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농장

(협동농장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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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Collective Farm/State Farm

농지의 소유권을 공용, 혹은 국가로 놓고, 수익을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시스템을 가진 농장. 주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졌다.[1]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언뜻 보면 형편이 어려운 소작농을 구제해 줄 것으로 보이는 제도지만... 현실은 시궁창. 지주가 당으로 바뀌기만 했을 뿐, 농노제와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정부가 소유=당이 소유)해야 한다는 이론을 펼쳤다. 그 이론은 농업에도 적용되며, 그 실현으로서 토지의 소유권을 정부와 당이 독점하고 농민들을 철저한 예속 상태에 놓는 집단농장이라는 악습이 발생했다.

소련에서는 콜호스(집단농장), 소프호스(국영농장), 중국에서는 인민공사(人民公社)라고 불렸다.

2 실체

권력을 잡은 이후, 일차적으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부재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실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분배 사업을 펼쳤다. 자기 땅을 가지게 된 농민들은 열렬하게 환영하였고, 많은 자영농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곧 공산당은 공산주의적 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삽질을 했다.

이렇게 형성된 자영농들을 하나로 묶어서 협동농장을 조직하고, 농지의 소유권과 자율적인 경작권을 박탈한다. 모든 농민을 국가와 당 소유의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공산당들은 이러한 조치가 "자율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나 당의 조치에 반항하는 자는 지주로 몰아서 처형하고 혹독한 형벌을 가하기 때문에 강제나 다를 바가 없다.

협동농장에 묶인 농민들은 오직 당의 지도에 따라서 타율적으로 농업을 해야 하며, 농업 이외의 다른 산업에 종사할 직업 선택의 자유도 박탈당한다. 농작물의 처분권도 박탈당하며 모든 생산물은 '분배'를 명목으로 몰수된다.

결국 집단농장이란, 자율과 지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농노 제도로의 회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뻘짓이였냐면, 문화대혁명 종결 후인 1978년에 중국 공산당은 농부들이 텃밭에서 생산한 농축산물을 시장에 팔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전체 경작지 면적의 3% 밖에 안되는 텃밭에서 생산된 감자, 채소, 쇠고기, 우유가 전체 생산량의 61%, 29%, 34%, 76% 에 달했다. 소련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는데 일반인들에게 다차(별장)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여름휴가 때마다 텃밭을 가꿀수 있도록 한 결과 다차에서 생산한 농산물이 소련의 총 농업생산량의 1/4에 달할 지경이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좋은성과를 올린 경우가 있기는 한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고려인 집단농장이 대표적인 예다.(더 자세한건 김병화 항목 참조)

그리고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더. 소련의 인프라가 저열한 탓에, 미국 곡물수송선이 발트해에서 밀을 하역하는게 우크라이나/중앙아시아에서 열차로 밀을 수송하는 것보다 비용 대 수송량이 더 좋았다(...). 소련 농사가 잘 풀렸어도 이 가성비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3 말로

결국, 이 집단농장 계획은 여러가지 이유로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 아무리 일해도 농민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소득이 늘어나지 않으니 결국 대충 대충 농사를 짓게 되어서 생산성이 극단적으로 떨어졌지만, 공산주의 국가는 정책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잘못된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하는 이념적 딜레마에 봉착하면서 자작농을 지주로 보고 부정했기 때문에 이념에 발목을 붙들려서 집단농장을 해체할 수 없었다.
  • 중앙의 정책 실패. 인류 역사의 신묘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화자찬하던 소련, 중국의 지도부는 전부 다 얄팍한 유사과학에 속아넘어가거나 권위적인 최고 지도자의 사소한 실수를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처참한 정책 실패를 겪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유사농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말도 안되는 농학 이론을 도입했다가 농사를 대차게 말아먹어 각지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결국 그 당시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까지 그 여파로 권력을 잃었다.
중국에서도 대약진 운동을 펼치면서 리센코 식의 엉터리 이론을 도입해 농지에 작물을 빽빽하게 심는 밀식 농법을 추진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겪었고, 거기에 마오쩌둥이 시전한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스킬까지 겹치는 바람에 소련을 능가하는 대재앙급 기근으로 100만~1,000만 단위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헬게이트를 열었다.
  • 이들 국가에서는 집단농장을 정치범 수용소로도 활용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수많은 지식인들이 '하방'이라는 이름 아래 시골 집단농장들로 강제 이주당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 때문에 집단농장 근로자들의 노예화는 점점 더 심각해졌으며, 쓸데 없이 많은 인구가 집단농장에 몰려서 일손이 남아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 대학에는 조별과제라는 것을 시행하여 집단농장의 폐해를 교육한다.

4 후일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된 이후에 이들 농촌지역 주민들이 오히려 구 공산당 지지자들이나 그 후신정당들의 지지자들이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사실 러시아 연방 공산당도 농촌지역에서의 지지율이 높다.) 사실 위에 나온것처럼 매우 경직되게 집단농장을 운영한 국가는 스탈린 사후 시기에는 알바니아나 문혁시기의 중국, 북한 정도로 생각보다는 많지는 않았고.[2]대충대충 일해도 기본적인 월급은 나오는 체제인데다가(...) 구 공산권 국가에서는 대체로 인구이동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3] 체제전환 이후에 생산성은 향상되었지만 그 이상으로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어 농촌이 황폐화되는 경우도 많아서 그런지 집단농장 시기를 겪은 농민층들이 그때를 회상하면서 구 공산당계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 것. 물론 노인들이 대체적으로 정치성향면에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도 대충은 감안해야 하긴 할것이다.

  1. 단, 공산주의 국가에서만 있지만 않았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이러한 집단농장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캐나다재세례파 교인들인 후터라이트 집단의 커뮤널 팜(공동체 농장/집단농장), 미국의 보험사인 스테이트 팜(국영 농장), 이스라엘의 키부츠가 있다. 종교적인 동기를 통해 형성된 자발적 집단농장인데, 그 키부츠도 1990년대 들어서 하는 사람이 나날이 줄어서 외국 노동자가 외국인 자원봉사자로 버티는 수준이다. 그리고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농업 집단화가 이루어진 건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폴란드가 있다. 본래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 전반에 걸쳐서 농업집단화가 이루어졌지만 1956년에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농업 집산화가 중단되어버렸다.
  2. 물론 후에 공산화 된 국가에서 유연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그냥 소련의 농업집산화 정책을 따라했다가 피를 본 경우는 많다 대표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예를 들수있겠고 그 정도 수준은 아니더라도 집단농장을 만들다가 농민들의 반발을 사는 경우도 많다.
  3. 물론 인구이동을 억제했다고 해도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인구가 몰려드는 현상은 구 동구권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했고, 이는 인구통제를 엄격하게 했다는 북한도 마찬가지이다.(북한은 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도시지역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이농현상이 멈추다시피한거지 그 이전에는 당연히 산업화와 더불어 이농현상이 남한보다 덜하긴 해도 상당히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북한의 도시 인구가 60%에 이르는것이 그 증거다. 고난의 행군같은 경제난이 아니었으면 북한의 도시인구 비율이 지금보다 더 높았을지도 모르는 일)단지, 농촌지역의 황폐화가 극심하게 이루워지지않았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