를 올리는 등 북조에서도 남조의 촉한정통론과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촉한을 한의 후계로 인식하게 되었다.

2.3 송대의 정통론

송대에 정통론적인 관점이 다시 부각되면서 구양수를 비롯해 조위가 정통이라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신하가 군주를 배신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위진의 건국은 구왕조로부터 정당성을 물려받는 선양을 통해 이루어진 역성혁명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송후기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조위의 연호를 따랐으되 조위의 정통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관점이었는데 사마광의 논리는 '구주를 하나로 통일하지 않으면 천자의 이름은 유명무실하다. 어떻게 구석의 한 나라를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를 감히 가짜라 부를 수 있느냐?'라 라는 것이었다. 사마광의 주장은 실상 삼국 중에서 정통이 따로 없다는 논리로, 이는 즉 무통에 가깝다. 다만 편의상 연대 표기만 위진의 표기를 빌렸다고 밝히고 있다.[5]

한편 민간에서는 북송의 속문학이 촉한에 대하여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삼국시대 이후 각종 민담과 전설, 구전문학 등에서 촉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빈도가 높아졌고 민간신앙에서 관우는 천신으로 승격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후 이는 삼국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강담사가 말하는 삼국시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유비가 이기면 환호성을 질렀고 유비가 패해서 도망가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동파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남송대 들어서 주희(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통해 주자의 성리학적 역사관이 주요 역사관으로 자리잡았는데, 이후 주자의 성리학이 득세하자, 유비와 그가 세운 국가인 촉한을 후한의 정통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이런 정통을 중시하는 사관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송의 특별한 위치에 기인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당시 남송은 금나라에 화북을 빼앗기고 금을 상국[6]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민감했다. 말하자면 위나라에 비해 약하지만 한실의 후예였던 촉한에 정통 한족국가인 송나라를 투사함으로써 "우리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이러한 역사관으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나중에 동쪽의 나라가 가진 '소중화' 사상의 원류 이는 명나라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삼국지연의의 탄생 이후 이는 민간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2.4 청대의 정통론

한 마디로 말하지만 학계에선 이전의 정통론 논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위정통론(그리고 그를 이은 서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분쟁보다는 정통론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난 논의들이 좀 더 주를 이룬다. 결국 진수나 습착치, 사마광이나 주자 등은 모두 각자의 시대상황에 따라 각자의 정통론을 서술한 것 뿐 이라는 것이다.

다만 민간에서는 촉한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도 모종강 부자가 개작한 삼국지연의가 삼국지연의의 정본이 된 탓이 컸다, 모종강 의 '모본(毛本)'은 이야기의 구조와 줄거리가 치밀해지고 언어가 간결하게 다듬어져 다른 판본들을 압도하여 오늘날까지 연의의 정본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촉한정통론에 기인하고 있긴 하나 비교적 영웅쟁패의 입장에서 쓴 나관중과 달리 모종강 부자의 모본은 친촉/반위적인 서술이 늘었다. 모본이 민간에 유행하게 되면서 민중들은 기존의 민담, 전설에 내려오던 촉한에 대한 인식에 연의의 영향까지 합쳐져 촉한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2.5 그럼 현대에는?

현대 중국은 과거 유교적 성리학적 역사관을 벗어났기에 이런 정통론의 입장에서 벗어나있다. 그러나 현대 중국 사학계의 역사적 관점도 정치적 입장을 벗어나지는 못하는데 현대 중국의 가장 큰 정치적 논제중 하나가 바로 '중국 영토에 존재했던 모든 정권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며 현재의 중국은 이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통일된 하나의 중국' 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중국 역사관의 중심이 되면서 민중의 인기와 유교, 성리학적인 입장이 혼합되어 완성된 전근대시대의 역사관이었던 촉한정통론을 도태시키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따라서 현대의 중국은 기존 명분론적, 정통론적인 역사관과는 달리 중국의 통일과 통일왕조를 유달리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 중국의 강역을 완성하고 대만을 정복한 강희제에 대한 찬양이나 장이모 감독의 영웅 등 중국을 첫 통일한 진나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는 소수민족, 한족을 가릴것 없이 모두 하나의 중국이라는 현대 중국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7] 이에 따라 삼국시대를 보는 관점도 삼국 중 한나라의 강역과 체체역량을 가장 많이 아우른 조위와 조위를 이어 삼국을 통일한 서진쪽에 우위를 두는 시각이 늘어난것이다.

