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서 넘어옴)

프로이센 군주들의 가장 흔한 이름. 1, 2를 제외하면 큰 업적을 남긴바 없으나 국운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 독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의 선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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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역대 군주
선제후 게오르그 빌헬름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Wilhelm.
생애 : 1620년 2월 16일 ~ 1688년 5월 9일
재위 : 1640년 ~ 1688년 5월 9일

흔히 "대(大) 선제후 (Der Große Kurfürst)"라고 불린다. 1640년 선제후의 자리에 올라 상비군 제도와 중상주의, 절대왕정을 기반으로 하여 프로이센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1620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과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시기가 독일 전역을 초토화 시킨 30년전쟁이 벌어질때라 고향이자 영지인 브란덴부르크 지방도 황폐화 되었다. 베를린 궁정을 떠나 퀴스트린 요새에서 지내야 했고 그곳에서 칼뱅교식 교리에 따라 교육받았다. 참고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종교는 개신교 중 루터파였다가 할아버지대 개신교 칼뱅파로 개종했고 인구 대다수인 루터파를 달래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했다. 명목상 프로이센 공작령의 종주권을 가진 폴란드왕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에서는 가톨릭도 박해하지 못할정도.

이후 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네덜란드의 침묵공 빌렘이었던 인연으로 14세때부터 18세때까지 네덜란드 유학을 떠나서 레이덴대학에서 수학했고, 미래의 장인어른이 되는 '오라녜공 프리데리크 헨드리크'의 헤이그 궁정에서 생활했다. 이시기 당연히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던 네덜란드의 발전상을 목격했고 해상무역 농업 건축 군사분야 등을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에 도입하게된다.

1640년 20세때 선제후로 즉위하였는데 치세 전반은 독일에서 30년전쟁 벌어지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이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신교도 제후 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돈이던 구스타프 아돌프를 적극 편들지도 않았고[1] 가톨릭의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역시 즉위초에는 전쟁 막바지 각진영의 압력과 러브콜(?)을 사절하려 브란덴부르크 지방인 베를린궁정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도망 가서 3년동안 신중한 처신을 보였다. 이는 계산된 행동으로 1644년까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기울었던 기존의 군대를 해산하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여 선제후 개인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상비군을 조직 절대군주의 발판을 만든다. 1646년 네덜란드 통치자의 딸 "오라녜의 루이제 헨리에타"와 결혼하였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기대만큼 처가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지참금으로 한보따리 싸온것이 상비군 군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어쨌든 전황이 신교도편으로 기운 전쟁후기 신교도편으로 참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토를 확보하나 무역을 위해 필수적인 항구는 확보하지 못했는데 오데르강 하구의 항구 슈테틴은 스웨덴이 차지해버리고 민덴, 마르데부르크, 동부 포메른정도의 보상으로 끝났다.

이후 7년간 황폐화된 영토를 재정비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중앙집권화에 착수 독일지역내 드문드문 떨어져 있던 영토를 묶어서 각 지역마다 있던 신분제 의회와 행정기구를 통페합하고 세금을 걷었는데 말 안듣는 귀족들은 잡아다가 재판없이 코렁탕을 먹였다.[2] 귀족들 자제들을 전부 강제로 군대에 편성하고 영지의 거주민들은 병사로 편성하는 프로이센 특유의 방식으로 후에 강력한 군대의 기반이 된다.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 군국주의 전통은 이전 프로이센공국의 전신 튜튼기사단이 원류라지만 사실상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웨덴·폴란드 사이의 교묘한 외교 전략으로 처음엔 명목상 프로이센 공작령의 종주권을 가진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보내는척하다가 스웨덴 카를 5세 구스타프가 이권을 제의하자 군사적으로 중립을 지켜버린다. 이후 전황이 스웨덴측에 기울자 참전하여 바르샤바를 같이 터는데 일조하고, 스웨덴이 힘이 빠지자 폴란드와 협상하여 오스트리아-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베스트팔렌 조약서 스웨덴에 넘어간 서부포메른을 점령해버린다.

1660년 프랑스가 개입하여 서부포메른은 다시 뱉어내긴 하지지만 올리바 조약으로 15세기 초반 독일 기사단이탄넨베르크 전투 패배로 폴란드에 굴복하여 넘어간 프로이센 공작령에 대한 폴란드 왕의 종주권은 완전히 청산한다.

