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48/역사

< SKE48

일본의 아이돌그룹 SKE48의 역사를 정리한 페이지.

1 2008년 ~ 2009년 : 출발

2008년 5월 30일 'SKE48 운영사무국' 명의의 보도 발표를 통해 AKB48 전국 전개 계획 제 1탄으로 아이치나고야 시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AKB48 팬들 중에는 'AKB48도 아직 안 떴는데 전국 전개 계획은 뭐냐'라며 어이없어 하는 팬들이 많았다.[1]
이 계획은 빠르게 추진되어서 6월 1일 SKE48 1기생 오디션을 시작하였고, 6월 5일에는 선샤인 사카에에서 'SKE48 프로젝트'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이 기자회견을 통해 SKE48은 선샤인 사카에 2층의 선샤인 스튜디오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것, 10월 상반기에 데뷔한다는 것 등을 발표했다.

7월 30일 오디션에 합격한 1기생 22명과 AKB48에서 이적한 나카니시 유카를 포함한 23명의 멤버가 선정되어 SKE48 활동을 시작하였다. 8월 23일 열린 AKB48의 콘서트 'AKB48 여름축제'를 통해서 처음 모습을 공개하였다.
10월 5일 'PARTY가 시작된다구' 세트리스트를 통해 극장 공연을 시작하였는데, 전체멤버 23명 중 16명의 선발 멤버만을 뽑아서 공연하였고, 이후 이 16명이 SKE48의 첫 팀인 팀S의 스타팅 멤버가 되었다.

그러던 중 AKB와 SKE 팬 모두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한다. AKB48의 싱글 <大声ダイヤモンド>에 SKE48의 멤버 마츠이 쥬리나가 선발, 그것도 무려 센터로 발탁된 것이다. AKB의 싱글에 자매 그룹 멤버가 선발로 들어간 것은 최초였기 때문에 AKB48 팬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쥬리나는 이 싱글의 센터 포지션에 솔로 자켓까지 찍는 등 상당한 푸쉬를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AKB 팬들의 미움을 받았고, AKB 팬들은 하이터치회에서 쥬리나만 무시하고 가는 등의 행동을 보이면서 직접적으로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AKB의 팬들 사이에서 SKE48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9년 2월 2기생 오디션[2]을 개최하여 연구생을 선발하였다. 이후 오디션에 합격한 2기 연구생을 중심으로 팀KⅡ가 만들어졌고 '会いたかった' 공연으로 극장 공연을 개시했다. 한편 팀S는 첫 오리지널 세트리스트인 '手をつなぎながら' 공연을 시작했는데, 명곡이 많은 공연으로 쭉 호평을 받고있다.[3]
각종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한 AKB의 1회 총선거에서는 마츠이 쥬리나가 19위, 마츠이 레나가 29위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 두멤버에 대한 팬들의 지지가 입증됨에 따라 SKE의 멤버가 AKB48 싱글 선발로 뽑히는 것에 대한 반발도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2 2009년 ~ 2011년 : 메이저 데뷔

2009년 8월 5일, 첫 싱글 <強き者よ>를 통해 메이저 데뷔를 이루었다. 레이블은 애니송을 전문으로 다루는 소규모 음반사 란티스였다. 이 싱글에서는 선발 제도가 없었고, 팀S에 속해있던 16명이 전부 녹음에 참가했다. 9월에는 위성방송을 통한 비정기 방송이지만 그룹의 이름을 건 첫 방송인 SKE48학원이 생겼다.

