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include(틀:사건사고)] Гулаг, Gulag, 제정~소비에트 러시아의 노동교화수용소 혹은 [[정치범수용소]] [[외래어 표기법]]상 굴라크가 정확하다. 러시아어 Г는 어말에 있으면 /k/로 발음하기 때문. [목차] === 탄생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9/Gulag_Location_Map.svg/1280px-Gulag_Location_Map.svg.png 1918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에서 운영되었던 굴라크들. '''즉 소련과 역사를 함께 한 수용소들이다.'''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대의 개척을 위해 제정러시아에서 정치범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도시 기반을 닦는다거나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긴 곳이었다. 제정러시아부터 시작했지만 제정러시아 시절이 그냥 커피라면 소련 정권 시절은 TOP. 흔히 스탈린 시대를 기원으로 보지만 사실 [[적백내전]] 때부터 체제가 운영되었고 조직적이고 정교한 탄압은 스탈린 정권시기로 보면 된다. 여담으로 '''북한 수용소의 원조는 바로 굴라크다.''' === 수감자의 종류[* 이 부분은 사실 따로 항목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많지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다 적기에는 여백이 부족하므로]] 간단히 작성되었다.] === 한마디로 스탈린 빼고 나머지 전부가 예비 수감자 신세. 스탈린시대에 '''"그 후 아무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한다면 십중팔구 즉결처형을 당했거나 '''이곳에 끌려온 거다.''' * 정치범 - 정말로 체제 비판자일수도 있고 [[높으신 분]]의 비위에 맞지 않거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분 내지는 그의 가족들로 보면 된다. [[대숙청]]항목에서 보면 알듯이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은 수감자로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NKVD 같은 기관의 고위급 간부가 아닌 중하위 간부나 말단 대원의 경우는 얼마후 석방되어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으로 살 수 있었다. 물론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도 식량 부족 같은 걸로 고생한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에서도 초반부에 간수실을 청소하는 주인공 옆에서 간수들이 식량배급문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저런 일로 외국에 갔다가 오는 경우도 간첩 혐의로 몰려서 가는 일이 빈번했고.[*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의하면 소련 선박이 기상 악화로 스웨덴에 표착했고 어느 정도 억류생활 한 후에 승조원 전원이 굴라크로 직행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대독전쟁에서 취득한 독일군의 장비나 훈장을 개인적인 기념으로 가지고 있다가 들켜서 난데없이 반동분자가 되어 굴라크로 향한 예도 있다. 굴라크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2차 대전중 영국해군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여 전후 영국 해군 제독에게 기념품과 편지를 받은 소련 해군장교도 굴라크로 간 이야기가 나온다.[* 작중에서는 나오는 부이놉스키 중령. 매우 꼿꼿한 인물로 나오는데, 실존인물이고 놀랍게도 굴라크에서 생존해서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 전쟁 포로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에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사람들은 일단 비겁내지는 간첩 혐의로 거의 전원 굴라크로 직행했다. 심지어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서 전선에 복귀한 사람도 간첩혐의로 25년 굴라크 수감을 언도받는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이 바로 이 혐의였다. 다만 형량은 10년이었고 작중에선 약 8년을 보내고 2년정도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작중언급으론 형량이 개개인마다 다른게 아니라 시기별로 일괄적으로 10년을 선고하거나 25년을 선고했다고 나온다. 즉, 주인공은 일괄적으로 10년 때릴때 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물론 포로 기간 중에 자유 러시아 군단이나 이런데 자원했다면 굴라크고 뭐고 없다.] * 외국인들 - 전쟁후 독일과 일본군 포로들이 굴라크에 수용된다. 이중 소련체제에 협조적인 사람들은 50년대에 석방되지만 많은 경우 '''당사국이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 할때까지 억류된다. 독일의 소련점령지구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체포된 독일과 프랑스인들이나 냉전 시기 소련 정찰중 실종된 조종사들[* 이 경우는 당연히 의혹 수준이고 아직도 작전중 실종으로 기록된다.]이 여기에 수용되었다. 소련에서 스파이 혐의로 실종된 미국인들[* 이들중 상당수는 경제 공황 전후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이민간''' 미국계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이다.]