한편 프랑스에 뒤통수 맞은 영향으로 한동안 반프랑스 행보를 보였다. 처가인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적국인데다가 루이 14세가 유럽의 깡패질로로 전유럽의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 1675년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웨덴이 브란덴부르크로 침입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격파하여 신민들로 부터 '대 선제후' 칭호를 듣게된다. 기세로 서부포메른도 탈환하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또 다시 돌려준다.

1679년부터는 그동안 발목 잡았던 프랑스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게되는데 프랑스가 서부 포메른과 군대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자격으로 프랑스가 지지하는 후보를 뽑는것과 폴란드왕 선거에서 프랑스측 인사를 민다는 조건. 그러나 루이 14세가 약속을 순순이 지킬 인간은 아니었고 뒤통수를 또 한번 맞게 되자, 1685년 다시 친조카 네덜란드 오라녜공 빌렘(윌리엄 3세)과 동맹을 맺는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신교들이 프랑스에서 탄압을 받자 루이 14세에 코렁탕을 먹고 쫓겨난 위그노들을 받아들여서 베를린의 인구가 6천명에서 2만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위그노중에는 상공업자들이 많았고 프랑스의 선진문물을 전수해서 왔기때문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국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재위 후반까지 중상주의 정책과 절대왕권을 바탕으로 재임중에 상비군을 4만명까지 늘렸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 대에 이르러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프로이센을 왕국으로 격상시켰다. 증손자 프리드리히 2세 때가 되면 북부 독일의 절대 강자가 된다.

2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로이센 역대 군주
프리드리히 1세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프리드리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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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Wilhelm I
1688년 8월 15일 ~ 1740년 5월 31일
프로이센 왕국의 두번째 왕 : 재위 1714~1740

본격 싱하형. 읽어보면 알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1의 손자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와 달리 부국강병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솔직하고 근검절약하며 개신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다. 하지만 가부장적이고 상비군을 숭상하여 "군인왕(Soldatenkönig)"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치세 동안에는 전쟁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치세 기간 일어난 몇몇 전쟁에서는 이겼고 확실하게 이득을 보았다. 이 왕은 자신의 군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시엔 흔한 일이던 다른나라에 돈 받고 군대를 빌려주는 일도 거부했다고 한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군대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빌려준 대가로 왕위에 오른것과 대비된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북쪽 발트해 인근에서 스웨덴과 러시아가 대북방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스웨덴은 초반에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털어줬지만, 국왕 칼 12세는 잦은 판단 착오로 유리하게 전쟁을 끝낼 기회들을 걷어찼다. 그리고 러시아 전역 성당의 종중 1/3 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상인과 성당에 세금을 물려 서유럽제 신형 머스킷 수만정을 사 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를 준비한 표토르 대제에게 역관광 당한다. 스웨덴이 러시아에게 계속 털리며 핀란드 전역을 빼앗기고 반격 능력 자체를 상실해버리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영국-하노버와[3] 함께 스웨덴의 독일 영토를 노리고 참전했다. 뒤늦게 참전했지만 프로이센은 스웨덴령 포메른 지방을, 하노버는 브레멘-베르덴을 먹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못먹은 나머지 포메른 지방도 모두 프로이센이 지배하게 되었다.

군대예산을 마련하려고 국가예산의 80%를 군대에 쓰고 자신마저 절약을 위해서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루이 14세를 따라해서 지어놓은 호화스런 왕궁에서도 살면서 700개의 방 중에 5개만을 사용했고 시동은 단 2명만 부렸다고, 아버지때 모아놓은 궁중의 마차나 그림 같은 사치품은 시원하게 다 팔아치웠다. 한술 더 떠 담배도 서민들이나 피우는 제일 싸구려 담배를 피워서 입냄새가 매우 고약했다고 한다...

병사들을 "내 새끼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군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서 종종 국왕이 스스로 빠따를 들고 점호에 나섰고 병사들을 직접 두들겨 팼다고 한다.아 그런 사랑은 필요없는데 이런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대한 일화 때문에 당시 유럽 왕실이나 귀족들은 이를 보고 비웃었고 한참 모자란 사람 쯤으로 여겼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군대나 병사는 왕실소유로 하인이나 종이나 다름없었고 전열보병 시절에 당시 군대에서 구타는 예사였고 군기를 유지하는 수단이긴 했지만 하사관이나 고참병이 줄빠따 치는거지 장교들이 빠따치는일은 드물었다. 그나마 고위급 장교들은 병사들이랑 만날일도 잘 없었는데 일개 장교도 장군도 아닌 왕이 직접 밀덕질에 심취했다는게 전 유럽적인 비웃음거리 였다.