상대적으로 긴 텀을 두고 2010년 3월 발매된 두 번째 싱글인 青空片想い에서는 본격적으로 선발 멤버 제도를 실시하여 7명의 멤버만이 선발로 뽑혀 싱글 타이틀 곡을 부르게 되었다. 그룹의 주축이었던 팀S 에서는 마츠이 쥬리나, 마츠이 레나, 야가미 쿠미가 선발 멤버가 되었고, 선발에 뽑히지 못한 팀S 의멤버들은 커플링 곡(팀B.L.T.)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사이 선발에 탈락한 팀S 멤버들 중 타카이 츠키나, 야마시타 모에, 모리 사유키, 신카이 리나 4명이 졸업 발표를 하였다. 이 멤버들 중 신카이와 모리 사유키는 미디어 출연도 적지 않았고 팬들도 어느 정도 보유한 멤버였지만 학업을 이유로 삼아 졸업을 발표했기 때문에 팀S 및 SKE48 전체에 있어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그 전에도 졸업생은 존재했지만 인기 멤버가 스스로 연속해서 빠져나간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SKE의 위상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비슷한 시기 3기생 오디션을 개최하여 3기 연구생을 선발하였다. 팀S의 1기, 팀KⅡ의 2기, 팀E의 4기와 달리 3기생은 주축이 되어 팀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키자키 유리아, 스다 아카리, 야카타 미키, 하타 사와코, 오기소 시오리처럼 각자 자신이 속한 팀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며 호평을 받았고 곧 이들이 졸업으로 빠져나간 멤버들의 빈 자리를 채우면서 SKE48 위기설은 조용히 사라지게 되었다.

2010년 열린 2회 총선거에서는 마츠이 쥬리나와 마츠이 레나 둘 다 미디어 선발에 진입하였고, 오오야 마사나, 야가미 쿠미, 타카야나기 아카네가 언더걸즈에 진입하는 등 총선거에서 SKE48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특히 타카야나기 아카네는 팀KⅡ 최초로 선발 순위권에 드는 영예를 안았다.

10월 3일부터 17일까지는 SKE48 첫 단독 투어인 '땀의 양이 장난이 아니야'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SKE48였지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팀KⅡ 멤버였던 키토 모모나, 이구치 시오리, 우치야마 미코토, 사이토 마키코가 일부 팬들과 부적절한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 발각된 것이다. 당시 SKE48 지배인이었던 유아사 지배인은 사실을 인정하고 10월 7일 네 명을 연구생으로 강등시켰다.
팀KⅡ는 이 사건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지만, 리더인 타카야나기 아카네가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4]

2010년 7월 4기 4기 연구생을 선발하였고, 그 중 16명을 선발하여 4기생이 주축이 되어 팀E를 결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순식간에 네 자리가 비게 된 팀KⅡ에는 아비루 리호, 고토 리사코, 야카타 미키 등이 들어가게되어 신팀KⅡ 체제가 성립되었다.

3회 총선거에서는 SKE 멤버 6명이 권내에 진입하는 이변이 일어난 가운데 선발 바로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타카야나기 아카네가 주목을 받았다. 타카야나기 아카네는 팀KⅡ를 대표해서 프로듀서 아키모토에게 직언을 던지는 리더로서의 패기를 보여주었다. [5] 팬들도 멤버들도 지쳐가는 와중에 타카야나기 아카네가 프로듀서인 아키모토에게 '새 공연을 써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것이다. 그 덕에 팀KⅡ는 같은 해 10월 첫 오리지널 공연인 '라무네를 마시는 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때 보여준 모습으로 인해 타카야나기 아카네의 팬이 많이 늘었고, 리더로서의 자질도 높게 평가받게 되었다.

3 2011년~2012년: 영광

2011년 6월, 기존의 음반사였던 크라운 골드 대신 에이벡스로 레이블을 옮겼다. 이것은 에이벡스에서 SKE48을 모셔온 것에 가깝지만[6] SKE48로서도 대형 음반사인 에이벡스의 자본력과 홍보력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것이었다. 크라운 골드 역시 중견 음반사기는 하지만, 에이벡스에 비할 바는 못된다. 에이벡스 이적 후 발매한 첫 싱글 <パレオはエメラルド>는 초동만으로 전작을 뛰어넘는 등 눈부신 판매량 증가로 SKE48의 존재감을 많은 이들에게 드러내었다.

2011년 11월 1일, SKE48의 소속사였던 피타고라스 프로모션이 SKE48 관련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이전까지 SKE48과 SKE의 모든 멤버들은 피타고라스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이 이후 모두들 AKS 소속이 되었다. 당장 SKE48의 활동에 위기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AKS가 SKE48과 HKT48을 모두 전담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SKE48이 홀대를 받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피타고라스가 손을 뗀 영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12년 들어서 CM 일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7]

2012년 첫 싱글인 <片想いFinally>는 여고생들 사이의 사랑과 다툼, 일탈을 그린 뮤직비디오로 인해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SKE48의 장점인 군무를 살린 격렬한 안무와 지금까지의 SKE48 싱글 곡과는 다른 안타까운 분위기의 멜로디는 호평을 받았고, 이 곡으로 뮤직 스테이션에도 처음 출연했다. 이 싱글을 통해 SKE48은 드디어 하프 밀리언(50만 장 판매)를 기록하였다.