이나 [[스페인 내전]]중 소련으로 건너간 스페인 공산당원들도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인도 국민군의 영웅 찬드라 보스 역시 시베리아 사망설이 심도있게 제기되고 있다.] * 한국인 -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전후 상당히 많은 고려인들이 굴라크에 이송되었다. 김단야, 조명희 같은 재소련 반일 독립운동가들도 이런 식으로 숙청되었다.[* 다만 이들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MBC에서 방영된 고려인 드라마에서 조명희의 경우는 굴라크 폭동에 연루돼서 사망한 것으로 그렸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재판후 처형이었다.] 80년대 번역된 수용소 군도 완역판에서도 한국인들이 수용된 이야기가 버젓이 실릴 정도였다. 해방 이후 소련군정에 반대한 인사들중 상당수가 굴라크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스탈린 사후 북한 이송과 소련 잔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소련에 잔류한 사람들의 수용소 기록이 90년대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후 관동군에 복무하던 한국인 장병들 역시 굴라크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식민지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았고 대부분 40~50년대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약한 황학소의 경우도 이런 식으로 귀환한 케이스, 처음에는 북한으로 보내졌지만 북한 당국도 고향이 이남이고 본인이 고향으로 가기를 원하면 그냥 38선 월경을 허가해주었다고 한다. 이들의 귀환은 6.25직전인 48~9년도경에 이루어졌는데, 그나마 이때 송환결정이 이루어졌기에 망정이지, 6.25 발발 이후에는 사할린 한인들처럼 소련에 발이 묶이거나 북한에 남아야 했을 수도 있다! 송환 후에 38도선까지 왔지만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국군으로부터 오인사격을 당하는 등, 고향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고생했다고 한다. 소련 억류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는 일본군,인민군,국군이었다"(사해문집)을 참조하면 좋다.] 남한에서 활동중인 삭풍회라는 단체가 바로 구 일본군 출신 시베리아 유형자들의 전우회이다. 물론 악질 [[친일파]]들도 [[NKVD]]가 군정 중인 북한지역에서 대규모로 체포해서 북송해 굴라그로 가두었고 대부분은 못 나오고 거기서 죽어 버린다. 꼭 나쁜것만은 아니었다만 유감스럽게 반공인사 독립운동가들도 공산당원들이 친일파로 모함해 같이 가두어 버려 죽었다는 게 문제다. [[조만식]] 선생의 경우도 소련군정이 죽였단 의혹이 있다. * 사보타주 - 정말로 사보타주일 수도 있지만 상습 지각[* 당시 소련은 지각시 20분당 징역 1년. 아래 할당량 항목에 해당하는 얘기인데, 지역 경찰등이 할당량을 못채운다면 근처 출근버스를 덮친다음 적당한 누명을 씌우고 또 버스를 덮치고 연행한 시간들도 지각죄로 징역을 때렸다.] , 근무중 졸기, 집단 농장 기물파손, 예산 낭비[* 횡령이나 이런게 아니라 기술개발 실패 등의 문제다. 안드레이 투폴레프가 바로 이 혐의로 굴라크에 갔다. 그는 1937년에 투옥되어 1944년에 석방되었다.]등의 혐의로 끌려갔다. * 일반 죄수 - 그야말로 [[살인]], [[강도]], [[강간]] 등의 강력범들도 굴라크 행이었다. 문제는 이런 타입의 인간들은 수용소에서도 내부 조직을 만들어서 잘먹고 잘살고 간수들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지내고 있다. 위에 설명한 혐의로 들어온 일반인들은 식량, 금품, 목숨, 혹은 정조까지도 뺏기게 된다. 수용소 당국보다 가장 무서운 쪽이 바로 이런 죄수들이었다.[* 애플바움의 [[굴락]]에 의하면 50년대 두명의 미국 조종사가 굴라크에 이송된 정황이 있었는데. 한명은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런 일반 죄수들에게 '''맞아죽었다'''고 한다.] * [[내무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인민경찰( 밀리치야 )의 '''할당량''' 때문에 끌려온 사람 - [[대숙청]], [[형벌 부대]] 참고[* 참고로 [[대한민국]] 에서도 1980년대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삼청교육대]] 참조.] === 수감자의 숫자 === 1929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총 '''1400만명'''이 굴라크를 거쳐갔다고 하며[* 이것도 1929년부터 1953년까지 따진거고 그 이전인 1918년부터 1929년 사이에는 정확히 몇명 끌려갔다 나왔는지 측정이 어렵다고 한다(...)], 추가로 600-700만 정도가 국외나 소련의 오지로 추방당하고,여기에 4-5백만명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 되었고, 350만명이 강제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출처:Robert Conquest, Victims of Stalinism: A Comment] 이중 사망한 사람은 대략 '''최소 160만[* 출처:Steven Rosefielde, Red Holocaust]에서 최대 1000만[* 출처:Robert Conquest, The Great Terror: A Reassessment]이 죽었다고 한다(...)''' 이 [[이오시프 스탈린|양반]]이 [[백정#s-2|인간백정]]이라고 불리우는 이유 중 하나다. 아래는 대략 연대순으로 굴라크 감금 인원을 추정한 값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Gulag#History_of_Gulag_population_estimates|영문 위키피디아 자료 차용]]] || 굴라크 수감자수 || 그 해의 수감자 추정인원 || 출처 || 검증방법 || || 1500만명 || 1940-42년 || 모라와 즈위워네그(1945)[* David Dallin and Boris Nicolaevsky, Forced Labor in Soviet Russi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47), p. 59-62.] || 미상 || || 230만 || 1937년 12월 || 티마셰프(1948)[* Timasheff. The Postwar Population of the Soviet Union.