군대놀이를 위해 수전노짓만을 한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병사들이 될 신민들을 위해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또한 자녀들을 농사일 시킨다고 안보낼까봐 의무화하기도 했는데 훗날 아들의 적국인 오스트리아에서는 7년전쟁 후 프로이센을 따라 배워 60년 뒤에나 하게 될 일이었다. 그가 평생 남에게 돈을 준건 딱 세 번이었는데 모두 베를린 도서관에 기부를 한 것이었다. 교육에 돈을 쓰긴 했지만 거인 연대에 뽑으려고 찍어둔 장정 한명 스카웃 비용보다 적은 푼돈을 내서 왕국 신민들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크게 비웃었다고 한다.

돈이 아까워서 싸구려 담배를 피우면서도 또 나름대로 끽연가라서 타박콜레기움(Tabakskollegium)이라는 흡연 클럽겸 끝장 토론회를 상설화 했는데 담배 재떨이를 올려놓고 하루죙일 피우면서 신하나 학자들과 노가리만 까는 것은 아니고 통치에 대한 진지한 문제도 토론 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훗날 흡연을 싫어하고 신하들을 불신했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없애버렸다.

군인왕이라는 별명답게 통치방식도 군대식이라 늘 신하들이나 휘하 사람들을 거칠게 단련[4]하여 군기를 꽉 잡는 것을 즐겼다고도 하며 실제로도 교양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서 성격이 무척 난폭하여 아랫 사람들[5]과 자식인 왕세자(프리드리히 2세)를 잘 때렸다고한다. 특히 왕세자(프리드리히 2세는 잘 때린 수준이 아니라 맨날 얻어맞았다. 한번은 신하와 산책중에 갑자기 몽둥이로 왕세자를 두들겨 패서 신하는 왕을 감히 말릴수도 없고, 왕의 편을 들어 가만히 있을수도 없는 상황에서 미친척을 했다고...

조지 1세의 딸인 왕비[6] 사이에서 7남7녀를 두었지만 왕세자를 제외한 그외의 자식들은 관심밖이라서 신경도 안썼다. 문제는 왕세자를 패는 이유도 기가 막힌게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진다는 것. 혈통이나 증상으로 봐서 정신질환이 의심된다는 설도 있다.

영국 공주 어머니 기질도 물려받은 아들 프리드리히 2세[7]와 갈등이 심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모아놓은 강군과 풍부한 국고를 통해 북부 독일의 절대강자가 된다. 한편 아내랑 자식들에게 증오를 받아 그의 죽음을 아내랑 자식들이 가장 기뻐했다. 특히 큰 딸은 아버지를 까는 수기를 남기기도 했단다. 지못미(…).[8]

사실 자식 농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괴팍한 일면이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2세 이전에 가졌던 두 아들은 모두 본의 아니게 죽여버렸다. 첫째 아들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는 태어나거 며칠 후에 세례식에서 미래의 군주인 맏아들에게 굳이 왕관을 씌워줘야 된다고 다 말리는데도 바득바득 우겨서 강제로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고 꼭 눌려 끼우다가 머리에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병들어 죽었고 둘째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갓난아기 시절 강하게 키워야 된다는 지론에 따라 군대 사열식을 데려 갔다가 어릴적부터 대포소리에 익숙(?)해져야 된다는 주장을 또 우겨대서 갓난애 옆에서 대포를 쏜 결과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죽었다고(...). 두 아들이 모두 어릴적에 죽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셋째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될 수 있었다.[9] 그 당시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근대 이전에는 귀족가문 아이라도 4~5살 넘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안할정도.[10] 물론 드물지 않다는건 첫째가 아닌 아들들이 형의 죽음으로 후계자가 되는 부분이지, 아버지의 뻘짓에 죽어 나가는 부분이 아니다 (...)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서도 예외는 없어서 어릴적부터 군인 행렬을 관람하게 하고 6세때부터는 아침 알람을 대포소리에 깨어 기상해서 스케쥴을 빈틈 없이 짜서 완전히 군대식으로 키웠다. 덕분에 세자는 이미 10살이 되기 전에 군사 교본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고.[11]이런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은데다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학대받는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국으로 탈출을 기도하자 죽이려고 했지만 장성한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죽인다고만 으름장만 늘어놓았고 결국 죽이지는 못했다.[12] 다른자식들은 제쳐놓고 장남만 자기식대로 20년간 자기식으로 키워서 아까웠다더라 동시대의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이 분은 자식은 안죽임