AKB48의 사이타마 아레나 공연 중 3월 24일에는 마츠이 쥬리나가 AKB48의 팀K 멤버로 겸임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이튿날인 3월 25일에는 멤버 중 마츠이 레나, 야가미 쿠미, 타카야나기 아카네의 소속사가 발표되었다. 레나는 바닝 계열의 Grick, 타카야나기는 에이벡스에 소속되었고 야가미의 소속사 타진은 무산되었다. 이런 일련의 발표는 팬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다. 쥬리나는 가뜩이나 활동으로 인해 지친 상태인데 팀K의 활동까지 떠맡는 것은 무리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고, 레나의 소속사인 Grick은 바닝 계열인데다가 야쿠자와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까지 돌면서 팬들의 우려를 낳았다.

4회 총선거에서 SKE48 출신 멤버는 15명이나 들어갔다. 특히 17위부터 32위까지의 언더걸즈는 절반에 해당하는 8명이 SKE48 멤버라 '언더걸즈가 아니라 사카에걸즈'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처음으로 팀E에서 키모토 카논이 순위에 들었고, 팀KⅡ에서도 야카타 미키, 무카이다 마나츠, 후루카와 아이리, 하타 사와코 등이 순위에 들었다. 그러나 쥬리나는 많은 팬들이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9위에 그쳐서 아쉬움을 낳았다.

2012년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SKE48 단독 명의로 출전했다. 그 이전에도 AKB48의 일부로서 출전했지만, SKE48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것은 이 해가 처음이었다. 참가한 곡은 <パレオはエメラルド>로, 이후 SKE48의 대표곡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선샤인 스튜디오를 SKE48 전용 극장으로 바꾸는 공사도 진행되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아티스트들이 대관을 하면 공연을 할 수 없었지만, 전용 극장으로 바뀐 후 시설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공연 일정이 여유로워졌다.

4 2013년: 변화

이렇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SKE48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1월 15일 갑자기 아홉 명이나 되는 멤버가 졸업을 발표한 것이다. 주요 멤버인 야가미 쿠미, 오기소 시오리, 히라마츠 카나코, 쿠와바라 미즈키, 하라 미나미를 비롯, 타카다 시오리, 아카에다 리리나, 우에노 카스미, 코바야시 에미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 달 남짓 지나서 KⅡ의 투톱 하타 사와코 역시 졸업을 발표하면서 선발급 멤버가 7명이나 빠져나가는 비상 사태가 발생했다. 마치 두 번째 싱글 발매 때 정규멤버 4명이 줄지어 빠져나간 때가 떠오르는 상황 .

멤버들은 작년부터 졸업에 대해 상의해 왔고, NMB48 졸업러쉬로 인해 발표하지 못하다가 이쯤 되어서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운영진의 미숙한 운영, 소수 인기 멤버에 집중된 푸시, 그리고 로컬 아이돌로서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팬들은 보고 있다. 쿠와바라는 블로그에서 오디션을 보고 싶었으나, SKE에 있던 5년 동안 운영진이 반대하여 오디션을 응시하지 못했다는 글을 남겼다. 팬들 사이에선 운영진에 대한 비판과 함께 팀 셔플, 스폰서 확보 등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말들이 나오는 중이다. 허구헌날 AKB48 악수회에만 참가시키고 단독 콘서트는 1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이며 광고나 드라마 출연 등의 활동을 시키지 못한다는 것. 9명의 졸업 발표 이후 마츠이 레나가 공식 블로그에 졸업에 대한 글을 남겼고, AKB48오오시마 유코도 9명의 졸업에 대한 감상을 구글 플러스에 남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5기 연구생들이 괜찮다는 것. 이미 정규 멤버로 올라가 있던 스가 나나코, 후루하타 나오 이외에도 팬들로부터 주목받는 연구생이 많아서 졸업생들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다. 이 외에 6기 연구생 중에도 키타가와 료하가 열렬한 광푸쉬를 받으며 성장 중에 있다. 언젠가 세대 교체가 필요할 것이라면 지금 하는 게 낫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발매한 2013년 첫 싱글 <チョコの奴隷>는 초동 50만, 총판 70만 장을 기록하며 날개돋힌 듯 팔려나가며 SKE48 팬덤의 화력을 보여주었다.