이 때문에 이 두 왕조의 사실상의 창건자 조조와 사마의의 평가 역시 올라갔다. 마오쩌둥의 경우 조조 재평가의 선두주자로 유명한데, 그는 조조의 복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현대 중국문학의 대가이자 스스로도 정치가였던 궈모러(곽말약)이 주장하기를, "누구는 조조를 가리켜 찬탈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옳지 않다. 체제의 정통성은 황제의 혈통이 아니라 체제가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조조는 후한말의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했다. 이것이야말로 정통성의 근거가 아니겠는가."라며 조조에 대한 후한 평을 내렸다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한 것이 조조의 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청조의 멸망 이후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다시 하나의 중국으로서 질서를 바로 잡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사마의에 대한 평가도 재밌는 부분이 많은데 당장 사마의가 주인공인 중극사극 군사연맹의 시놉시스는 고평릉 사변을 두고 '위나라의 내란을 평정했다' 쓰고 있으며 '사마의가 쌓은 업적은 난세를 끝내는 기초가 되었다'는 둥의 서술을 하고 있다. 이는 곽말약이 조조를 평가하면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여 백성을 구했다며 이를 조조의 공으로 삼은 평가와 다르지 않다.[8] 현대 중국의 역사관이 어떤 관점을 보이고 있는지는 이로서 명백해진다. 사회 질서의 붕괴와 무질서의 방치는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이를 수습하고 (그 과정이나 절차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건 간에) 우선 질서를 세우고 중국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일이야 말로 정당하다는 것이 현대 중국의 사관인 것이다.

현대 한국과 일본의 관점도 이와 비슷한 논리가 있다. 어쨌든 삼국을 통일한 기초를 세우고 삼국을 통일한 최종승자는 조조와 사마의이며 유교적 정통성을 내세운 촉한은 어쨌거나 과거의 논리에 얽매인 역사의 패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라는 시각이 보이는 것. 또 한국의 경우 민주공화정이 들어서고 민주화운동, 혁명등을 통해 정권을 교체해 본 적이 있는 경험이 생기면서 과거 성리학적인 명분론인 촉한정통론이 밀려나는 경향이 생겼다. 성리학의 시조로서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킨 정몽주가 격하되고 역성혁명을 통해 망가진 왕조를 무너뜨린 정도전이 오늘날 혁명가로 추앙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9] 현대 동아시아 3국의 삼국지 매체에서 촉한을 대신해 조위와 서진이 주인공격으로 내세워지는 작품이 서서히 증가하는 것도 3국의 역사관이 더 이상 촉한정통론에 대해 예전만큼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촉한정통론이 엄청나게 오래된 세월 동안 자리잡아 왔기 때문에 현재의 사학계 일부나 일반 대중들, 삼국지팬들에게 촉한정통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하긴 한다. 촉한정통론의 역사와 그 중심에 있는 삼국지연의의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는 이상 촉한정통론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공산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현대적 관점에서 조위와 서진의 평가와 연구가 이루어짐에 따라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조위와 서진의 문제점들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반발 역시 만만치 않게 된 면도 분명 존재한다.

3 자치통감 논쟁과 삼국지연의

북송사마광자치통감에서 삼국 중 어느 나라도 통일왕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통으로 보지 않는다는 무통설을 내세웠다. 다만 연도기준을 삼기 위해 편의상 위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명시했는데, 이 때문에 촉한정통론을 지지하는 학자들로부터 소극적으로나마 위정통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10]

하지만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강남으로 옮겨 남송이 된 후 촉한정통론은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바로 여진족이 세운 금을 북조로, 남송을 동진으로 동치시키는 경향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주자는 자치통감의 사론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통감을 다시 춘추필법에 따라 재편집하여 자치통감강목을 지어 촉한정통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후에 등장한 역사서들도 주자가 창립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촉한정통론을 따르게 되었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사대부 계층 역시 촉한정통론을 받아들여 이에 대한 반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한편으로 원말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촉한정통론을 학계를 넘어 민간에까지 확산시킨 결정타가 되었다. 이전까지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삼국지평화의 유관장 삼형제의 캐릭터는 나관중본과 청나라대의 모종강본 연의로 발전함으로써 유비와 촉한 세력을 완전히 한나라의 후계로 보는 인식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4 결론

