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마이어

kurt_meyer_by_themistrunsred-d53y4hg.jpg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 - 12.SS 히틀러유겐트 사단장
(1910년 12월 23 ~ 1961년 12월 23일)

1 개요

쿠르트마이어는 멸명인 판처 마이어(Panzer meyer)라고도 불리웠어며 제2차대전 기간동안 친위대의 장교로써 프랑스 침공작전, 바바로사 작전, 노르망디 전투 등 셀 수 없이 많은 전투에서 활약을 하였고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독일 제국군의 가장 젊은 사단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1944는 캉(Caen) 전투에서 벌어진 전쟁범죄로 인해 논란이 많다.

2 유년시절

쿠르트 마이어(Kurt Adolph Wilhelm Meyer)는 Jerxheim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1차대전 당시 하사관으로 참전하여 입은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교를 졸업한후 마이어는 1929년 10월 1일 Mecklenburg 경찰로 채용되기 전까지 광부로 일하였다. 여담으로 마이어의 별병인 "판처-마이어"는 전쟁터에서 얻은것이 아니라 경찰학교에서 교육중에 친구들에게 물을 뿌리는 장난을 하기위해 지붕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20군데 골절상을 입고 사경을 헤메다 멀쩡히 회복되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지어준 것이다(...).

3 제 2차 대전

1930년 10월1일에는 나치당(NSDAP)에 가입하고 1931년 10월 15일에는 친위대에 자원입대한다. 1934년 5월에는 친위대들의 가장 존경받는 단체인 "총통경호대"에 소위로 임관되고 LSSAH의 대 탱크부대에 중위로 임명받는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작전에 참여한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공로로 마이어는 독일에서 195번째로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the Oak Leaves to the Knight's Cross)을 받았다.

후 많은 전투에 참여하다 1944년 9월,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서 연합군에 밀려 퇴각을 하면서 그가 속한 사단 병력은 2,000명을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고, 전차나 중장비는 전무한 상황이란 위기가 닥쳤다. 9월 6일, 벨기에 Durnal이라는 동네에서 파르티잔에 포로가 되어 미군에 넘겨진다. 당시 마이어는 SS제복 대신 독일 국방군 대위 복장을 하고있었다. 포로가 된 마이어 대신 사단 참모장인 후베르트 마이어 SS중령이 사단 지휘권을 인수했다.

4 전후

마이어 SS-소장은 그의 지휘하에 있는 26.SS기갑척탄병연대 소속 일부 병사들이 캐나다군 포로들을 학살한 것으로 인해 범죄혐의로 기소되었고 12명의 포로가 마이어의 지휘본부가 있었던 아르덴느 수도원에서 살해되었다는 물적 증거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된후 9년간의 수감생활 후 1954년 9월 7일 석방되었다.

하겐 지방에서 몇개의 직업을 가졌으나 실패하고 자서전을 저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발작후 건강악화로 1961년 12월 23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