2013년 4월 13일 졸업생들의 마지막 콘서트인 '변하지 않는 것, 언제나 함께라는 것'이 가이시홀에서 열렸다. 이 콘서트에서 팀S, 팀KⅡ, 팀E 멤버의 셔플과 연구생 대량 승격이 발표되었다. 6기생 아즈마 리온이 극장 공연 개시 한 달만에 승격하였다.[8]

2013년 6월 치뤄진 5회 총선거에는 SKE48이 전년도에 이어 놀라운 약진을 보여주었다. 더블 마츠이는 3년간 염원하던 카미7에 나란히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스다 아카리는 훌륭한 악수회 성적과 반비례하는 푸시를 비웃기라도 하듯 16위에 랭크인해 마츠이 두 명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AKB48 선발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시바타 아야는 전년도 권외 멤버가 그 해 속보 8위, 최종 17위라는 믿기 힘든 성적을 보여주며 총선거 최대의 신데렐라로 떠올랐고, 그 외에도 그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구 팀E의 멤버들이 대거 랭크인하는 좋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다만 연초 졸업한 멤버들을 지지하는 팬들의 사표가 이들에게 일시적으로 옮겨졌다는 말도 있어서 진짜 결과는 다음 해에도 이 성적을 유지하냐에 따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8월에 열린 AKB48 전국투어 콘서트에서, SKE48이 그 동안 염원해오던 나고야 돔 단독 콘서트가 열리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 동안 나고야를 중심으로 활동해 오면서도 나고야의 상징적 공연장이자 가장 큰 규모의 나고야 돔에서 단독으로 공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SKE48로서는 계속 꿈꿔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발표를 듣고 멤버들이 울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고야돔 공연이 대격변의 현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 혹은 우려도 존재하는데, 작년에 이어 정규 멤버가 염원하던 나고야 돔 공연을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마치고 대거 졸업할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 전 팀이 신공연 세트리스트를 받아 새로운 오리지널 공연을 시작할 것이라는 발표도 나왔지만, 안정적인 일정 연기가 이어지면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모습.

5 2014년 : 새로운 시작

2013년 말에서 2014년 초까지 또 다시 졸업 폭풍이 SKE48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5기생 푸쉬멤버인 니이도이 사야카, 스가 나나코의 졸업이 첫 스타트를 끊었다. 특히 스가의 졸업은 상당히 말이 많았는데, 선발도 넣어주고 방송도 자주 나오던 스가가 졸업한다면 대체 누가 SKE에 남아 있겠냐는 것. 해가 지나고 곧바로 사토 세이라, 무카이다 마나츠, 마츠모토 리나의 졸업발표가 이어졌다. 특히 운영에 대한 섭섭함을 표시한 사토를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학업'을 이유로 그룹을 나간 것이 특징. 노력해도 위로 나아갈 수 없는 미래가 불안해서 학업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연초에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의 홍보 모델을 SKE48이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9]특설 사이트 그 동안 철밥통 센터를 맡아오던 더블 마츠이가 아니라 키자키 유리아가 센터를 맡으며 뭔가 변화의 흐름이 찾아오는 게 아니냐는 작은 예측이 있었지만... 조금 다른 의미의 변화가 찾아왔다.

전 그룹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2014년 2월 24일 'AKB48그룹 대조각축제 ~시대는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앞밖에 보지않아!~'는 SKE48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연초 갤럭시 센터에 뽑히며 쥬리나에 이어 제2의 센터가 될 것이라 예상했던 키자키 유리아가 AKB48 팀 4로 이적했다. 여기에 미야자와 사에가 팀 S 캡틴으로, 야마다 나나와타나베 미유키라는 NMB48의 에이스들이 겸임으로 사카에에 찾아왔으며, 결정적으로 마츠이 레나가 뜬금없이 노기자카46과 겸임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사카에 멤버와 팬들은 전부 집단 멘탈붕괴에 빠졌다.