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54, No. 2 (Sep. 1948), pp. 148-155] || 권리를 빼앗긴 인구를 계산함 || || 최대 350만 || 1941년 || 재스니(1951)[* Naum Jasny. Labor and Output in Soviet Concentration Camps.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59, No. 5 (Oct. 1951), pp. 405-419] || 소련 NKVD사료 분석 || || '''5000만(...)''' || 스탈린 치하에서 굴라크를 거쳐간 인원의 종합수 || 솔제니친(1975)[*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제2부, Harper and Row, 1975. Estimate was through 1953.] || 수많은 증인의 간증과 솔제니친 본인의 경험,그리고 다양한 간접적 자료를 분석 || || 1760만 || 1942 || 안톤 안토노프-오브세옌코(1999)[* Beria Moscow, ACT, 1999, page 203.] || NKVD문서 || || 4-500만[* 후에 하양조절함.] || 1939 || 휘트크로프트(1981)[* Wheatcroft. On Assessing the Size of Forced Concentration Camp Labour in the Soviet Union, 1929–56. Soviet Studies, Vol. 33, No. 2 (Apr. 1981), pp. 265-295] || 인구 통계학적 자료 분석 || || 1060만[* 후에 하양조절함.] || 1941 || 로즈필드(1981)[* Steven Rosefielde. An Assessment of the Sources and Uses of Gulag Forced Labour 1929–56. Soviet Studies, Vol. 33, No. 1 (Jan. 1981), pp. 51-87] || 모라와 즈위워네그의 자료와 연간 사망률을 기반으로 함 || || 550-950만[* 후에 하양조절함.] || 1938년 후반 || 콘퀘스트(1991)[* Robert Conquest. Excess Deaths and Camp Numbers: Some Comments. Soviet Studies, Vol. 43, No. 5 (1991), pp. 949-952] || 1937년 인구조사 수치,체포와 사망자 인원 추정,다양한 개인 및 문학들을 기반 || || 4-500만 || 매년 || 볼코고노프(약 1990)[* Rappaport, H. Joseph Stalin: A Biographical Companion. ABC-CLIO Greenwood. 1999.] || 미상 || 다만 위의 표를 그대로 믿기는 상당히 어렵다. 볼코고노프는 옐친의 수하로서 그당시의 어용 역사학을 편찬하였고 콘퀘스트나 솔제니친은 반공 반소주의자들로서 편향된 조사를 하였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솔제니친은 그 자신이 겪은 스탈린 체제의 부조리함으로 인한 원한의 영향으로 과대평가 했을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봐도 5000만이 수감되었으면 나라꼴이 어떻게 돌아갈지가 뻔하다] === 노동과 생활 ===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백해 운하가 다 굴라크에서 나온 성과이며, [[TSR]]노선의 건설, 2차대전시기 소련의 산업생산중 상당부분이 여기에서 나온 성과였다... 노동 수용소에 수용된 죄수들에게서 뭐 뽑아낼 게 있나 싶겠지만, 의외로 소비에트 러시아가 굴러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했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라크가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라크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식민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보너스로 그 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다.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 이였다. 1차 5개년 계획으로 이동 된 죄수 집단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중 90%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이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일에 투입되었다. 굴라크는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책임졌으며, 단순노동에만 투입됐을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엘리트 두뇌들도 상당수 굴라크에 투옥돼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의 인센티브는 주로 '''형량 감경'''.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인센티브라고 할 수 있을지도. 스탈린 시절 소비에트 러시아는 문자 그대로 '수용소에서 공돌이가 갈려들어가는' 나라였다.[* 솔제니친도 학창 시절에 수학을 대단히 잘했다는 전력 때문에 잠시 이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얼마 뒤 벽돌을 날랐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책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따르면, 시베리아답게 영하 30도 정도는 따뜻한 날씨이며, 작업장의 난로는 수감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품이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음식은 한끼 200그램 정도의 빵과 너무 오래 끓여서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 국[* 보통 생선이나 오래된 야채가 들어가는데 때때로 식량이 부족할때는 사료용 귀리, 심지어 들풀로도 국을 끓인다.][* 다른 작품에서는 '무만 넣고 끓인 맹탕같은 수프' 가 나오기도 했다. 