이렇게만 보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사람이 프로이센 왕국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다. 그가 즉위 동안에 근검절약[13]하여 모아 놓은 막대한 자금과 심혈을 기울여 키워 놓은 군사력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훗날 유럽의 대군주로 군림하게 하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14] 프리드리히 2세를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한다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필리포스 2세에 비견할 수 있을 듯 하다.

죽기 전 자신의 아들(프리드리히 2세)에게 유언으로

"나는 평생동안 근검절약하여 너에게 넉넉한 재산과 8만명의 정예병을 남긴다. 절대 군대를 함부로 줄이지 마라. 또한 유럽의 군주 그 누구도 믿지 말아라."
'사랑하는 왕세자가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신 께서 그러한 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민들에게 전쟁에 대해 반드시 설명이 필요할 것 이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는 유언의 앞 부분은 충실히 지켰는데 자신도 아버지처럼 근검절약한 삶에 군대를 중시하여 오히려 수를 2배가 넘는 19만명까지 늘렸고 유럽의 군주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유언의 뒷 부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대가로 7년전쟁에서 나라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파멸할뻔한다.

명언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지만, 키 큰 병사들이야 말로 나의 약점이오"라는 말을 했다. 오오 그거슨 비누줍기[15]

실제로 키가 워낙 작아서(...) 키가 150인데 몸무게는 100킬로가 넘었다고 하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키가 2M가 넘어가는 장정들과 거인들을 전국 각지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싹싹 긁어 모아 와서는 거인부대를 창설하기도 했다.[16] 물론 2미터가 넘는 장정들이 실전에는 쓸모 없는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고...(그러나 당시는 전열보병 시대인지라 은엄폐나 산개의 개념이 없던 시대였다. 물론 유격병이나 저격병이 당시에도 운용되었고 이들은 은엄폐외 산개를 적극 활용했으나 엄연히 보병의 주축은 전열보병. 때문에 키큰 장정이 실전에서 개쓸모 없다는건 다분히 현대적인 시각. 괜히 그 인간흉기프랑스 제국 근위대를 178cm 이상부터만 뽑았을까? 물론 키가 크고작고는 전쟁에서 그닥 중요한 요소가 안되는건 맞다.

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로이센 역대 군주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
1744년 9월 25일 ~ 1797년 11월 16일
재위 1786년 ∼ 1797년 11월 16일
프로이센 왕국의 제4대 국왕.

2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생존한 아들 중 둘째인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백부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식이 없고 아버지가 일찍 죽은 영향으로 14세때 부터 추정상속자로 취급받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왕비와 생모가 친자매[17]인데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왕비가 자식이 없는 영향으로 예쁨을(?) 받았고 큰아버지와 삼촌들이 열심히(?) 전쟁에서 구르며 영토를 확장한 덕을 톡톡히 봤다.

1786년 왕위에 오를때는 별 존재감이 없었는데 전임자가 워낙에 존재감이 후덜덜한지라 "늙은 프리츠가 죽으니 듣보잡 뚱보가 왕이 됐네!?" 정도의 반응... 인기를 올리기 위해 재임초 프리드리히 대왕이 말년 인기하락 주 원인이던 국가 독점 담배전매를 폐지했다. 대신 커피같은 다른 사치품에서 세금을 올렸다.

가정적으로는 개막장이었다. 첫 아내[18]와는 결혼초기부터 불화로 따로 애첩을 두며 문란한 생활을 했고 아내가 바람을 피워 임신을 하고 도망가다 잡히자 강제로 구금시키고 이혼했다. 이후 두번째 결혼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결혼생활을 계속 하면서 애첩에게 다섯의 자식을 따로 얻었다. 아예 쓸모 없는 짓은 아니어서 서자중의 한명은 손자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시절 총리를 지낸 브란덴부르크 백작이다. 그리고 말년에 애첩하나를 또 얻었다.