중견급 멤버들과 갓 승격한 5기생들이 잇따라 그룹을 떠나고, 잦은 팀 셔플로 인해 각 팀의 정체성은 물론 SKE48 전체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면서 팬덤이 많이 흔들렸다. 특히 SKE48은 특정 멤버만을 좋아하는 개인 팬보다는 오랫동안 쌓은 멤버들 사이의 관계성과 그리고 그룹 전체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그룹 팬이 많은데 팀 셔플과 대조각으로 각 팀의 분위기가 사라지자 이런 팬들이 조금씩 이탈하였고, 그 영향은 싱글 판매량으로 드러났다. SKE 중견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인지 AKB의 중견인 사토 스미레, 오오바 미나, 야마우치 스즈란을 SKE로 이적시켰다.

2014년 10월 6주년 기념 공연을 실시하였다. 이 자리에서 47도도부현 전국 투어와 SKE48 다큐멘터리 개봉이 발표되었다. 마츠이 레나는 트위터에서 'SKE48은 이제 다시금 시작한다'라고 밝혔다.트위터

6 2015년 : 또다시 찾아온 위기

20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1기 나카니시 유카사토 미에코가 2015년 3월에 졸업할 것임을 발표한데 이어, 연초에는 차기 에이스로 점쳐지던 5기 야마다 미즈호이와나가 츠구미, 그러고 2기 아비루 리호 마저 비슷한 시기에 졸업을 발표했다. 최고참 멤버들과 차세대 멤버들이 연이어 졸업을 발표하자 팬들은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심지어 2월 1일 팀 KⅡ 리더인 2기 후루카와 아이리 마저 3월 중 졸업을 발표, 더불어 2월 4일엔 연구생인 5기 오기노 리사와 6기 사사키 유카가, 2월 6일엔 4기 코바야시 아미까지 졸업을 발표하였다. 2014년 연말을 이후로 3기를 제외한 전 기수에서 총 9명이 졸업을 선택함에 따라 SKE48 팬덤은 그야말로 공황에 빠졌다.

게다가 본점선발급 멤버인 스다 아카리가 SNS에 '며칠동안 일이 없어 불안했다'는 언급을 했던 것도 발굴되면서 운영의 무능함이 지탄받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졸업러쉬로 인해 SKE의 차세대 자리가 텅텅 비어버리게 된 것이다. 스다와 시바타가 있지만 그 뒤를 이어갈 기세를 보이는 멤버가 없다. 키자키 유리아AKB48로 이적하였고, 다른 차세대들은 악수회 대비 총선이 모자라거나 하락세거나, 혹은 아직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거나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졸업을 암시하거나, 졸업 관련 루머가 도는 멤버들이 많이 남아 있어 팬들의 불안감은 더욱 더 커지는 중. 일각에서는 12月のカンガルー에서 나온 깜짝선발, 깜짝센터가 다른 멤버들에게 '우리도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온다!'는 식으로 동기부여를 한 게 아니라 '우리가 발버둥쳐봤자 기회는 오지 않는다'는 좌절감만 불러일으킨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0].

이 뿐 아니라 AKB48 2015 Request Hour에서 NGT48의 10월 발족 발표와 함께 이마무라 에츠로 지배인의 NGT48 이적[11]이 발표되면서 팬덤은 다시 한번 공황에 빠졌다. 이마무라 에츠로 지배인의 경우 존재 이유가 의문시되던 이전 지배인들과 달리 SKE48 부임 후 전국 투어, 칸무리 방송 등 다양한 방면에서 SKE48의 활동영역을 넓혀오며 팬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

심지어 SKE48 7기 오디션이 한창 진행중인 와중에 48그룹 제2회 드래프트 오디션이 개최 소식이 알려짐과 함께 일부 7기 연구생 후보들의 사퇴가 이어졌으나 7기 연구생들이 극장데뷔를 하고부터는 대체로 호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AKB48 7회 총선거에서 SKE48에 적을 둔 멤버들의 대약진이 돋보였다. 정확히는 팬들 화력이 돋보이는 부분이지만, 결과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듯 본점 멤버들보다 3명 많은 26명이나 권내에 진입하면서 총선에 강한 SKE48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특히나 이적조로서 하락세라고 생각되었던 사토 스미레, 야마우치 스즈란이 퓨처걸즈에 들어왔으며심지어 스미레는 센터!, 타니 마리카는 언더걸즈인 23위로 '타니 임팩트'를 보여주었다. 선발 멤버로도 전 회의 마츠이 쥬리나, 미야자와 사에, 시바타 아야에 이어 타카야나기 아카네, 마츠무라 카오리가 드디어 선발 진입한 것은 괄목할만한 성과. 그러나 붙박이 상위권으로 예상되었던 스다 아카리가 전회 10위에서 18위 및 4,500여표 하락이라는 성적으로 대 타격을 받았던 부분은 대부분의 팬들이 안타까워 한 부분이다.[12]

