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2

  • 미 공군의 장거리 정찰기는 U-2에서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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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
멤버애덤 클레이튼보노디 에지래리 뮬렌 주니어
파트베이스보컬기타드럼

1 소개

현대 음악의 거장이자 포스트 펑크의 선구자

아일랜드 출신의 록밴드.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음악적으로도 수많은 성취를 이끈 레전드 밴드. 아일랜드의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며, 세계에서 수입이 가장 많은 밴드 중 하나다.


대표곡으로는 "Sunday Bloody Sunday", "Bad", "With Or Without You",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One", "Beautiful Day", "Vertigo" 등이 있다.

전 세계 인류 역사상 단일 투어로 110회의 공연하여 100% 전석매진에 1회 공연당 평균 67,000명을 운집시켜 총 730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는 가수는 U2만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2 활동

2.1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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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9월 25일 더블린의 한 고등학교에서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U2란 이름이 아니었으며, U2란 이름이 된 것은 1978년이다.

CBS의 눈에 띄어 1979년에 데뷔 EP Three를 내 아일랜드 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80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아일랜드(Island) 레코드와 계약하고 데뷔 앨범 Boy를 발표했고, 다음 해에는 두 번째 앨범 October를 냈다. 이 시절의 대표곡으로 "I Will Follow"가 있다.

초창기에는 로큰롤을 기반으로 한 스트레이트하고 둔탁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밴드였다. 이 시절 평론은 그럭저럭 좋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해 비운의 밴드가 될 뻔했다.

2.2 80년대, 성공을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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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낸 앨범 War가 영국차트 1위에 올랐고, 이후 투어에서 매진 공연을 잇따라 만들어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War 앨범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앨범으로, 반전주의의 메시지를 담은 "Sunday Bloody Sunday"를 비롯한 여러 명곡들을 수록했다.

이후 브라이언 이노를 만나 작업한 앨범 The Unforgettable Fire로 미국에서 차트에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이 앨범은 예전에는 다른 앨범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U2의 다른 명반들에 견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시원시원한 분위기가 특징인 밝은 포스트 펑크 넘버 "Pride (In the Name of Love)", U2 팬들이 최고로 치는 곡들 중 하나인 "The Unforgettable Fire" 등이 인기를 끌었다.

1985년에는 라이브 에이드에 출연해 존재감을 발산했다. 유투는 원래 "Sunday Bloody Sunday" "Bad" "Pride (In the Name of Love)" 세 곡을 연주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보노가 Bad를 부르던 중 객석으로 내려가 여러 여성과 춤을 추면서 "Sunday Bloody Sunday" 와 "Bad"만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여자들은 객석에서 뒤의 사람들에게 밀려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보노가 이를 보고 몸짓으로 여성들을 구하려 하였지만 스태프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결국 직접 내려가 여성들을 밖으로 데려와, 위로하고 껴안아 주며 음악에 맞춰 좌우로 움직인 것이었다. 이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사람들에게 유투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불후의 명반 The Joshua Tree를 내놓았다. 전작들에 비해 더 잔잔하고 차분해졌으며,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완성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를 석권하면서 세계적인 밴드로 떠오르게 된다. 앨범에 수록된 "With Or Without You"는 세계적인 명곡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로도 널리 불려지는 U2의 대표곡으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U2 팬들 사이에서는 With Or Without You 이상의 명곡으로 거론되는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뭔 이름이 이렇게 길어 등의 곡들도 수록되었으며 이 앨범을 통해 U2는 명실공히 80년대 최고의 록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어진 The Joshua Tree 투어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스타디움 공연과 거대한 조명놀이에 나섰고, 밥 딜런과 같은 다른 뮤지션들과 같이 연주했다.

한편 1988년에는 이를 담은 앨범 Rattle And Hum을 발매했으며, 이 앨범 역시 좋은 평가를 받으며 U2의 인기를 이어갔다. 특히 현악 세션을 도입한 아름다운 발라드곡 "All I Want is You"가 영국 차트에서 4위에 오르면서 히트하게 된다.