그냥 아무거나 넣고 끓이는건가보다.]이다. 강도 높은 처벌을 위해 '중영창'이라는 곳이 있는데 15일도 살아남기 힘들고 살아남더라도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 회복하기 힘들다고 한다. 수용소에 따라서는 외부로부터의 소포도 허용된 모양. 뇌물로 쓰인다. 과학자들이 주로 수용된 노동 수용소를 '샤라쉬카'라고 부르며, 유명한 과학자들도 상당수 저 곳에 투옥돼서 갈려들어갔었다. 러시아 우주개발의 아버지 격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로켓엔진 설계자인 발렌틴 글루슈코, 항공기 설계자인 안드레이 투폴레프와[* 폭격기로 유명한 투폴레프 [[설계국]]의 수석설계자.] 페틀랴코프, 미야시시체프, 폴리카르포프 등. 굴라크에서의 생활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에서 잘 표현돼 있다. 솔제니친이 훌륭한 작가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러한 곳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 솔제니친 자신이 그러한 수용소에서 오래 살아봤기 때문이다.[* 국가 반역죄인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스탈린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노땅]], [[꼰대]]류로 비하한 것이 발견되어서이다. 굴라크의 벽돌노동자부터 지식 수용소 인원, 유형지 생활까지 죽는거 제외하고는 상당한 코스를 밟았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소련 정부가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을까봐 두려워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74년 수용소 군도로 추방되었다. 이후 1994년까지 [[소련]]에 돌아오지 못했으며 2008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예수회]] [[신부]] [[월터 치세크]](Walter Ciszek)의 자서전인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에서도 굴라크의 생활과 출소 후의 소련 생활에 대해서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사람은 폴란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부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있다가 바티칸 스파이로 지목되어 붙잡혀 15년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여러 굴라크를 돌아다니며 15년간 강제노동을 했고, 풀려난 뒤에도 감시와 거주 제한이 딸린 제한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63년 미국에 침입했다 잡힌 소련 첩보원 2명과의 교환조건으로 [[소련]]에 억류된 2명의 미국인을 풀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월터 취제크는 이 기회를 통해 23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84년에 별세.] 소련의 굴라크는 정말 최악의 장소라고 생각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고 굳이 비유하자면 [[정치범수용소/북한|소말리아를 능가하는 모 국에 설치된 지상 최악의 생지옥]]이나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보다 조금 덜한 정도였다.[* [[아우슈비츠]]는 당연하고 북한 수용소의 대부분은 석방이 불가능하다. 전거리나 [[요덕 수용소]]의 혁명화구역을 제외한 것이다. '''물론 이 곳도 끔찍한 건 마찬가지다.'''][* 애초의 북한 수용소의 원조는 소련 굴라크다.] 논픽션 [[굴락]]의 저자 애플바움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구 [[소련]]의 그 곳과 '''가장 근접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 따르면 간수가 똥을 먹인다던가 하는 일도 있다. 당시(최소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게는 노동자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경쟁시키는 스타하노프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관련 포상중에 기묘한 것이 있었다. 우수한 실적을 올린 노동자는 여자 죄수 수용소에 위로휴가를 갈 수 있었다. 임신을 하면 3년을 감형시키는 소련 법률 때문에 여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성관계|검열삭제]]를 원했고 [[역강간]]도 횡행했다고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간수에게 뇌물을 주면 원하는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다.[* 당국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뜯어 불태우고.. 일석삼조다. 노동자의 포상도 해결할 수 있고, 임신을 원하는 여자들을 대체 누가 임신시킬 건가에 대한 고민도 해결할 수 있고. 궁극적 목표인 인구증가도 해결할 수 있다!] === 석방? === 스탈린 시대에는 최고 유기징역형인 25년형을[* [[소비에트 연방]]의 [[형법|형법전]]에 따르면, 사형, 25년 후 가석방이 가능한 무기징역, 25년 징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러시아 연방]]의 [[형법|형법전]]도 그대로 계승했는데 사형이 사문화되면서 현재는 최대 25년 형과 무기징역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마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그런거 없다]]'''. 