재임중에는 행운이 따랐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귀속되기로 결정은 되었으나 호엔촐레른 가문 방계들이 다스리던 남독일의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 지역은 프랑스 혁명 영향으로 혁명분위기가 고조되자 진압할 능력이 없는 방계 혈족들이 프로이센에 대신좀 다스려 달라고 영토를 고대로 들어 바친것... 그리고 경솔하게 오스트리아에 낚여서 프랑스를 쳤다가 이건 아닌듯 싶어서 중간에 도로 빠졌는데 프랑스에선 혁명이후 유럽에서 최초로 프랑스와 강화하는 나라라하여 매우 반가워 했고, 1795년 바젤 평화조약으로 라인강 서쪽의 코딱지 만한 영토를 프랑스에 바치는대신 프랑스로 부터 영국과 동군연합 하노버 점유까지 승인받았다. 당연히 다른 유럽국가들한텐 얍쌉하고 비열한 행동으로 욕은 많이 먹었다..

그리고 동쪽국경에선 1792년 1795년 폴란드 2차, 3차분할에 참가하여 영토는 재위초보다 배이상 늘어났다. 1797년 사망한다.

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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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 역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Friedrich Wilhelm III
생애 1770년 8월 3일 ~ 1840년 6월 7일
재위 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
프로이센 왕국의 제5대 국왕.

3의 아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컸고, 성격도 매우 우유부단했다고 한다. 재위 초부터 전제 군주정의 군주였지만, 실제 권력을 휘두르진 못했다.
프로이센은 이전 1795년 바젤 화약 이후로 프랑스의 패권을 방관하고 프랑스의 오스트리아 견제용으로 마인강 이북의 독일 지역 영향권을 인정받았는데 역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하노버를 점유한 탓으로 영국과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다. 따라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정벌하고 다음은 프로이센 차례가 되자 다시 옛 관계를 청산하고 대프랑스 동맹편으로 붙을 수 밖에 없던 상황. 꼭 군주가 무능해서 병신짓 한 건 아니었다. 결국 신하들에게 등 떠밀려 선전포고를 하고 1807년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나란히 박살이 났고 동프로이센 국경 영토 끝 틸지트까지 도망갔다. 여기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중재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며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폴란드 원정 참조.) 나폴레옹은 "한심한 국왕, 한심한 군대, 한심한 나라"라며 코앞에서 그를 능욕했는데 패망한 처지라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후에 나폴레옹의 인물평으로는 무능하긴 하지만 인간성은 나쁘지 않다는 평.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는 출정 전야식에서 독일내 군주들을 대표하여 나폴레옹의 무운을 빌며 건배 선창을 외치는 안습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런 역할을 맡아서 쪽팔렸던 탓인지 신하들이 나폴레옹 배신 때리자는 소리를 씹다가 클라우제비츠를 비롯한 군인들이 왕의 말을 거역하고 나폴레옹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러시아 원정을 하고 온 나폴레옹을 역관광 시키긴 했지만 우유부단해서 장군들과 신하들에 밀려 선전포고 한 것이었다.
전쟁 후 유럽의 실권은 빈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본인이 직접 빈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실재로 프로이센 수상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가 모든 실무를 대표 했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강한 영향력 아래 우왕좌왕했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독일에서 상당한 영토 확장을 보장받았고 열강들에게 프랑스 감시 역할을 맡아서 유럽 패권국으로 인정받았다.

나폴레옹에 패망한 치세 중에는 슈타인 남작의 개혁과 훔볼트의 베를린대학 설립, 샤른호르스트의 군제 개혁 등으로 국운이 다시 일어섰고. 후에 프로이센-독일 관세동맹을 성공시키고, 이게 훗날 독일 제국 성립에 영향을 주지만 자기는 관여한 바 없다.깽판 안친게 어디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알고 신하들을 등용하는 것도 군주의 능력이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군주일지도 모른다. 그냥 시대를 잘 만난거 아냐? 원래 영웅은 시대가 만드는거다.