게다가 연구생 프리쿠라 유출 사건과 같이 연예활동에 좋지 않은 사건이 터지는 등 우환을 겪었고, 2012년 이후 연속으로 출장해오던 홍백가합전에 낙선했다. [13]

야후재팬에서 2015년 트위터 포스팅, 야후재팬 검색결과(2014.7.1~2015.6.6 수집)를 통해 빅데이터 분석을 한 결과, SKE 멤버들은 다른 그룹에 비해 검색, RT횟수 등의 관심도가 득표수로 잘 이어져 총선거에서의 선전 등을 통해 오타들의 지지는 높다. 그러나 대중 인기는 48계열중에 가장 심각할 정도로 임팩트가 낮은 것이 치명타로 작용하는 중이다. 오죽하면 '총선거에 강하다'라는 통념이 오히려 독이 되어 SKE48이 빛나는건 총선 단 하루 뿐이다라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 하루빨리 운영이 일을 해야 하지만, 2011년부터 AKB,SKE,HKT 모두 AKS로 운영이 일원화되고 2015년부터 NGT 운영까지 AKS가 맡아야 하는 이상 운영에게 기대를 가지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운영을 죽입시다. 운영은 오타들의 원수

7 2016년

일부 멤버 간의 불화설[14]로 오타들 간의 내부 단합이 점점 약세로 기울고 있는 모양이다.
미야자와 사에의 졸업발표에 뒤이어, 제8회 총선거에 선발멤버인 시바타 아야, 마츠무라 카오리, 언걸 상위인 오오야 마사나 셋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인기 중견멤버들의 졸업이 기정사실이 된 상태. 하지만 이를 대체해줄 차세대들은 아직도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악수회 부수 감소, 음반 판매량 감소도 이어지는 중이라 SKE의 하락세에 불이 붙어 팬들의 위기감+운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전부터 지적받아온 지역과의 유착 문제 등에 조금씩 더 신경을 쓰면서 작은 일들이 늘어나고 있고, 다양한 일들의 분배가 예전보다 나아져서 작년과 비교해서 월등히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 홍보대사 행사 공연 등의 일이 늘어났으며 에이네이션 등의 큰 무대 출연을 할 기회도 늘어났다.