대신 미개척지이거나 소외지인 중앙아시아에 평생 유형생활을 한다. 이곳은 비록 강제노동이나 수감, 고문 이런건 없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감시받는[* 박헌영의 처는 딸을 모스크바에 두고서도 유형생활 때문에 가끔 방문만 허가 받았다.] '''시민'''으로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유형 생활을 했다. 동물원에 주말에 놀러가거나 아플때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갈 정도의 자유를 누리긴 했다. 이때의 경험이 바로 암병동이라는 소설에 나온다. --한국 군대에서는 [[외진]]이란 형태로 경험할 수 있다.--] 그나마 유형생활 도중에 체포되거나 집에 다시 갔다가 체포돼서 20년형을 받는 일도 많아졌는데...스탈린 사후에는 이런 악습은 사라졌고 유형을 받은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런 케이스중에 기구한 것은 북한 정권에 반대한 혐의로 투옥된 반공인사들이다. 이들은 소련 군정에 의해서 체포돼서 굴라크에 수감되었는데 스탈린 사후 '''북한으로 송환'''되는 일을 겪는다. 물론 상당수는 중앙아시아 잔류를 택하지만...] === 변화 === 1953년 4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의사들의 음모' 사건과 '민그렐리야'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3년 9월에는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트로이카( [[소련 공산당]]의 지구당서기, 지방 [[검찰청]]의 검사장, [[내무인민위원회]]의 지부장이 움직이는 3인조 ) 제도를 폐지했다. 1954년 4월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레닌그라드'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4년 4월부터 1956년 1월까지 [[소련 공산당]]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당에서 제명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1954년 5월에 [[소련 최고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은 반혁명 범죄로 기소한 사람들의 석방을 허용하면서 정치범들과 경제범들에 대하여 대규모로 [[사면]]을 베풀 수가 있는 길을 닦았다. 동시에 [[소련 공산당]]은 정치범들과 경제범들 가운데 '근거가 없는 정치적인 죄상을 이유로' 출당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때마침 [[노릴스크]], [[보르쿠타]], 켄기르, 콜리마에서 죄수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광공업의 [[기계화]]와 자동화는 수용소의 [[유지비]]가 강제노동에 의한 경제적인 이익을 초과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결단을 내려 [[사면]]을 베풀었다. 1956년 2월에 열린 [[소련 공산당대회|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악행을 규탄하면서 희생자들의 복권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덕택에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신나게 까던 시절쯤에는 굴라크 강제노동의 나름대로 비중도 줄었고 석방 뒤에 재투옥 제도가 없어졌으며 유형 생활자도 석방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브레즈네프]] 연간에 다시 강화되었지만 이때는 서방에서도 어느 정도 굴라크의 실태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굴라크에 주요 정치범이 수용되었다는 소식이 서방에 알려지면 '''서방에서 지속적인 석방요구'''와 생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에는 그런거 없이 서방에서도 "설마 그런게 있겠냐"는 도시전설 수준......이었으나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자유 폴란드군]] 장교들을 통해서 서방도 공식적으로 굴라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 스탈린 사후의 [[소비에트 연방]]은 굴라크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으니, 그것이 바로 '제명'인데, [[정신병원]]에 수감하거나 가택연금으로 아예 대외적인 활동을 물샐틈없이 차단하는 술책이다. 결국 [[브레즈네프]] 시절때 굴라크가 강화되었다고 한들 굴라크보다 효율적인 시스템이 돌아가는 이상 굴라크라는 시스템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크게 만들어봐야 이미지만 안 좋아지기도 하고... 다만 1980년대까지 콜리마와 [[노릴스크]]와 [[페름]]에서 정치범과 경제범을 대규모로 구금하는 수용소를 운영했다. 1990년대에 [[소비에트 연방]]의 [[동산]]과 [[부동산]]을 모두 인수한 [[소련 장관회의|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연방정부]]는 굴라크의 시설을 이용하여 연쇄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을 가두는 [[교도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NGC의 최악의 러시아 [[교도소]]라는 프로그램에서 [[교도소]] 내부를 제한적으로 공개했으며. 최근에 석유 [[재벌]]로 널리 알려진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구금한 [[교도소]]는 실제로 그렇게 개조한 곳이다. 