사실 본인이 특별한 능력은 없을지 몰라도 분명히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군주가 맞다. 단적인 예로 매우 호전적이고 교양이 없어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는 중용을 받지못한 블뤼허가 나폴레옹과의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19]

또한 귀족이 아닌 샤른호르스트를 초빙하고, 육군 개혁안을 제출하며 그가 요구한 귀족 신분과 참모총장 직위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요구에도 그걸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에게 개털린 이후 러시아 원정 전까지는 블뤼허 등의 애국파 및 개혁파들을 프랑스의 압력에 일시적으로 내쳤으나, 이는 당시 프로이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프랑스 군이 건재하고 프로이센 군은 궤멸 상태인데 애국을 부르짖으며 러시아의 손을 잡고 싸웠다면 프로이센은 그야말로 재기불능의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에 동행한[20] 클라우제비츠가 탈영을 감행 후 러시아로 종군하였으나, 러시아측 대표로 자국에 협상하러 온 그를 사면하고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삼았다.[21] 블뤼허 및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등도 재기용했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꽤나 융통성 있고 유능한 인재들에게 관용을 베푼 편이었으니 본인이 무능하다고 해서 폄하될만한 군주는 아니다. 결국 이렇게 중용한 인재들이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이후 발전 없이 안주하던 프로이센의 군제를 개편하고 나폴레옹에게 최후를 안겨주는데 일조한 셈.

또 빌헬름 폰 훔볼트가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를 설립할때, 대학 설립 주체는 민간이었지만 왕실 소유였던 토지를 직접 하사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전쟁 후 치세 25년은 별 볼일 없었다. 개혁군주가 될 뻔했지만 개혁의 주체들이 혁명사상에 영향받은데 대하여 자코뱅주의로 변질 될 까봐 극히 두려워했고 신하들을 불신했다. 자신의 멘토(?) 알렉산드르 1세가 자유주의 성향이었다가 말년에 전제정치로 복귀한 것과 판박이.


-루이제 왕비-

재위중에는 국민들에겐 얼짱으로 알려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출신의 루이제 왕비가 더 인기가 많았다. 1793년 결혼하여 루이제 왕비의 명성(?) 때문에 프로이센이 탈탈 털리고 나서 평화협상 중에 프로이센은 영토의 절반이상과 과중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는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남자인 자신보다 여러 차례 여자들에게 베갯머리 송사로 호구를 잡힌 경험이 있는 나폴레옹이라 남자보단 여자가 협상 상대로 유리하다 생각하고 루이제 왕비를 보내 간청하려 보냈다.[22] 나폴레옹도 호기심으로 왕비를 만나 보았지만 협상에선 칼같이 요구사항은 다 관철시켜서 미인계는 통하지 않았다는 후일담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밀덕이다. 나폴레옹에 쳐발리고 항복한 다음 프랑스과 프로이센 높으신 분들끼리 식사를 하다가 나폴레옹 옆자리에 앉았는데 대화 중에 군대 장비얘기가 나왔다. 군국주의 국가의 국왕으로 군용장비 스펙에 대해 좔좔 설명을 하면서 나폴레옹보다 더 한 지식을 뽑내서 나폴레옹이 깜놀했다고 한다. 물론 군사학이나 전술에 대한 지식은 커녕 지휘 자체를 해본 적이 평생 없었다.[23]

5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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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역대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빌헬름 1세

Friedrich Wilhelm IV
생몰 1795년 10월 15일 ~ 1861년 1월 2일
재위 1840년 6월 7일1861년 1월 2일
프로이센 왕국의 제6대 국왕.

4의 아들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치세말기엔 보수꼴통으로 오랫동안 다스렸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의 기대를 받으며 즉위하였다. 생긴 것과 달리 , 왕좌위의 로맨티스트 (낭만주의자)로 불렸다.

풍부한 재능과 높은 교양은 갖추었기 때문에 시민계층이 기대를 모았으나 그는 낭만주의자라기보단 그냥 오래 된 것을 모든것을 좋아하는 성향이었다. 개신교도였지만 쾰른 대성당 건축을 후원 할 정도였고 종교적으로도 관대하여 가톨릭교도를 총리로 임명할 정도였다.