결국 촉한 정통론은 그 본래의 탄생이 정치적인 목적을 지녔는데, 이것에 북방 민족의 대두로 위협을 느낀 한족의 방어적인 중화사상이 더해진 것이었다. 위정통론을 잘못 이해한 몇몇 사람들이 진나라까지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촉한정통론이 진나라의 무능함 때문에 등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중국사의 정통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애초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는가의 여부가 정통성을 판별하는 데 절대적인 고려 대상인 것은 아니었다. 조위가 정통이나, 아니면 촉한이 정통이냐의 문제는 역사를 편찬한 중국의 역사가들이 자신들이 속한 정권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결국 조위와 서진이 엄연히 한나라의 뒤를 잇는 정통성 있는 왕조라고 인식한 경우가 많았다는 부분은 결국 촉한정통론이 항상 압도적으로 사가들의 지지를 받는 학설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촉한은 마지막까지 한실부흥을 명분으로 북벌을 시행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암군환관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나라를 무너뜨렸고 원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정권으로 결국 촉한이 중국을 통일하여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면 모르되 결과적으로 중국을 통일한 정권은 조위의 뒤를 이은 서진이었기에 많은 역사가들이 조위-서진을 정통으로 본것이다.

정작 현대의 역사학계 주류는 촉한정통론을 위에서 언급했듯이 멀게는 남조시대부터, 가까이는 송나라 시절 성리학의 명분론과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이는 민간에 촉한을 중심으로 한 삼국지 설화나 전설이 만들어져 널리 퍼졌던 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 태양은 서쪽(촉)으로 지니까 촉한이 정통이다. vs 동쪽(오)에서 뜨니까 오가 천자국이다.
  2. 결국 환현이 사마덕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가, 유유가 이를 토벌하고 나서 다시 선양을 받아 송을 건국하여 동진은 멸망하였다.
  3. 이 논리는 사실 그 자체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마소가 촉한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은 때는 사마염이 선양을 받기 이전이다. 조위가 정통성이 없어서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것이 헛일이라면 촉한을 항복시키고 획득한 정통성은 조위가 아니라 사마소 개인의 집안에 귀속되었느냐는 것이다.
  4. 물론 한이라는 국호는 유연 사망 후 '조(趙)'로 갈렸다.
  5. 촉한의 연표로 따지면 살짝 빠지는 게 있다.
  6. 군신관계는 아니지만 숙질관계 정도였다고 한다.
  7. 당장 한국에서도 꽤 인지도가 알려진 무협물 랑야방만 봐도 과거 화이론적 관점에서 오랑캐로만 보았던 소수민족에 대해 현대 중국인이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8. 물론 이 평가 역시 그다지 공정하지는 않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봉건 시대의 논리로 조조나 사마의가 사실상 찬탈을 자행했으니 그들를 가리켜 난신이라고 비꼬는 비난은 오늘날의 사관에 입각하여 합리적인 역사관이 아니지만, 조조가 백성들을 학살했던 행적이나, 조조나 사마의가 시행한 정책들은 그들 자신의 세력 확보와 유지를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이런 모든 행태를 그들이 정말로 백성을 정말로 구하려고 했다고 여기는 생각은 또 다른 봉건 시대적 논리로 귀결된다. 이는 조조 정권을 얻어 질서를 잡고 말고와 무관한 얘기인 것이다.
  9. 물론 현대 한국의 이런 사관 역시 무조건 옳다고 볼 순 없다, 지금 기존으로 보면 정몽주는 수구고 정도전은 진보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방법론의 문제지 성리학적인 관점의 민본을 추구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같았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현대의 관점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거부한다는 명분하에 현대식 민주주의 관점으로 역사를 멋대로 재단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0. 이는 해당 사론 안에 촉한에 대한 서술 중 '유비가 한을 이었다고는 하나 혈통에 의문점이 있다'는 식의 내용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