그래도 그는 안락하게 살았다. === 서방의 반응 ===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굴라크 체제는 그야말로 [[도시전설]]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공화국]] 정부는 굴라크의 존재를 탐지하고 있었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전역에서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공화국]]의 [[교민]]들이 [[내무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인민경찰( 밀리치야 )에 무더기로 잡혀갔는데,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주재 폴란드 [[외교공관|대사관]]이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공화국]]의 외무부에 보고한 덕택이다. 게다가 1940년에 [[폴란드 망명 정부]]가 [[자유 폴란드군]]을 결성하면서 [[폴란드군]] [[포로]]들이 [[이란]]과 [[터키]] 및 [[인도 제국]]과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귀환하고 [[영국]]과 [[프랑스]] 및 [[서독]]과 [[스위스]]에 정착하면서 그들을 구금한 굴라크의 실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의 경우는 그것을 운영한 체제가 완전히 사라졌고 심판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상이 공개된 것이지만 소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었고, 2차 대전 당시 까지만 해도 서방과의 동맹체제 때문에 오히려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를 서방에서는 모른체한 면이 있다. 심지어 [[카틴 학살]]조차도 정황이나 여러 증거로 봐서 소련의 소행임이 분명함에도 미국측에서 동맹을 의식해 그 사실을 독일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1940년대 말 들어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고 동유럽에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거 들어서자 이에 발 맞춰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이슈화 되기시작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에서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실체가 드러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소련이 해빙기를 맞게되면서 굴라크의 실상이 상당부분 드러났고 흐루쇼프가 쫓겨나고 보수화 된 브레즈네프 체제하에서부터는 서방도 고위 반체제 인사나 유명한 운동권 대학생의 굴라크 수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국가적인 항의를 하게 되었다. 80년대 유형생활을 한 핵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가 대표적인 케이스. 굴라크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체계적인 연구는 솔제니친의 르포 '수용소 군도'가 최초였고[* 참고로 1970년대 한국에서는 지극히 반공적인 부분인 1부만 70년대 발췌번역되었고 소련 체제를 설명한 완역본은 80년대 후반에야 나올수 있었다. ~~근데 2000년대 번역판도 1부 발췌역이다~~] 소련 붕괴후 여러 자료들을 모아 집필한 애플바움의 역작 [[굴락]]--[[글록]]--이 출간되었는데, 번역본은 [[불쏘시개]]다.[* 가히 최악의 번역이라 할만하다. 애초에 번역 작업을 제대로된 번역가가 맡아서 하지 않고 GAGA통번역센터라는 번역 업체에서 했다. 각 챕터마다 고유명사의 한글표기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당연하고 비문과 오역이 난무한다. 읽다보면 탄식이 절로 나오는 수준. 심지어 책 첫 페이지의 '감사의 말'조차 번역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 === [[소비에트 연방]]의 손실 보상 === *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해마다 특정 사건들의 심리를 취소해 죄수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고,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해마다 [[사면]]을 베풀어 죄수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안병직, 세계의 과거사 청산 ; 김남섭, 스탈린 체제와 러시아의 과거청산, 342쪽~354쪽 ] * 모든 생존자들은 구속한 날까지 당사자가 근무한 사업소에서 받은 [[월급]]을 기준으로 2월만큼의 [[임금]]을 [[퇴직금]]으로 받을 수가 있고, [[교도소]]와 [[수용소]]에서 복역한 기간을 모두 더해 [[연금]]의 지급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에 합산하는 식으로 금액을 배가한 [[연금]]을 받을 수가 있음. * 1961년 1월에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 10 : 1 ]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 1960년에 [[소련 루블|옛돈]]으로 지급을 완료한 [[퇴직금]]과 [[연금]]의 금액 = 1961년에 [[소련 루블|새돈]]으로 지급을 고려한 [[퇴직금]]과 [[연금]]의 금액 ]으로 규정함. * 1953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아파트]]의 청약에 대하여 최우선의 편의를 제공함. * 1988년에 [[소련 최고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에 따르면, [[소련 공산당]]의 지구당과 [[국가보안위원회]]의 지부와 지방 [[검찰청]]이 1926년부터 1955년까지 [[내무인민위원회]]가 수사한 모든 사건들을 재심함. * 1989년에 [[소련 