1848년 혁명 시기에는 베를린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독일국기[24]를 두르고 "이제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고까지 말하면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받자, 독일 연방의 군주들이 추대한 왕관이라면 받겠지만 니네 아랫것들(?)한테선 받지 않겠다며 거부하고 혁명도 진압하였다. 실상은 다른게 혁명이 터지자 당시 군대들은 야전훈련이나 받지 진압훈련을 받은것이 아니라서[25] 도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나자 일부부대는 어버버하고 일부부대는 충분히 통제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발포하다가 70여명의 시민이 사망해버렸다. 피를본 시민들은 과격해졌고 국왕은 그만 베를린 거주지에 포로처럼 잡혀버린 신세가 되버렸다. 이 상황에서 '강경진압'과 '근위 연대가 있는 포츠담으로 도망' 이라는 두 선택지 중에서 강경진압은 성향이 아니고.., 도망치는것도 치욕감 때문에 선택하지 못 할정도로 우유부단했다. 결국 시위대의 희생자 강제 추모제에 참석하여 고개를 숙이게 되버린다.

초기 시민군에게 베를린이 장악되었을때 유혈사태 이후 강경진압을 하지 않은것 때문에 보수 반동 세력에 무지하게 까였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시민의회가 나가리되고 진압하자 이번엔 시민계층에 욕을 먹었다. 그러나 둘 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성향은 아니었다. [26] 혁명 와중에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 드립을 친 건 왕의 거의 포로나 다름없이 붙잡혀서 혁명을 상징하는 모자를 쓰고 시민군 희생자 추모회에 반강제 참석할 정도로 지위가 불안했기 때문이었지 특별히 자유주의민족주의 관심이 있는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왕이 자신의 편(?)이라 착각한것이지 애초에 자유주의 성향이 아니었다는것.

그리고 이후 각국에서 반동으로 혁명이 진압당하고 프로이센도 군대가 정비되어 반격을 시도해서 혁명은 이미 거의 나가리 된 상황이긴 했다. 왕관을 실제로 받았다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전쟁을 선포하고 쳐들어 올게 뻔했기 때문에 만약에 원했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었다.

혁명의 유산인 소독일주의를 계속 받아들였고 제한된 틀이나마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완전 듣보잡 시골 촌구석 융커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벼락 출세 시켜서 프랑크푸르트 독일연방의회 대사로 임명한것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다. 혁명이후 반혁명 구도로 자유주의를 탄압하는건 완전히 막지 못 했으나, 혁명으로 시민계층의 힘이 자란걸 인정해주었고 기존 신분제 제한의회에서 납세액에 따른 부르주아까지 정계로 편입한것은 시대를 잘 읽은 조치였다.

