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悔改
회계와는 다르다, 회계와는!

1 일반적인 의미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

옛날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친 사람이, 그 잘못을 고치고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철자 때문인지 회계와 자주 헷갈리지만, '회계'는 돈계산이라는 뜻이다.

2 기독교의 회개(Repentance)

기독교에서는 '회개'를 인간의 '외적 행동 변화'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를 믿지 않던 사람이 기독교를 믿게 되는 것 또한 회개(또는 회심)라고 부른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희생으로 자신이 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믿고, 다시는 믿기 전의 나쁜 행실이나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함에 의해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외가 하나 있다.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 그런데 몇몇 개신교에서는 목사가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고 남용하는 경우도 있어, 개인의 판단 하에 마구 가져다 붙이면 심히 난감하다.[1]

또한 죄가 그 행실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거나, 심지어 죄를 끊기 위해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말로만 하는 회개이지, 그 내면까지 변화된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본다.

가톨릭정교회에서는 나약한 인간이 죄에 계속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를 돕기 위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자주 받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일단 가톨릭에서, 회개는 두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회개의 동기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있는 완전한 회개, 즉 하느님의 사랑을 침해한 것에 대해 슬퍼하고 죄를 끊으려 하는 상등통회가 있고, 두번째로는 단순히 하느님이 두려워서, 벌받거나 지옥에 가기 싫어서 하는 불완전한 회개, 일명 하등통회가 있다. 신자가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를 보려면 최소한 하등통회의 정신은 갖추고 고해실로 들어가거나 사제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죄만 고해실에서 떠들고 뉘우치는 감정도 없이 고해성사를 한다면 그것은 모고해라고 해서 다시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봐야하는 큰 대죄가 된다. 즉, 고해성사를 인정하는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도 진정한 마음이 아닌 입으로만 나불대는 회개는 엄격하게 죄악으로 금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자기의 죄를 절실히 뉘우치고, 거기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모독한 것까지 슬퍼하는 회개(상등통회) 만으로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지만(그래서 대죄[2]나 수음죄 같은 무거운 죄(중죄)를 지은 사람이 고해성사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에 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면 그 사람이 절실하게 완전한 회개를 했을지는 그 사람과 하느님밖에 모르기 때문) 그래도 자신의 죄악이 대죄라면 완전한 마음으로 회개한 후라도 고해성사는 나중에라도 필수적으로 보아야 한다.[3]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통회로는 그 후의 삶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성사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 변화될 수 있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같은 죄를 또 고백하기 참 부끄러워서라도 문제 행동을 스스로 고치게 된다.

2.1 잘못된 회개

분식회계
구원파 같은 이단에서는 회개를 심각하게 왜곡하여 극단적인 교리를 만들기도 하는데, 자기 마음속에 죄책감이 들면 그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이 얘기는 신약성경의 한 줄,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논파된다.[4] 이 말은 그리스어 원문엔 현재 미완료 시제로 나와 있다. 성경에도 나오는 초대교회의 중역인 사도 바울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할 정신 나간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실제 사회에서는 말로만 회개를 하고, 막상 실제로는 악랄하며 양심을 저버린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를 빌미로 양심의 가책을 모두 내려놓고 태연하게 범죄적 행동을 반복하거나, 피해자를 모욕하는 짓을 저지른다.

이렇게 잘못된 회개를 한 인간은, 야훼 하나님에게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여기며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피해자에게 딱히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직접 보상을 하는 것보다는 선교 같이 기독교 활동에 봉사함으로써 죄를 갚는다는 기묘한 발상에 도달하게 된다.[5]그리고 피해자들의 질타, 세상에서 받은 사회적 형벌 같은 것은 모두 하나님이 자신을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준비해둔 시련이라는 자기합리화에 도달한다. 시련론까지 가면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타인의 고통에는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회개했으니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은 일종의 정신승리이자 스스로 심판자, 즉 신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대표적으로 고문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이근안이나,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사건이 있다. 이근안은 2012년에 목사안수가 취소되었으며,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사건 같은 것은 교단에서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전도연송강호가 주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잘못된 회개로 인해 초래되는 비극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당장 성경 내에 참 회개를 한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보자. 세리 삭개오(자캐오)는 부당한 세금을 착취한 피해자들에게 4배로 갚았다. 사도 파울로스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족쳤지만 회개하고 나선 사형을 당할 때 까지 전도를 하였다. 정말로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였다면, 해당 죄가 법에 위배된다면 자수하여 법의 심판을 받고, 피해자(또는 그 가족)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게 응당하다. 즉 자신이 피해를 끼친 당사자에겐 뻔뻔하게 굴면서 하나님께만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건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를 명심하자.
  1. 이건 무시되기 쉽지만, 의외로 논리적인 이유로 있는 죄인데, 애초에 구원을 위한 조건에 성령이 관여하는 고로, 성령을 모독, 곧 무시하는 행위를 행함은 전제 조건자체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용서될 수 없는 것. 이를 좀 더 깊게 해석하는 것은 교리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이 구절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성령 모독이 대관절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을 마구잡이로 하는 것에 있다.
  2. 보통 죄를 분명히 알고있으면서, 악한 자유의지로 지으며, 십계명을 거스르기 때문에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를 대죄라고 한다. 즉, 살인, 도둑질, 지나친 탐욕, 강도질, 간음이나 혼전성관계 및 동성애, 수음, 냉담 및 주일미사를 소홀히하고 참여안함, 신성모독과 배교 등등.
  3. 자신이 모르고 지은 죄, 그리고 대죄보다는 가벼운 일상에서의 여러 잘못들인 소죄는 고해성사로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고해성사 없이 하나하나 진실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미사에서 고백기도를 같이 바치고, 영성체를 해도 용서받긴 한다. 물론 보속은 알아서 열심히 기도와 선행으로 해야겠지만.
  4.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 묻거든, 죄인이라 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임을 벼슬삼지 말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5. 물론 선교나 기독교 활동 자체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죄를 뉘우치지 않고 회개없이 무슨 업보를 갚듯이 다른 선행으로 죄가 덮어진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하는 것이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