2.3 90년대, 실험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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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멤버 간 음악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겪었다. 보노와 에지는 좀 더 세련된 팝을 원했던 반면 애덤은 본연의 둔탁한 하드 록과 포스트 펑크를 원한 것이다. 이들은 베를린에서 "One"을 녹음하며 갈등을 봉합하고 1991년 Achtung Baby를 내놓는다. 전체적으로 통일성 있는 안정적인 분위기를 보여주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 앨범에서는 얼터너티브 록일렉트로니카 , 인더스트리얼, 매드체스터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실험적인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또 이때부터 활발한 사회 활동도 시작했다.[1] 앨범의 대표곡으로는 아름다운 가사와 잔잔한 멜로디로 U2 최대의 명곡으로 자주 꼽히는 "One", 특유의 강렬한 베이스라인이 인상적인 "Mysterious Way", U2의 얼터너티브 록을 대표하는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 등이 있다.

1993년 내놓은 Zooropa 앨범은 평은 괜찮았지만,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또한 상업적인 성공에도 실패하면서 U2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브라이언 이노 없이 작업한 1997년 작 Pop 앨범은 차가운 외면을 받았으며 이때가 U2 최악의 슬럼프라고 볼 수 있다.

2.4 2000년대, 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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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의식했는지, U2는 실험을 끝내고 2000년대에는 다시 본래의 록 사운드로 돌아갔다. 브라이언 이노가 다시 참여한 2000년 작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앨범은 U2 본연의 밝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록을 더 현대적으로 이끌어 낸 개성있는 사운드가 특징으로, 그래미상 주요 부문을 휩쓸었고, 22개국의 앨범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대표곡인 "Beautiful Day"도 크게 히트하며 각종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평단도 호평 일색으로 정상으로의 귀환을 축하했다.

2002년에는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9.11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연을 열었다. 2004년에는 앨범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을 발표하였다 투어를 통해 전세계의 돈을 쓸어갔다. 팬들에게는 U2의 현대 앨범들 중 최고의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 앨범은 거친 얼터너티브 트랙 "Vertigo", 조용하면서도 감동이 있는 발라드곡 "Sometimes You Can't Make it On Your Own", U2 본연의 사운드를 들려준 "City of Blinding Lights" 등의 곡들을 수록하며 역시나 평단의 극찬을 받았고 건재한 판매량을 보여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2005년에는 로큰롤 명에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9년에는 No Line on the Horizon을 내놓았다. 앨범의 "No Line on the Horizon"은 파격적인 얼터너티브 트랙으로 평가되었고 전체적인 작품성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전과 같은 상업적 성공에는 실패했다.

이후에는 360°투어를 다니며 세상에서 가장 큰 공연무대를 만들어 엄청난 조명놀이를 벌였다.

2.5 2010년대

2013년 말에는 1978년부터 35년간 함께한 매니저 폴 맥기네스가 떠났다. 그리고 마돈나의 매니저로 유명한 가이 오시리가 새 매니저가 되었다. 그의 영향인지, 유투는 공식 SNS 계정을 활성화하고 팬들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전에 없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트위터 공식 계정을 U2.com에서 U2로 바꾸어 팬들의 의견을 물은 뒤 반응을 리트윗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텀블러 계정을 만들고 움짤을 올리기도 했다.

한동안 새 앨범 발매 소식이 없었는데, 새 앨범이 정말 뜬금없이 발표되었다. 2014년 9월 9일에 itunes 독점으로 새 앨범 Songs of Innocence를 무료로 뿌렸다! 정식 앨범 발매 예정일은 2014년 10월 13일.그리고 아이튠즈는 지워지지 않는 스팸을 보낸다고 까였다. 이후 수정으로 해결. 앨범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편이고, U2의 이전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세련되고 모던한 트랙 "Sleep Like a Baby Tonight"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2.6 그 외

애덤 클레이튼(Adam Clayton)은 한때 유투에서 제일 사고를 많이 치기로 유명한 멤버였다. 음주운전에,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으며, 슈퍼모델인 나오미 켐벨(Naomi Campbell)과 짧은 약혼을 하기도 했으나 얼마 못가 파혼하였다. 지금은 나이가 나이인 만큼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초기의 진보적 성향이 많이 퇴색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2009년 초에는 탈세 혐의에 연루되어 명성에 먹칠을 하기도 했으나, 3월 발매한 No Line on the Horizon이 빌보드 1위에 랭크되면서 싸악 묻혀버렸다.

