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도타 히로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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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카도타 히로미츠(門田博光)
생년월일1948년 2월 26일
출생지야마구치 현
투타좌투좌타
데뷔1969년 신인 드래프트 2순위
포지션외야수, 지명타자
소속팀난카이 호크스(1970-1988)
오릭스 브레이브스(1989-1990)
다이에 호크스(1991-1992)

일본의 전 야구선수, 현 야구 해설가.

쇼와 말기, 노무라 카츠야의 저주로 인해 끝없는 암흑기에 빠진 난카이 호크스를 홀로 하드캐리하던 슬러거이자 온갖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41세의 나이에 타격 트리플 크라운[1]을 달성한 자기 관리의 화신.

애칭은 불혹의 슬러거.

1 프로 입단 전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부친의 사업관계로 나라 현으로 이주해 그 곳에서 성장했다. 고교야구의 명문 텐리고등학교 3학년 때 4번타자 겸 중견수로 맹활약하며 고시엔에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나가노 현 대표인 마루코실업고에게 0-2로 패했다.

졸업 후 사회인야구팀 구라레 오카야마에 입단, 팀을 4년 연속 도시대항 야구대회 본선에 올리며 이름을 알린 뒤 196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한다.

2 프로 시절

장타력과 강견을 어필하며 신인 시절인 1970년부터 난카이의 3번 타자 겸 좌익수 자리를 꿰찼고, 1971년에는 타율 3할, 31홈런 , 120타점을 기록하며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고, 1973년에는 난카이의 마지막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노무라 카츠야 선수 겸 감독과 함께 황금기 말엽의 난카이 타선을 이끈다. 그러나 노무라는 "홈런은 안타의 일종에 불과하다", "넌 무리하게 홈런을 노리지 말고 출루하기나 해"라고 하면서 그의 영웅스윙 기질을 대놓고 디스하며 애버리지 히터로 개조시키려고 했고, 이로 인해 노무라와 보이지 않는 불화를 빚었다.

1977년 노무라가 어른의 사정으로 감독직에서 해임되면서 노무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1979년 스프링캠프에서의 오른발 아킬레스건 파열로 인해 주루능력을 상실한 것을 계기로 "홈런을 치면 다리에 부담이 없다. 이제부터는 전 타석 홈런을 노린다"면서 벌크업과 어퍼스윙 개조에 공을 들였고, 전업 지명타자로 출장하기 시작한다.[2] 그 결과 대부분 또래 선수들이 은퇴를 선택하는 30대 중반에 오히려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하지만 난카이의 계속되는 비밀번호 연장은 막을 수 없었다. 아래는 30대 중반부터 그가 따낸 주요 타이틀 목록이다.

  • 1981년: 개인 통산 첫 홈런왕(44개)
  • 1983년: 홈런왕(41개), 올스타전 1차전 MVP
  • 1987년: 출루율 1위, 명구회 가입(통산 2000안타, 사상 24번째)
  • 1988년: 트리플 크라운 달성(홈런, 타점, 출루율)[3], 퍼시픽리그 MVP(역대 최고령), 쇼리키 마츠타로상[4] 수상

1988년 난카이가 다이에에 매각되면서 후쿠오카연고지 이전을 결정하자, 간사이에 애착이 있던 카도타는 트레이드를 요청해 오릭스 브레이브스로 이적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마츠나가 히로미, 부머 웰스, 이시미네 카즈히코, 후지이 야스오 등 '블루 선더 타선'의 젊은 강타자들에 뒤지지 않으며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오릭스에서 2년 연속으로 30홈런을 기록했고, 팀 매각과 함께 은퇴한 후쿠모토 유타카를 대신해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1991년 친정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복귀했고 1992년 그 곳에서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289/.379/.529 2566안타 567홈런 1678타점. 홈런과 타점은 오 사다하루, 노무라 카츠야의 뒤를 잇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3위이며, 안타 역시 역대 4위의 기록.[5]

은퇴 때까지 홈런을 빼앗아 낸 투수의 수는 184명으로, 이것은 2003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갱신하기 전까지 역대 1위였다.

3 은퇴 후

은퇴 후 다시 간사이로 돌아와 1993년부터 2005년까지 아사히 방송의 전속 해설가로 활약했고, 200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09년 간사이 독립리그의 오사카 호크스 드림의 총감독으로 취임했고, 이 시기 김실을 감독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2011년 6월 김실이 사기 혐의로 구속되면서 감독대행에 취임해 같은 해 9월까지 감독대행을 맡은 뒤 팀을 떠났다.

현재는 지병[6]으로 인해 요양을 하면서 프리랜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4 에피소드

  • 난카이, 오릭스 시절 간사이 지역에서 열리는 경기는 대부분 나라 현의 자택에서 구장까지 전철을 갈아타면서 통근했다고 한다. 2종 운전면허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운전을 하다보면 피곤해져서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전철 통근을 고집했다고 한다. 당시가 한신난바선이 개통되기 전이어서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까지 최소 2번은 환승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흠좀무.
  • 일본프로야구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큰 자리수의 등번호에서 시작해 주전을 차지하면서 작은 수의 등번호를 다는 반면, 카도타의 경우 커리어 내내 등번호 자릿수가 커진 일본프로야구에서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입단 초기 9년간 등번호 27을 달았고, 잠시 44번을 달았다가 난카이의 마지막해인 88년까지 60번[7]을 달았다. 난카이를 떠난 뒤 오릭스에서는 78번을 달았었고, 커리어의 종착역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는 53번을 달았다.
  1. 다만 타율-홈런-타점왕의, 클래식한 3관왕은 아니다. 자세한 성적은 하술.
  2. 퍼시픽리그는 1975년부터 지명타자제를 도입한다.
  3. .311/.429/.633 44홈런 125타점 데이비드 오티즈가 떠오른다. 타격왕은 롯데 오리온즈의 외야수 타카자와 히데아키(.327)가 차지했다.
  4. 일본프로야구 최고 권위의 상.
  5. 일본프로야구 통산 안타 기록 부동의 원탑은 3000안타를 달성한 장훈(야구선수)이다. 미-일 통산기록을 합치면 4000안타를 넘긴 스즈키 이치로, 2600안타 대의 마쓰이 가즈오, 마쓰이 히데키가 카도타의 앞에 선다.
  6. 대표적으로 당뇨병. 현역 시절 벌크업과 체력유지를 위해 대식을 한 것의 후유증이라고 한다. 2005년에는 뇌경색이 발병하기도 했다고 한다.
  7. 이것은 오 사다하루를 뛰어넘어 60홈런을 치겠다는 각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