최고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에 따르면, 트로이카를 비롯한 초법적인 기관에서 내린 판결은 모두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그 재판을 받은 사람들을 복권함. * 1990년에 [[소련 최고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에 따르면, 농장의 집단화에 반대하거나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거나 [[추축국]]에 협력한 죄목으로 구속한 사람들을 복권함. * 1991년 1월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이 [ 1 : 1 ]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연인]] 1명당 교환이 가능한 액수를 [ 1000[[소련 루블|루블]] = 1000[[미국 달러|달러]] ]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함. === [[러시아 연방]]의 손실 보상 === * 1991년 10월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소련 최고회의|6개국 소비에트의 공화국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들은 정치적인 억압에 의한 희생자들의 복권을 다루고 있으며, [[소련 최고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들을 대체함.[* 안병직, 세계의 과거사 청산 ; 김남섭, 스탈린 체제와 러시아의 과거청산, 355쪽~362쪽 ] * [[소련 장관회의|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연방정부]]가 메모리알([[시민단체]])의 굴라크 기념사업에 대하여 [[유지비]]를 [[기부]]할 수가 있게 되었음. * 1992년 3월에 [[소련 최고회의|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최고회의]]가 복권한 사람들에게 몰수한 재산을 반환하는 [[특별법]]을 입법했는데, 매월 180[[소련 루블|루블]]( 당시의 법률에 바탕한 매월 [[최저임금]]의 75% )을 수감한 기간만큼 곱해 지불하면서 최다 액수를 2만 5천 [[소련 루블|루블]] 이하로 규정하고 있으며, [[소련 장관회의|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연방정부]]가 복권한 사람들의 의식주에 대하여 [[아파트]]와 버스표와 무상 의료 혜택을 제공함. * 1992년 10월에 [[소련 장관회의|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연방정부]]가 1억 명의 국민들에게 민영화기업 주식상환권을 평등하게 지급했는데, [[러시아 연방]]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연인]] 1명당 민영화기업 주식상환권을 [ 1만 [[소련 루블|루블]] = 100[[미국 달러|달러]] ]만큼 지급함. * 1993년 7월에 [[보리스 옐친|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 1 : 1 ]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연인]] 1명당 교환이 가능한 액수를 [ 10만 [[러시아 루블|루블]] = 100[[미국 달러|달러]] ]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함. * 1996년 6월에 [[보리스 옐친|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1990년 12월 31일까지 '[[러시아 연방]] [[저축은행]]'에 [[예금]] [[통장]]을 미리 개설해 돈을 [[저축]]한 사람들 가운데 아무리 늦어도 1915년 12월 31일까지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출생한 만80세 이상의 [[노인]]에게 당시에 [[저축]]한 금액의 1000배만큼 환불하면서 [[자연인]] 1명당 환불이 가능한 액수를 [ 100만 [[러시아 루블|루블]] = 1000[[미국 달러|달러]] ]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함. === 현실의 굴라크 === * [[루뱐카]] - 현 [[러시아]]의 [[FSB]] 본부이자 [[소련]] 시절 [[KGB]]의 본부. * [[정치범수용소]] * [[보르쿠타]] 소재 굴라크 === 매체에서의 굴라크 === ==== 게임에서의 굴라크 ==== * [[보더랜드 2]]에서 The Dust에 끼어있는 맵인 Friendship Gulag(우정 굴라크). 정작 맵은 오픈월드 FPS답게 하이페리온 직원들과 로더들로 우글거린다. 블러드샷 요새에서 제때 롤랜드를 구출 못하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브퀘스트 모두 완수하는 도전과제를 달성하기 전에는 갈일이 거의 없는 지역.[* 서브퀘가 하나 존재한다.] 애초에 구석에 처박혀있기도 하고. * [[콜 오브 듀티 시리즈]] * [[모던 워페어 2]]에서의 미션 "The Gulag" : 캄차카 반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폐쇄된 굴라크를 TF-141이 ~~겸사겸사 SAM레이더 파괴해 가면서~~ 강습하는 것이 주 내용으로 이 굴라크에는 마카로프의 테러조직, 이너 서클이 억류 중인 627번 죄수가 있다. 이 죄수를 구출하는 것이 이 미션의 목적으로 이 죄수의 [[프라이스 대위|정체는...]] * [[블랙 옵스 1]]에서의 미션 "Vorkuta"의 [[보르쿠타]] 수용소 : 카스트로 암살 작전에서 포로로 잡힌 주인공 [[알렉스 메이슨]]은 이 수용소에 수용돼 강제노동을 하던 중 친해지게 된 [[빅토르 레즈노프]]와 함께 수용소 죄수들을 사주, 폭동을 일으켜 수용소를 탈출하고자 한다. * [[트로피코 4]]의 Labor Camp : 기존의 들어가서 5년만 썩고 나오는 교도소와 달리 이쪽은 진짜 굴라크다. 죄수들은 '''프레지덴테가 석방해주고 싶으실 때까지''' 수용되어 그 안에서만 먹고 자며 '''강제노동'''으로 농사를 짓는다. 이 건물이 생기고 난 후 교도소는 안 짓고 이것만 짓는데, 수용인원도 훨씬 많고 영원히 가둬둘 수 있고 식량도 얻기 때문. ~~나이 20에 들어와서 90에 석방될 수도 있다.