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규

皇甫規
(? ~ 174)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위명(威明).

안정군 조나 사람으로 황보륭[1]의 손자이자 황보기[2]의 아들이며, 황보숭의 숙부. 단경, 장환과 함께 강족을 토벌하는 일에 힘써 양주삼명(凉州三明)으로 불린 인물이다.

2 강족 토벌

141년에 서강에서 삼보를 크게 노략질하면서 안정을 포위해 정서장군 마현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자 이기지 못했는데, 이 때 황보규는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마현이 군사에 관심이 적어 그가 싸움에 질 것임을 알고 현지의 정황을 자세하게 알렸다. 마현이 실패하고 전사하자 군 태수가 그를 군 공조로 임명해 8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족과 맞서게 했는데, 일부 침입한 적을 사살해 강족을 물러나게 했고 군 태수에게 상계연으로 등용되었다.

강이 대군을 이끌고 농서를 노략질하면서 조정에서 근심하자 황보규는 마현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이 출정할 것을 상소했지만 순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44년 9월 16일에 황보규는 현량 정방을 통해 천거하는 것에 대한 대책을 올렸지만 대장군 양기를 화나게 해 말단 관직인 낭중이 되자 병을 핑계로 낙향했다. 그런데 양기의 지시를 받은 지방관의 모함으로 여러 차례 죄를 뒤집어썼다가 무혐의로 풀려났고 14년간 집에서 시경, 주역 등을 가르쳐 그의 문도가 300명이었으며, 양기가 주살되자 관직에 오르라는 5번의 권유가 있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160년에 태산에 숙손무기라는 자가 도적의 무리를 이끌고 횡행하자 중랑장 종자가 토벌에 나섰지만 실패하자 황보규가 태산태수에 임명되어 이들을 소탕했으며, 161년에 령오, 선령, 상군, 침저, 뇌저 등 여러 종족이 힘을 보아 병량과 삼보를 공격하자 호강교위 단경이 의용병을 이끌고 정벌을 맡게 되었지만 곽굉이 단경의 공을 욕심내서 함께 하기 위해 오랫동안 잡아뒀다가 의용병들이 도망가면서 곽굉이 그 죄를 단경에게 뒤집어씌워 낙양으로 소환되자 노역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강족 등이 여러 군을 침입하자 황보규는 자신이 강을 정벌하는 일을 맡을 것을 상소하고 겨울에 중랑장에 임명되어 강의 여러 종족들을 공격해 800명의 수급을 획득했으며, 이 때 그의 신임과 위엄에 사모해 투항하러 온 자가 10여 만 명에 달했다.

162년 3월에는 침저의 강족이 장액, 주천 등을 노략질하자 대군을 인솔해 농서로 진군했지만 강족의 각 부족이 도로를 점령해 통과할 수 없었고 역병으로 3분의 1에 해당하는 병사들이 죽자 친히 군영을 찾아다니면서 위문했으며, 동강에게 사자를 보내 설득하자 강족의 여러 부족이 투항해 관중에서 양주로 통하는 길을 다시 열리게 했다. 황보규는 양주에서 여러 지방의 관리에 대해 조사해 뇌물을 받은 안정태수 손준, 항복한 강족을 죽인 속국도위 이구, 독군사 장빈, 일할 수 없는 노약자들을 동원한 양주자사 곽굉, 한양태수 조희 등을 파면하거나 죽였으며, 이 행동을 안 침저의 강족 우두머리인 전창기렴 등 10여 만 명이 항복했다.

그 해 겨울에 낙양으로 돌아와 그 공로로 후에 봉해지게 되었는데, 중상시 서황과 좌원 등이 뇌물을 얻기 위해 의랑으로 임명했고 그들은 빈객을 보내 뇌물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또한 황보규는 상주해 양주자사 곽굉의 죄과를 폭로했으며, 환관에게 굴복하지 않은 탓에 황보규를 강에게 뇌물을 보내서 항복시켰다고 무고를 당해 투옥되었다.

조정 대신들과 태학생 300여 명이 황보규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사면령이 내려져 석방되고 166년에 도료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부임한 지 수 개월 후에는 장환을 도료장군으로 추천하면서 사흉노중랑장에 임명되었다가 장환이 대사농이 되자 다시 도료장군이 되었다. 중요한 지위에 연속으로 부임하자 자주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으며, 친구인 상군태수 왕민이 상을 당하자 관할을 벗어나 하정까지 가서 인사했다.

3 당고의 금 이후

황보규가 일부러 빈객을 보내 이 사실을 병주자사 호방에게 밀고했지만 관직에 물러나려고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을 안 호방은 조정의 인재를 아끼는 뜻을 받들어 위에 알릴 수 없다고 했으며, 당고의 금이 일어나 당인들은 체포될 때 황보규는 서방의 유력한 장군이었지만 평화로운 때에 명성은 낮았기 때문에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황보규는 이에 은퇴하려고 했지만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67년에 상서가 되어 여름에 일식이 일어나자 환제에게 실정을 하늘이 꾸짖는다고 하면서 당고를 해제할 것을 얘기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보규는 홍농태수로 옮겨 수성정후에 봉해져 식읍으로 200호가 주어졌지만 이를 사양했으며, 호강교위에 임명되자 이를 받아들였다. 174년에 질병으로 낙양에 소환되었다가 도착하기 전에 곡성에서 죽었으며, 그가 남긴 문장은 27편에 이르렀다.

세설신어에서는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뇌물로 안문태수를 얻은 자가 명함을 내밀고 찾아오자 누운 채로 제 때에 일어나지 않고 군에서 기러기를 먹었는데 맛있냐고 물어 뇌물로 안문태수를 얻은 것을 비꼬았다. 잠시 후 왕부가 문에 있다고 하자 황급히 일어나 허리띠도 두르지 못하고 신발을 끌고 나와서 손을 잡아 끌고 들어와 앉았는데, 극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봉천 2천 석의 벼슬 아치를 만나는 것이 일개 유생을 만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1. 도료장군을 지냈다.
  2. 부풍도위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