새로 들어온 7기생, 드래프트 2기생 에선 아직은 센세이셜한 재능도 없고 여러모로 졸업은 많아서 힘든 상황이다. 1세대 주역득의 다수가 졸업을 했고 시바타 아야가 졸업함으로써 중견쪽의 허리도 끊어진 상황.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6기 이전의 멤버들의 졸업이 많아 타 그룹에서는 차세대로 불릴 만한 기수의 멤버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차세대로 세대 교체가 된 상황에도 아직 30만장을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8월 9일, 8기 오디션 개최를 발표하였다.[15]
  1. 2008년은 AKB48 역사에서 가장 위기감이 높아졌던 시기이다. 판매량은 2만장 언저리에서 돌았고 지나친 상술로 인해 소니 뮤직과의 재계약을 이어가지 못하는 등 상황이 매우 안 좋았다.
  2. 이 오디션에서 AKB48 팀 K 소속의 요코야마 유이가 떨어진 적이 있다.
  3. 이후 HKT48 팀H, AKB48 팀4도 이 세트리스트로 극장 공연을 했다.
  4. 문제를 일으킨 네 명은 이후 연구생으로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다시금 승격할 수 있었다. 특히 사이토 마키코는 뛰어난 댄스 실력으로 연구생 공연의 질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5. 당시 팀KⅡ는 2번째 극장 공연을 끝낸 후 오리지널 공연을 받지 못한 채, 계속 리바이벌 공연만 진행하던 상황이었다.
  6. 에이벡스는 주요 아티스트들의 인기 하락과 신진 아티스트의 부재로 인해 음반사로서 위기를 맞았다. 그 때문에 순익은 뒷전으로 하고 매출이라도 올려보려고 아이돌 그룹과의 계약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죽진 않았는지 에이벡스는 2011년에도 음반시장 점유율 2위로 마감.
  7. 심지어 SKE의 지역 기반인 나고야+아이치현에 본사를 둔 기업들마저 광고효과와 지명도 때문에 SKE 대신 AKB(ex. 토요타, 카고메, Goo, 호유), NMB(코코이치방)를 전국CM 모델로 쓰고 있는 중이었고, 굳이 이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스타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나고야 기업 중 하나이자 일본에서 CM을 많이 내보내기로 유명한 코와(제약, 섬유, 광학 분야 종합상사로, 일본 전역에 아침, 오후, 심야시간대 CM을 많이 내보내기로 유명하다.)도 SKE 안 쓰고 다른 모델(ex. 타이거 우즈, 원더걸스 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2014년 코코이치방에서 SKE 콜라보 기획을 실행 후 2016년까지 이어오는 중.
  8. 이것은 타카죠 아키의 기록을 깬 것이다. 6기생 푸시조 3명 중 1명인 아즈마 리온은 처음으로 출장한 연구생 공연에서 '눈물의 쇼난'의 센터를 맡았다. 노래 실력이 꽤 괜찮다는 평을 받은 듯. 특이하게 본명과 별명이 같다. 별명은 가타카나로 'アズマリオン'으로, 마츠이 레나가 지어줬다(…).
  9. 일본 스마트폰 시장은 애플이 부동의 1위고, 그 뒤를 소니, 카시오, 샤프 등의 현지 기업이 잇지만 애플에 밀려 별 힘을 못 쓴다. 갤럭시 시리즈는 일본에서는 초기에 잠깐 잘 나갔던 적이 있지만 2014년 들어서는 영 성과를 못 내고 있다. LG는 G 시리즈의 일본향 제품인 KDDI isai 시리즈가 그럭저럭 나가는 정도.
  10. 해당 싱글 선발에서 본점 선발급인 시바타 아야마저 포지션이 밀려난게 치명적이었다.
  11. 유아사 히로시 AKB48 극장지배인의 SKE48 복귀, 시바 토모야 SKE48 극장지배인 연구생의 AKB48 극장지배인 이적과 함께 발표
  12. 다만 스다 아카리의 표수 하락은 '타니 임팩트'로 표현되는 타니 마리카의 급성장의 반대급부일 가능성이 크다. 운영에서 타니를 밀어주는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스다 아카리와 마츠무라 카오리 페어에 끼워넣기였던 것. 그러나 둘과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기 보다는 스다 아카리 팬덤에서 오시헨을 많이 이끌어내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 7회 총선거라 볼 수 있다. 금후의 스다 아카리의 활동에 주목해야 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다.
  13. 이전에는 이 프리쿠라 유출이 2014년 노기자카46마츠무라 사유리 불륜스캔들처럼 홍백 낙선에 결정타였다는 서술이 적혀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해당 멤버는 인지도가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연구생이었기에 스캔들 자체는 오타들이나 넷상에서 잠깐 반짝하고 말았다. 홍백에서 사카에가 탈락한 주요한 원인은 부실한 미디어 노출과 그룹 자체의 낮은 인지도 및 활약, 여자 아이돌 비중을 줄이겠다는 NHK 측의 결정의 조합이다. 사카에는 자매그룹을 통틀어 압도적일 정도로 외부 노출이 적은, 다시말해 일거리가 없는 그룹이었다. 스다나 시바타같은 인기멤버들도 스케쥴이라곤 극장공연과 어쩌다 한번 있는 그룹 전체 음방이 다였을 정도니...
  14. HKT로부터 이적한 타니 마리카가 은따(...)라고 추정되는 떡밥이 한 동안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드래프트 출신 소다 사리나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올라섰다. 이는 기존 SKE 멤버들이 텃새를 부린다는 논란으로 이어졌다.
  15. 9월 9일까지 모집 응모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