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include(틀:바티칸의 역사)] [include(틀:이탈리아의 역사)] ||||||<tablealign=right><:> {{{+1 '''교황령'''}}}[br]{{{+1 '''Stato della Chiesa'''}}}[br]{{{+1 '''Status Pontificius'''}}} || ||<:>http://www.crwflags.com/fotw/images/v/va_p1808.gif?width=120 ||<:>http://www.ncregister.com/images/sized/images/uploads/Coat_of_arms_of_the_Vatican_City-255x289.png?width=80|| ||<width=50%><:> 국기 ||<width=50%><:> 국장 ||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e/Papal_States_1789.svg/450px-Papal_States_1789.svg.png?width=250 || ||||||<:> 지도[* ~~우리는 이 시대의 [[독일]] 지도가 유난히 더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동유럽]]이 유난히 깨끗한 것도 특이할 만 하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정반대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현대 독일은 깔끔하게 하나의 나라로 정리된 상태지만(물론 같은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리히텐슈타인]]이 있긴 하다), 동유럽은 [[소련]] 붕괴와 [[민족주의]] 대두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 [[752년]]~[[1870년]] || ||<:> 국가 |||| 우리는 하느님과[br]동정 마리아를 원한다,,(-1857),,[br]위대한 개선행진,,(1857–1870),, || ||<:> 위치 |||| [[이탈리아]] 일부와 [[아비뇽]] || ||<:> [[수도]] |||| [[로마]] || ||<:> 정치체제 |||| 신권 군주제[br]선거 군주제 || ||<:> 국가원수 |||| [[교황]] || ||<:> [[언어]] |||| [[라틴어]], [[이탈리아어]] || ||<:> [[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752년 성립[br]1309년∼1377년 아비뇽 유수[br]1798년 1차 해체[br]1870년 2차 해체[br](1920년 [[바티칸 시국]] 건국)|| ||<:> 통화 |||| [[스쿠도]],,(-1866),,[br][[리라]],,(1866-1870),, || ||<:> 성립 이전 |||| [[로마 제국]] || ||<:> 멸망 이후 |||| [[바티칸 포로]] || [목차] == 개요 == 敎皇領 [[중세]]시대부터 근대까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 다스리던 영지로 [[바티칸 시국]]의 전신이다. 교회령(敎會領) 또는 베드로 세습령(世襲領)이라고도 부른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의외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비뇽 유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아비뇽(위에 지도에서 프랑스 쪽에 작은 점 부분)도 교황령이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아비뇽은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 역사 == 321년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회에 대한 규제를 철폐한 이후 신앙심이 깊은 부자들의 기부를 통해 교회의 사유 재산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 때 라테라노 궁전은 상당한 기증의 첫 번째로 콘스탄티누스 1세 자신이 교황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300년 동안 로마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확장된 영토가 시초가 되었는데 6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탈환했다. 하지만 [[롬바르디아]] 족들의 맹공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영향은 총독이 있는 로마 시(市)와 남쪽의 [[나폴리]]로 크게 한정되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이 약해지자 교황은 점점 로마 공국을 다스리는 한 독립 영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751년 라벤나 총독부가 결국 롬바르디아족에 의해 함락되면서 로마 공국은 동로마 제국 본국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롬바르디아족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면서 비밀리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떄 피핀 3세는 754년과 756년에 프랑크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 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족을 무찌르고 교황에게 옛 라벤나 총독부의 영토를 교황에게 증여했다. 이것이 바로 '피핀의 기증'인데 교황령은 로마 공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피핀의 기증으로 시작되었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10~11세기 [[바이킹|노르만족]]과의 충돌로 축소되기도 했으며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때 최대의 면적을 확보하였다. 14세기 교황이 아비뇽 유수(1309~1377)를 당하면서 위상이 크게 실추되기도 했으나, 그 후 교황이 복귀함으로서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카를 5세]]의 [[사코 디 로마]] 사건으로 완전 초토화당하고 교황이 도시를 떠나 피난한 [[굴욕]]적 사태도 있었다(…). 그렇게 18세기 후반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교황청이 맹렬히 반대한 대가로 [[나폴레옹]]에 의해 1799년 최초로 완전히 폐지당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몰락한 후 1815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빈]]에 모여 [[나폴레옹 전쟁]] 종전후 처리를 회의를 한 [[빈 회의]]애서 교황령을 부활시켰지만 1848년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의 혁명운동으로 다시 폐지당했다가, 1861년 신생 이탈리아 정부가 통일전쟁을 통해 로마냐 지방을 강제로 편입한다. 그래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지방만은 [[나폴레옹 3세]](재위 1852~1871)가 보낸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아 건드리지 못하다가, 1870~71년의 [[보불전쟁]]으로 다급해진 프랑스가 군대를 철수시키자 1870년 잽싸게 이탈리아군이 진주해 점령하며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종결되고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령은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비공식적으로 설치되고 1400여 년 만에, 754년 피핀의 기증 이후로는 1100여 년 만에 완전히 소멸하였다. 그 후 로마 교황들은 영토 없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사실상 갇혀 지내며 [[바티칸 포로]]를 자처했다. [[바티칸 포로]] 시대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지속적인 마찰을 벌이다가 [[1929년]]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 최소의 미니국가인 [[바티칸 시국]], 즉 현대의 교황령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교황령은 바티칸 시국과 동의어이며, 교황의 전제주권이 미치는 0.44㎢의 공간이 해당된다. 이 영토는 다른 주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타 국가의 간섭과 영향력이 배제되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군대도 바티칸의 주권을 존중하여 이를 점령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탈리아가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 독일군이 바티칸을 무력으로 포위하여 바티칸 [[근위병]]([[스위스 용병]])과 교전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으며, 연합군으로 가장한 독일군 [[폭격기]]가 바티칸을 폭격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유리가 깨진 사건도 있었다. 또 [[비오 12세]] 때 특히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갈등 국면이 여러차례 빚어지면서 바티칸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항목 참조.] == 참고 문서 == *[[바티칸 시국]] *[[바티칸 포로]] *[[로마]] *[[페루자]] *[[볼로냐]] [[분류:바티칸 시국]][[분류:이탈리아의 역사]][[분류:국가(19세기)]]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바티칸의 역사 (원본 보기) 틀:이탈리아의 역사 (원본 보기) 교황령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