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석

47175029.2.jpg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사병 출신 장성이다.

2 생애

1929년생으로 1947년에 조선경비대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사병으로 일등상사까지 진급한 뒤에 1950년에 현지임관으로 소위가 되었다. 중령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근무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포병대대장(소령)으로 근무하던 1955년에 임관한 육군사관학교 11기들이 그보다 먼저 1973년에 준장을 달았다고 한다. 그는 1974년에 준장으로 진급했고 1978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8보병사단장을 역임하고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1]을 마지막으로 83년 10월 31일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현지임관이라는 출신 경력 때문에 승진이 항상 육사 출신들 보다 상당히 늦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재무 담당관으로서 상사로 제6보병사단에서 복무하다가 소위로 현지임관하며 포병으로 전과 했다. 한국전쟁시 포병 관련 전문가로써 군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전후 육군포병사령관으로써 야전에서 근무하던 도중 대간첩작전을 수행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베트남전에서는 파병 군인들의 복지와 파월 한국군의 군수와 인사 업무를 수행 했다. 육군본부에서 인사참모로 근무하다가 당시 5.16 군부 세력의 진급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다.

육군 항공감[2]으로써 육군항공에 큰 기여를 했으며 포병과 같은 전투병과 뿐만 아니라 비전투병과인 인사, 경리, 감찰, 군수 등 여러 방면에 있어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원칙과 소신을 지킨 군인이라 평가 받는다. 군 복무 시절 최장기 근속 보유자, 최다 계급 진출자, 전 신분을 거친 최다 신분 경력자, 보병, 포병, 경리, 감찰, 항공 등 최다 병과 근무자, 28개 부대를 전속 복무한 최다 부대 전속자, 여순사건에서 베트남전 참전까지 최다 전역(戰域) 참가자, 최다 아이디어 창안연구 보고자 등 살아있는 한국 국군사이자 산 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서 '장군이 된 이등병'이 있으며 제12보병사단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갑석 대대'가 있다.

군납비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자신이 준장(보직은 원호관리단장이었다)이 되자 주변 상인들의 뇌물을 뿌리친 일화로 유명하며, 어느 날 갑자기 PX를 점검[3]하고 군납품 생산지 현황을 점검하자[4] 아주 분노가 들끓었다고 한다. 최갑석 본인도 병사 출신 장성인지라 이걸 먹고 쓰는 병사들이 어떨지 생각하니 그렇다고.. 결국 물품 하나하나의 규격과 청결도를 본인이 직접 지정하고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5]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 차규헌 전 2군 사령관의 배려로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 상임 이사장으로 취임하여[6] 2~4대 이사장을 역임한다. 이사장 재임 당시 고속버스 예매 시스템의 전산화와 고속버스 터미널 시설의 개수 및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1. 그의 회고록을 보면 2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했을 때 당시 차규헌(육사 8기. 하나회 후원자. 1929~2011) 2군 사령관이 깍듯하게 영접하였다 한다.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는 인상적인 환영사도 했다 한다.
  2. 당시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부탁해서 맡았다 한다.
  3. PX 술이 담긴 통을 열었더니 헌 농구화 짝이 나오고, 살이 벗겨진 죽은 쥐가 나왔다 한다. 그리고 미군이 쓰다 버린 드럼통에 술을 운반하는 것을 알게 된 최 장군은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4.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더러운 변소 옆에서 풀빵을 굽고 있었다한다.
  5. 원호관리단장을 맡았던 사람들은 소장진급에 실패했지만 최갑석 장군은 훌륭히 해내어 이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8사단장을 맡았다. 당시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이 그를 칭찬하였다.
  6. 최갑석 장군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감찰을 담당하고 군 내부에서도 비리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던 자신을 예편 이후에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고. 당시 기업들과 공조직에서는 횡령, 배임, 뇌물수수가 관례로 여겨졌다는 점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