~~ * [[팀 포트리스 2]] : 다른 것들과는 달리 그냥 설정상으로만 등장한다. 코믹스에서 [[헤비(팀 포트리스 2)|헤비]]가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했었다고 언급되었다. ==== 소설 및 만화 매체에서의 굴라크 ====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DC 코믹스]]의 [[킹덤 컴]] - [[슈퍼맨]]이 빌런들을 가둬놓고 교화시키기 위해 만든 시설 * 동명의 영화 - 1985년작 영화로 KBS 방영제목은 수용소 군도 굴락, 미국인 미식축구 선수가 ~~여자를 잘못 만나서~~ 소련의 계략으로 수용소에 수감돼서 겪는 일, 비중있는 조연으로 [[맬컴 맥다월]]이 영국인 스파이로 나온다. * 싸이베리아 ~~게임방~~ - 원제는 LOST IN SIBERIA, 영국인 고고학자가 이란에서 체포돼서[* 진짜 스파이와 동명이인이었는데 KGB가 잘못을 알고도 그냥 시베리아로 보냈다.] 고통받는 이야기. 한국에서는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잔인한 장면은 없어도 구질구질하고 비참한 장면의 연속이라 보는 내내 고문을 받는 듯한 작품, 실제 수용소에서 10년을 보낸 감독의 경험이 녹아있다. 결말은 주인공이 이란의 [[샤]]의 도움으로 석방돼서 돌아간다고 하는데 잘 보면 이 부분은 주인공이 죽기전에 꾼 환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환영회 장면에서 수용소 친구들이 환상속에서 갑툭튀하고 남아있던 친구들이 굴라크 이송중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고 석방되어도 아직도 마음만은 굴라크에 살고 있다는 주인공의 나레이션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간다.] 깐느 출품작 * Comming out of the ice - 1920년대 포드사 공장 건설 때문에 소련으로 이주한 미국공산당원을 부모로 둔 주인공의 이야기. 이 사람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소련에서 낙하산 시범이나 노력영웅으로 성공했지만 굴라크에 수용된다. 결국 1970년대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안정효의 책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반공특선'''으로 TV에 방영되었다고 한다. * 웨이백 - [[죽은 시인의 사회]]의 피터 위어 감독의 최신작. 한국에도 소개된바 있는 폴란드 전쟁포로가 굴라크를 탈출해서 티벳과 인도를 거쳐 귀환하는 이야기이다.[* 다만 이 수기 부분은 이전부터 가짜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소련의 기록에 의하면 주인공은 석방돼서 자유폴란드군에 인계되었다고 한다. 2007년 또 다른 폴란드 조종사 출신 장교가 그 경험은 자신의 경험이었고 주인공은 자신의 경험을 도용했다고 주장한바 있다. 인도 주둔 영국군 기록에 의하면 실지로 굴라크를 탈출해서 인도로 망명한 사람들은 존재하긴 한다고 한다.] * 마지막 한 걸음까지 - 알래스카를 마주 본 굴라크에 수감된 독일 장교가 탈출해서 이란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역시 실제 경험담을 소재로 했다. * ~~시베리아 14수용소~~ - 나찌 일사 시리즈 4편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백야의 연인 - 원제 Ice Runner. CIA 요원인 주인공은 [[높으신 분들]]의 사정상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도 석방이 되지 않고 시베리아로 이송중 같이 타고 있다 사고로 죽게 된 범죄자와 신분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 범죄자의 아내를 만나게 되고 둘이 사랑하게 되는데...공산주의가 붕괴되고 그의 정체가 탄로나서 석방될 기회가 생기지만 공산주의에 투철한 소장은 주인공을 알래스카 근방의 북극권 수용소로 이송하고 그는 말 그대로 설원을 '''달려서''' 에스키모 마을로 탈출에 성공한다. KBS에서 방영된바 있다. * 북극권의 탈출 - 원제 Born American. 핀란드 영화로 휴가를 맞아 핀란드에 사냥을 떠난 미국인 청년들이 술김에 '''국경을 넘어''' 난리를 치다가 소련군에 체포돼서 시베리아 굴라크로 이송된다.[* 미국 대사관에서 구하려 했지만 소련 당국이 제공한 성노예를 받고 입을 씻는다.] 이후 하나는 살해 당하고 하나는 미처버리고 나머지 주인공은 굴라크의 지하 지도자인 제독[* 놀랍게도 흑인이며 미국의 [[높으신 분들]]의 치부를 알고 있고 책으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고위 스파이라는 암시가 있다.]을 통해 러시아 여인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게 된다.[* 제독은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행방을 감추고 은거했다고 자막에 나온다.] 핀란드 영화중에 당시로서는 제작비가 많이 들었던 작품이고[* 막상 소련에 대한 비판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상영금지를 먹었다. 하지만 감독인 [[레니 할린]]은 이 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척 노리스]]가 주연을 맡을 뻔했으나 아들인 마이크 노리스가 주연했다. ~~굴라크 수용소장 목이 꺾일 기세~~ ==== 영화에서의 굴라크 ==== * [[마이웨이]] - 일본군으로 징집당한 [[김준식]] 일행과 일본군 지휘관인 [[하세가와 타츠오]]와 병사들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여기로 오게 된다. http://images3.static-bluray.com/reviews/6398_18_large.jpg http://images.static-bluray.com/reviews/6398_16_large.jpg * [[웨이 백]] - 굴라드에 수용된 동유럽 출신 죄수들의 생활과 탈출 과정들을 다루고 있다 [[분류:소련]]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사건사고 (원본 보기) 굴라크 문서로 돌아갑니다.