1857년부터는 정신병 발작으로 아우(훗날의 빌헬름 1세)가 섭정하였다.
  1.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할아버지 요한 지기스문트의 사위이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의 손아래 처남이다.
  2. 옛날이니 코렁탕이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이시대에도 귀족들은 반역이 아니면 예외였다.현대로 올수록 법에의해 보호를 받는 계층이 넓어진것일뿐
  3. 당시 하노버 왕실이 영국 국왕 자리에 오른 동군연합 상태였다. 하노버는 내륙국이라 영국과의 통행로가 차단된 상태였는데, 이를 해결하고자 하노버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바다에 인접한 스웨덴 영토를 노리고 참전했다.
  4. 심심할때 수도를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이 놀거나 게으른 모습을 보면 절대 용납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서 개패듯이 패버렸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오면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가버렸다. 덧붙여 취미가 베를린을 걸어서 산책하는 거였는데, 이유가 돈이 안 들어서 (...) 어쨋든 취미가 베를린 산책인 만큼 이런일은 자주 있었으며, 희생자가 젊은 남자일 경우 패고 나서 '너 군대갈래 일할래?' 를 꼭 물어봤다고 한다.
  5. 특히 왕비랑 시종과 시녀들 까지도 맞았다.
  6. 서로 사촌이다.
  7. 리그베다 위키 다른 항목에서 꽃과 문학을 사랑한 병약한 군주라는 개드립이 있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어린시절 큰 누나 빌헬미나에게 꽃은 싫고 큰 북을 치며 노는게 좋다고 해서 아버지를 흐뭇하게 한 적도 있다.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있었지만 프로이센 전통의 군국주의자도 맞다. 아버지 처럼 몰빵한게 아니라 "다른것도 좀 하면 안돼냐~"로 다툰것
  8. 오죽하면 큰딸인 빌헬미네의 일기에서 동생인 프리드리히 2세가 아버지한테 맨날 얻어터지는게 가장 가슴 아프며 포악한 아버지가 항상 죽기를 기도했으니 자식들에게 어떤 인간이라는지 짐작이 간다.
  9. 이때문에 왕비 조피 도로테아는 개깡패 남편을 정말 증오했다. 또한 두 사람의 성격도 극과극이라서 사이가 좋을수가 없다. 특히 자식인 프리드리히 2세를 걸핏하면 두들겨 패는일 때문에 항상 피눈물을 흘렸으니 도로테아 입장에선 남편이 아니라 원수였다.
  10. 근대이전 유아 사망률은 60% 정도
  11. 사실 달달 외우지 못하면 아버지한테 실컷 얻어맞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덜맞으려고 열심히 외운 것이다. 문제는 적성이 안맞는 것을 계속 해야 하니 프리드리히 2세는 죽을 맛이었다.
  12. 꽉꽉 짜맞추어 놓은 스케쥴은 둘째 치더라도 아들을 강하게 키운다는 명목으로 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꼬투리를 잡아서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고 욕설과 구타로 다스리곤 했다고 한다. 이에 아들이 거칠게 반항하면 만족하고 그만 두었지만 아들이 벙찌거나 겁을 먹어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성을 냈다고 한다. 이외에도 왕세자가 똑바로 하더라도 자기눈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들거나 하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욕설하고 구타하는게 다반사였다. 이러니 가출을 하지. 같이 탈출을 기도한 세자의 친구인 장교도 프리드리히 2세를 동정하고 있었다.
  13. 식사를 검소하게 했으며 돈을 아끼려고 부자나 귀족들의 파티에 직접 가서 포식을 했다. 옷도 화려한 옷이 아니라 항상 깔끔한 군복을 입고 다녔다.
  14. 어린이용 역사만화에서는 자신의 기준에서 유약한 세자를 보며 "에구, 저렇게 유약하니 나중에 왕이 되면 나라나 제대로 다스리겠나..."라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다음 컷에는 그 유약한 프리드리히 2세가 왕이 되자 프로이센의 군대를 두배로 증강하고 전쟁을 통해 유럽의 강국으로 발돋움시켰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묘사도 나온다. 하지만 어린이용 역사만화는 굉장히 미화를 시켰기에 이것을 믿으면 절대 안된다. 실제로는 정말 막장인 성격이다.
  15. 물론 여기서 말하는 키 큰 병사들이란 곧 강력한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그만큼 강한 군대를 갈망한다는 뜻.
  16. 거인들을 잘 대해주는 대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매우 혹독한 훈련과 심한 구타를 했기에 사람들은 이 거인 부대에 끌려가는 것 자체를 매우 혐오했다. 실제로 이 거인부대의 탈영과 자살이 다른 부대보다 매우 높았다. 이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때 바로 폐지된다. 거인부대의 병사들도 집으로 돌아갈수 있게 된것을 기뻐했다.
  17. 외가쪽으로 외삼촌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이 출가하여 겹겹겹사돈이다.
  18.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의 딸이다. 즉 서로 사촌간. 참고로 저 사이에서 딸이 나왔는데 조지 3세의 아들인 요크 공작 프레드릭(서로 사촌)에게 시집간다
  19. 쿠투조프가 개고생할 동안 황제가 훼방만 열심히 놓은 옆 나라랑 심히 비교된다.
  20. 나폴레옹의 강제차출이지만
  21. 결과가 좋았다고 한들 엄연히 왕의 말을 씹고 한 행동이므로,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건 명백한 탈영 및 적국에 대한 종군이다.
  22. 이미 나이도 서른이 넘고 일고여덟 차례 출산한 상태라 꼭 그 의도(?)로 간건 아니다. 남편보단 이쪽이 인간적 매력이 좀 더 있고 말빨도 그나마 나아서 이미 강화 조건은 정해진 후에 이벤트성으로 보낸 것.
  23. 마틴 판 크레펠트 <전쟁 본능> 에서
  24. 오늘날의 흑적황 독일연방 국기를 말함
  25. 1795년 영국에선 군경이 분리 되었는데 아직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못 했다.
  26. 왕세제 빌헬름왕자 (후일 독일 제국을 창설하는 빌헬름 1세)는 혁명세력에 살해당할까봐 영국으로 도망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