앨범이 나왔다 하면 그래미 어워드를 쓸어가는 밴드이다. 흑인 음악가들은 웁니다 지금까지 총 6회의 시상식에서 수상했고, 34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22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2006년에는 최우수 록 앨범상, 록 부문 최우수 보컬상, 올해의 레코드상 등 5관왕을 석권했다.

여담으로 더블린에서 결성은 됐지만 보노와 래리만 아일랜드 사람이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테마를 멤버인 래리와 애덤이 작곡했다.

3 영향

현재 음악계에 가장 영향을 준 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 많은 음악인들에게 무수한 영감과 파급력을 준 밴드이다. 좀 과장하자면 소위 모던 록을 구사하고 있는 밴드들 중에서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밴드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미국 출신인 더 킬러스라이브가 이들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존경의 표시를 하기도 했으며, 최근 밴드들 중에서는 콜드플레이 후기 음악적 성향이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노엘 갤러거는 U2의 사회활동을 비꼬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U2의 음악은 넘사벽이며 비틀즈의 음악에 버금가는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뮤즈도 2010년 글라스톤베리에서 U2의 기타리스트 디 에지를 초청해서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을 불렀다. 30 Seconds to Mars의 경우에도 정규앨범 This Is War로 U2의 영향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으며, MTV Unplugged 라이브에서는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을 커버했다.

멤버들이 음악활동 외에도 인권 및 반전운동, 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운동가이다. 대표곡들 중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곡들이 많이 있으며, 보노는 매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단골로 오르는 인물이다.

4 내한

지금까지 단..한.번.도 내한을 한적이 없고 락팬들 사이에선 통일한국이 되지 않는 이상 안올거라는 말이 있다.
콜드플레이와 함께 내한 '안' 오기의 양대산맥으로 뽑힌다.
내한 오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 말이 있는데, 일단 한국에서 유투의 인지도는 안습이다. 그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단 유투는 한국에서 맞지않는 포스트 펑크 장르와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인적이 없어 한국에서는 유투는 아는 사람만 겨우 아는 록밴드가 되었다.콜플은 한국팬 만나서 이야기 하기라도 했지 이런 상황인데 유투가 손해를 감수하고 팬들을 만나러 올리가 없다. 또, 만약 손해를 매울려면 공연기획사는 공연장에서 광고등을 해야하는데, 유투가 공연장 무 광고 원칙이 있어서 기획사들이 섭외를 더 안하려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큰 문제는 공연을 할 공연장이 없다는거다. 일본엔 도쿄돔등 5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수 있는 돔이 꽤 있지만 한국엔 공연용으로 쓸수있는 돔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앞에서 말한거 처럼, 유투의 개런티는 30억 이상인데, 유투가 듣보잡인 한국에서의 공연으로 그것도 공연티켓만으로 비용을 메꿀수없다. 그리고 관객이 충분해도, 그걸 수용할 돔이 없다. 결국...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예전에 유투 매니저가 한말을 보면
매니저  :  아시아에서는 우리들이 공연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 하지만 이 아시아 안에 '일본은 포함하지 않는다'
이걸 보면, 유투는 일본은 아시아와 다른 개별시장이고, 한국은 그냥 아시아국이라고 인식한다는걸 볼수있다. 즉, 이분들은 아예 생각이 없는거다. 아마 유투가 한국에 올날은 정으니가 무릎 꿇을날이 될거같다.

5 음반

U2/디스코그래피 참조.
  1. 이 시기의 사회 활동으로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작업한, 보스니아 내전을 비판한 "Miss Sarajevo" 싱글 발매가 있다. 1997년 Popmart 투어 때는 직접 사라예보로 가서 공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